이상홍(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우리의 운동이 특정인으로 대표되거나 대변되어서는 아니 되지만 역사적 인물은 늘 있기 마련이다. 황분희 부위원장이 그렇다. 월성핵발전소 주변 주민들의 이주를 요구하는 투쟁을 떠올릴 때 누구나 황분희 부위원장을 떠올린다. 탈핵에 관심 있는 시민이라면 이름은 몰라도 영화 <월성>의 주인공인 황분희를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황분희씨가 피켓을 든 채 상여시위를 하고 있다. ⓒ김우창
2014년 8월 25일 시작한 월성핵발전소 앞 천막농성이 올해로 10년을 꽉 채운다. 10년 세월은 황분희 부위원장을 진짜 할머니로 만들었다. 투쟁을 처음 시작할 때는 손자가 있어서 가족 관계상 할머니였으나 기력은 청춘이었다. 이제 육신도 할머니가 됐다. 그 사이 천막 농성장은 고령과 지병으로 돌아가신 분도 더러 계시고, 오랜 투쟁으로 지친 가운데 사회적 압박과 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투쟁을 그만둔 분들이 매우 많다. 그 많던 분들이 떠난 천막 농성장에 이제 3~5명이 남아서 우리라도 끝까지 가자고 서로를 위로하며 의지하고 있다.

월성원전 홍보관 앞 농성장 한 켠에 이주대책위 상여시위 물품이 놓여 있다. ⓒ환경운동연합
최근 황분희 부위원장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다. 아니 큰 결단의 시간이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 뒤로 도로가 건설되면서 집이 헐리게 됐다. 당연히 토지 수용 등 보상을 받는다. 다시 살 집을 알아봐야 하므로 자동으로 이주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황분희 부위원장 가족은 이주를 포기하고 도로 공사 때문에 헐리는 집 옆에 새로운 집을 짓기로 했다. 지난 10년간 이주를 요구하며 함께해온 동료들, 지켜봐 온 동네 주민들을 두고 마을을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중학생이 된 어렸던 손자는 핵발전소의 진실을 아는 나이가 됐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루빨리 그 마을에서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월성원전 이주대책위 농성 5년째인 2019년 “반드시 후손들은 이런 곳에서 살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황분희 부위원장(좌측)이 월성이주대책위 주민들과 이주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환경운동연합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이주대책위 주민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천막 농성장을 방문하는 연대 시민을 만났을 때 황분희 부위원장이 간혹 “우리 이 국장이 도와주어서…”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웃어넘기기도 하지만, 답 말을 해야 할 때면 “이주대책위가 있어서 힘겨운 탈핵운동을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곤 했다. 사실이다. 이주대책위가 없었으면 이 험지에서 지난 10년을 어떻게 버텨왔을까? 사실, 이 문제는 대한민국 탈핵진영 모두가 진 빚이다.
이주대책위원회가 월성핵발전소 앞에 천막 농성장을 꾸리고 투쟁해 온 10년은 엄청난 파고가 휩쓸고 지나간 10년이었다. 한국 탈핵운동의 시선에서 보면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탈핵의 화두가 우리 사회의 보편 이슈로 전개되는 과정이고, 경주지역으로 국한에서 보면 월성핵발전소 1호기의 수명연장 파고와 고준위핵폐기물 임시저장시설인 맥스터 추가건설의 파고가 지나간 10년이었다. 이 고비 고비마다 핵발전소에 가장 가까이 살면서 “불안해서 못 살겠다. 이주대책 마련하라”고 외치며 천막농성을 펼치는 주민들의 존재는, 사실 우리의 든든한 ‘빽’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황분희 부위원장을 비롯한 이주대책위원회 어르신들의 투쟁에 기대어서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펼쳐진 험난한 투쟁의 파고를 이겨왔는지도 모른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나는 그렇다.
그런데, 요즘 부쩍 기력이 쇠하고 힘겨워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본다. 월요일 아침마다 출근 행진에서 마주치는 눈빛이 지쳐있다. 기록 노동자인 희정 작가의 『뒷자리』에서 황분희 부위원장의 인터뷰를 읽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민들이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 서로를 다독였던 말이 “10년만 해보자”라는 것이었다. 그 10년이 됐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주저앉아야 하나!

경주환경운동연합은 오랫동안 비어있던 게시대에 ‘22대 국회는 이주 지원 법안부터 제정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경주환경운동연합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10년이 되었다는 거다. 약속의 시간이 되었고, 더 싸워보자 더 기다려보자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모두들 진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농성장 한쪽에 현수막 게시대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바로바로 현수막이 걸리던 이곳이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며칠 전 다시 현수막을 걸었다.
“월성 주민 천막농성 10년! 22대 국회는 이주 지원 법안부터 제정합시다!”
(이 글은 탈핵신문 4월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이상홍 활동가는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경주는 신라천년의 왕경 도시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불국사 ․ 석굴암이 있으며 국보29점, 보물75점, 사적72개소 등 총283점의 문화유적이 산재되어 있는 역사적 도시이며 환경친화적인 도시입니다. 그러나 주변도시의 공업화와 개발론에 밀려 천년고도의 이미지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경주환경운동연합은 민족의 정신적 고향인 경주를 세계적인 역사․환경도시로 가꾸고 30만 경주시민의 환경오염과 파괴로부터 시민의 삶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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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홍(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우리의 운동이 특정인으로 대표되거나 대변되어서는 아니 되지만 역사적 인물은 늘 있기 마련이다. 황분희 부위원장이 그렇다. 월성핵발전소 주변 주민들의 이주를 요구하는 투쟁을 떠올릴 때 누구나 황분희 부위원장을 떠올린다. 탈핵에 관심 있는 시민이라면 이름은 몰라도 영화 <월성>의 주인공인 황분희를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황분희씨가 피켓을 든 채 상여시위를 하고 있다. ⓒ김우창
2014년 8월 25일 시작한 월성핵발전소 앞 천막농성이 올해로 10년을 꽉 채운다. 10년 세월은 황분희 부위원장을 진짜 할머니로 만들었다. 투쟁을 처음 시작할 때는 손자가 있어서 가족 관계상 할머니였으나 기력은 청춘이었다. 이제 육신도 할머니가 됐다. 그 사이 천막 농성장은 고령과 지병으로 돌아가신 분도 더러 계시고, 오랜 투쟁으로 지친 가운데 사회적 압박과 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투쟁을 그만둔 분들이 매우 많다. 그 많던 분들이 떠난 천막 농성장에 이제 3~5명이 남아서 우리라도 끝까지 가자고 서로를 위로하며 의지하고 있다.
월성원전 홍보관 앞 농성장 한 켠에 이주대책위 상여시위 물품이 놓여 있다. ⓒ환경운동연합
최근 황분희 부위원장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다. 아니 큰 결단의 시간이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 뒤로 도로가 건설되면서 집이 헐리게 됐다. 당연히 토지 수용 등 보상을 받는다. 다시 살 집을 알아봐야 하므로 자동으로 이주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황분희 부위원장 가족은 이주를 포기하고 도로 공사 때문에 헐리는 집 옆에 새로운 집을 짓기로 했다. 지난 10년간 이주를 요구하며 함께해온 동료들, 지켜봐 온 동네 주민들을 두고 마을을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중학생이 된 어렸던 손자는 핵발전소의 진실을 아는 나이가 됐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루빨리 그 마을에서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월성원전 이주대책위 농성 5년째인 2019년 “반드시 후손들은 이런 곳에서 살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황분희 부위원장(좌측)이 월성이주대책위 주민들과 이주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환경운동연합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이주대책위 주민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천막 농성장을 방문하는 연대 시민을 만났을 때 황분희 부위원장이 간혹 “우리 이 국장이 도와주어서…”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웃어넘기기도 하지만, 답 말을 해야 할 때면 “이주대책위가 있어서 힘겨운 탈핵운동을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곤 했다. 사실이다. 이주대책위가 없었으면 이 험지에서 지난 10년을 어떻게 버텨왔을까? 사실, 이 문제는 대한민국 탈핵진영 모두가 진 빚이다.
이주대책위원회가 월성핵발전소 앞에 천막 농성장을 꾸리고 투쟁해 온 10년은 엄청난 파고가 휩쓸고 지나간 10년이었다. 한국 탈핵운동의 시선에서 보면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탈핵의 화두가 우리 사회의 보편 이슈로 전개되는 과정이고, 경주지역으로 국한에서 보면 월성핵발전소 1호기의 수명연장 파고와 고준위핵폐기물 임시저장시설인 맥스터 추가건설의 파고가 지나간 10년이었다. 이 고비 고비마다 핵발전소에 가장 가까이 살면서 “불안해서 못 살겠다. 이주대책 마련하라”고 외치며 천막농성을 펼치는 주민들의 존재는, 사실 우리의 든든한 ‘빽’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황분희 부위원장을 비롯한 이주대책위원회 어르신들의 투쟁에 기대어서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펼쳐진 험난한 투쟁의 파고를 이겨왔는지도 모른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나는 그렇다.
그런데, 요즘 부쩍 기력이 쇠하고 힘겨워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본다. 월요일 아침마다 출근 행진에서 마주치는 눈빛이 지쳐있다. 기록 노동자인 희정 작가의 『뒷자리』에서 황분희 부위원장의 인터뷰를 읽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민들이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 서로를 다독였던 말이 “10년만 해보자”라는 것이었다. 그 10년이 됐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주저앉아야 하나!
경주환경운동연합은 오랫동안 비어있던 게시대에 ‘22대 국회는 이주 지원 법안부터 제정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경주환경운동연합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10년이 되었다는 거다. 약속의 시간이 되었고, 더 싸워보자 더 기다려보자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모두들 진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농성장 한쪽에 현수막 게시대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바로바로 현수막이 걸리던 이곳이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며칠 전 다시 현수막을 걸었다.
“월성 주민 천막농성 10년! 22대 국회는 이주 지원 법안부터 제정합시다!”
(이 글은 탈핵신문 4월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이상홍 활동가는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경주는 신라천년의 왕경 도시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불국사 ․ 석굴암이 있으며 국보29점, 보물75점, 사적72개소 등 총283점의 문화유적이 산재되어 있는 역사적 도시이며 환경친화적인 도시입니다. 그러나 주변도시의 공업화와 개발론에 밀려 천년고도의 이미지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경주환경운동연합은 민족의 정신적 고향인 경주를 세계적인 역사․환경도시로 가꾸고 30만 경주시민의 환경오염과 파괴로부터 시민의 삶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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