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


국가가 세금을 국민의 뜻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해 국가 예산이 쓰일 수 있도록,

환경운동연합에서는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감시활동과 정책제안활동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환경일반 


국가가 세금을 국민의 뜻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해 국가 예산이 쓰일 수 있도록, 환경운동연합에서는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감시활동과 정책제안활동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환경일반[활동기사] '드라마 같던 광장의 한 페이지'를 닫으며

강홍구 조직정책팀 팀장
2025-05-17
조회수 309


[기획인터뷰]#04 프로 자봉러 이희구님을 만나다.



"광장의 연대를 콘텐츠로 만든다면 커피차, 난방버스를 주목하지 않을까요? (중략) 사람들이 몰리는 극적인 순간에 난방버스가, 음식과 먹거리들이 오고, 어묵국물이 나타났어요. 다양한 나눔들, 한강진에서 응원봉을 들고 안내해주시던 꼰벤뚜알 수도회 신부님, 소소하지만 따뜻함으로 이뤄진 물방울들이 봇물처럼 터졌던 순간들을 주목하고 싶어요."


그녀의 상세한 묘사에 광장의 하이라이트가 그림처럼 그려졌다. 희구씨는 디자인을 전공했고, 드라마 기획PD로 일하고 있다. 방송 업계에서는 속칭 '이야기꾼', 이야기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칭한다고 한다. 그녀는 왜 광장으로 달려왔을까?


지난 9일 서울시 종로구의 카페에서 이희구(33)씨를 만났다. 그녀는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비상행동이 주최한 집회의 자원봉사자로, 일명 '프로 자봉러'다. 자원봉사단은 지난 4월 19일 해단식을 마쳤다. 윤석열씨의 파면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12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공식 선거운동 기간 앞두고 그녀의 소회를 들어봤다.


희구씨는 먼저 드라마 문법과의 유사성을 언급했다. 일종의 영웅서사와 비슷한데 영웅은 집을 떠나며 자신의 바람에서 벗어나는 일을 겪지만, 자신을 바꾸고 이겨내며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지난 겨울부터 시민들이 겪어낸 여정이 이 문법에도 들어맞는다는 것.


그녀도 최대한 빨리 내란이 종식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화살은 살짝 빗나갔다. 시간이 걸렸지만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선의와 희망, 연대를 발견하게 됐다. 의도치 않았던 하이라이트다.


이러한 과정이 지난함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됐다. 파면 이후에도 예상치 못한 일들은 많았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시민들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한 명, 한 명의 영웅이 거리에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언제든 광장으로 나올 준비가 돼 있는 '우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넘어 연대의 서사로


희구씨가 광장으로 달려왔던 원동력은 '수치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계엄령이 공포되던 그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에 그녀가 기획에 참여했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행동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자책이 담겨 있었다.


포고령이 나오던 그 밤은 유독 길었다. 그녀도 새벽 네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진 후 박근혜정부가 유가족들을 매몰차게 대하던 상황을 봤을 때에도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래서 작지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2014년 그때에도, 10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회사가 삼각지에 있어서 다음날 출근길은 삼엄했다. 회사 분위기도 심각했다. 마침 준비하던 차기작이 해방 전후 역사적 사실에 관한 내용을 담은 소설에 바탕을 뒀던 터였다. 혹시나 계엄군이 들어오는 것인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계엄정국의 후폭풍으로 작품도 잘 안됐다. 도무지 시청률이 나오질 않았다. 현실이 더 드라마같은데 어쩌겠느냐는 푸념이 동료들 사이에서도 나왔다.


이런 특수한 상황을 맞으니 평범했던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그래서 되찾고 싶어졌다. 이 때문에 더 열심히 집회에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광장 서사는 수치심으로 다시 연결됐다.


"1차 남태령 집회가 열렸을때요, 사실 낮에 광화문 주말집회가 끝나고 추워서 집에 왔거든요. 전기장판을 켜고 생중계로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새벽 3시가 넘어가니 경찰들이 막 압박을 하는 거에요. 다시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밀려왔죠."


그래서 희구씨도 결심했다.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야겠다고. 더 망설일 게 없었다. 바로 택시를 타고 남태령으로 향했다. 영화 촬영 일을 했던 경험도 있어서 추위는 견딜 자신 있었다. 경험을 살려 패딩을 비롯해 최대한 따뜻하게 껴입었다. 그런데도 체감하는 날씨는 매서웠다.


몸이 얼기 시작했다. 먼저 와있던 어느 20대 여성이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휴식을 권유했지만 괜찮다며 꿋꿋이 버텨냈다. 어떤 신념이 이들을 불러낸 것일까, 희구씨는 생각했다.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 구절처럼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라고 회상했다.


집회를 나가보면 주변에 거주하는 분들이나 장사하시는 분들은 달가워하지 않는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소음도 있고 업종에 따라 매출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태령 인근 김밥집 사장님의 반응은 달랐다고 한다.


"에구 대단하다. 어떡하냐. 이렇게 추워서..."


새벽부터 4시간을 버티고 희구씨는 7시가 넘어 밥을 먹으러 이동했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얼얼했다. 마침 가게 사장님이 TV로 유튜브 생중계를 보고 계셨다. 그분은 막 실내로 들어온 그녀를 장하다고 응원해주셨다. 그래도 사람들이 알아주는구나, 다행이다.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한강진에서 밤을 새면서 '우리'라는 범주가 많이 확장됐던 것 같아요."


밤을 새우면서 집회를 하다 보니 발언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현장에서 처음 만난 이들의 이야기는 다양했다. 마음이 안 좋다고 김치와 먹거리를 가져온 분들부터 , 급식노동자, 배달라이더 등 직업도 다양했다. 일상에서 마주쳤을 법한 스쳐 지나간 이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경찰이 집회를 압박할 때 앞장서서 나서주는 노동조합의 모습을 보았고, 같이 거리에서 앉아있다 보니 더욱 연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후원단체 리스트도 자연스럽게 늘어갔다.


'우리'라는 울타리가 개념이 넓어지니 사안들이 구체적으로 보였다. 단순히 배달음식을 시킬때도 배달유니온이 생각났고, 추상적으로 들렸던 전장연의 이동권 투쟁에도 공감대가 넓어졌다.


한남동 일신빌딩 로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졸고 몸을 녹이던 때에는 신념을 지키려고 힘들어도 모여있는 모습들을 보며 '연결됨'을 생각했다. 각자의 인생을 살던 이들이 모여들었으니 말이다.


직장이나 주변 지인들의 관심과 참여에 대한 온도는 괴리감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곁에 소중하다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해를 못할 때가 힘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더 광장을 찾게 됐다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음을 새삼 다시 느꼈고, 다독여가니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물론 집회참여를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었다. 거리에서 보이지는 않아도 다른 방식으로 함께한다는 생각을 하니 점점 속상함은 내려놓게 됐다고 말했다. 아쉬움은 뒤로하고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목표를 어떻게 잘 이뤄낼 수 있을지에 집중했다.


"드라마를 보면 다소 지난한 중간 과정을 건너뛸 수 있거든요. 한달 후, 평화가 찾아왔다. 이런게 현실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집회가 길어지며 쉽지 않은 상황들도 있었다. 위기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비타민을 비롯해 소소한 먹거리들을 나누며 서로의 고생을 격려했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렇게 소소함 속에 오고 가는 감정들이 좋았다. 새로운 사람들과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느낌을 공유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깨알같은 에피소드도 있었다. 2차 남태령 초대장이 왔던 날, 지하철에서 옆 사람 가방의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세월호와 이태원참사 관련 메시지가 있었다. 비타민 하나를 건내면서 물었다. "남태령 가시죠?"


이야기가 통하니 재밌었다. 사당역에 들러서 함께 먹을거릴 담았다. 같이 과자도 나눠주었다. 스몰토크를 하다가 만난 이들과 단톡방을 팠다. 방 이름은 "남태령." 집회관련 정보, 소소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제는 독서모임도 생각중이다. 시민들은 연결되었고 새로운 작은 광장들이 열려갔다.


그렇게 희구씨도 '동지'들이 늘어갔다. 이제는 뭔가 대체할 수 없는 단어가 됐다고 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함께 고생하며 끈끈함과 치열했던 상황을 설명하는 무언가가 안 보이고, 선생님은 너무 관계가 멀어 보였다. 낯설었던 그 단어가 4월쯤 되니 입에 익게 됐다.


익명성과 텍스트 중심으로 펼쳐진 트위터를 타고, 다양한 깃발들을 들고나온 기수들과 스티커, 이색적인 굿즈나눔 문화까지 광장과 함께 찾아온 복잡한 문제는 일종의 놀이 문화로 확장됐다.


앞으로도 좋은 연대를 위해


윤석열 파면 이후 그녀는 여행을 다녀왔다.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 고산지대에 다녀오니 또 다른 경험이었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귀국 후 최근에는 광화문에 있는 거통고(금속노조 거제통영 조선하청지회) 고공농성장을 찾았다고 한다. 여전히 연대의 손길이 필요한 현장들은 많았다.


이렇게 허전했었나. 살짝 헛헛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더이상 거리에 부스도 없고 너무 깨끗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 더 이상 보지말자는 마지막 안부 인사처럼, (빨리 파면이 돼서) 다음주에는 이제 그만 보자고 자원봉사자들이 농담삼아 인사를 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저뿐만 아니라 지난 넉 달 동안 다들 그랬어요. 본인을 챙기기보다 내 목소리와 연대가 필요한 곳이 더 걱정이 되더라고요. 사람들 생각이 다들 비슷했죠. 나마저도 없으면 더 힘드니까요. 그런데 요즘같은 과도기적인 상황일수록, 나를 좀더 챙기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서 희구씨는 스스로를 돌보고 챙기기로 했다. 책과 상담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도 돌아보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대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갑작스러운 대법원의 판결에 요즘에도 사실 답답하고 화가 나기는 했어요. 그런데 시민들의 빠른 리액션을 보고 이제 좀 발 뻗고 자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더 이상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그녀는 민주주의가 이렇게 더디고 느리게 움직이지만, 결국에는 갈 길을 갈것이라고 강조했다. 1보 후퇴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다음엔 2보를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언제든지 광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으면 되니까.


희구씨는 그래서 낙관한다.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 어느 선배에게 들었던, '1보후퇴 2보 전진론'이 요즘 들어 다시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말도 안되는 일들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시민들은 비관을 넘어섰다. 광장으로 나왔고, 목소리를 냈고 함께 연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따금씩 마음이 허할 때면 퇴진집회 플래이리스트를 재생한다. 세상에 지지말아요, 바위처럼 등 각종 '브금(BGM)'들은 그녀의 일상으로 녹아들었다. 때로는 노동요로, 때로는 휴식으로. 광장은 그녀의 소소한 일상에도 큰 변화를 남겼다.


"드라마는 한 인물이 어떤 감정을 겪는지 감정의 변화를 들여다 보고요, 영화는 사건 중심으로 가요. 우리의 지난 네 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한편의 드라마였죠. 변곡점 안에 있었고, 그렇게 우리가 겪고 바라봤던 게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그녀는 말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게 기획자들의 숙명이라 생각해요. 거리에서 들었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처럼. 이번 장을 마쳤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좋은 연대를 펼쳐가도록."

사단법인 환경운동연합 이사장 : 노진철

고유번호 : 275-82-00406
대표전화 : 02-735-7000

Fax : 02-735-7020
주소 : 03039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 23, 2층(누하동)

대표 메일 : web@kfem.or.kr
후원 : 우리은행 1005-801-085917

(예금주 : 사단법인 환경운동연합)


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후원하기
공익제보(국민인권익위)
국세청
사이트맵 열기



Copyright © 2022. KFE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