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터뷰]#01 윤석열 퇴진 집회 '프로 자봉러' 서지원, 신희윤님을 만나다

“탄핵안이 통과됬을때 다만세 노래가 나왔는데 거기까지는 기뻤어요. 그런데 풍선이 날아가더라고요. 그 순간 탄핵안이 인용되어도 남는 과제들이 산적하겠구나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그 순간 기쁨보다 무거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희윤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의결되던 날을 꼽았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집단퇴장으로 표결이 불성립되었고, 한차례 연기되었던 상황이라 희열이려니 짐작했지만, 그녀가 답한 말의 온도는 사뭇 달랐다.

지난 10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서지원(30), 신희윤(27)씨를 만났다. 이들은 윤석열즉각퇴진 사회대개혁비상행동이 주최한 집회의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일명 프로 자봉러들이다. 인파관리와 질서유지를 비롯해 안전한 집회를 만들기 위해 애써온 그들의 소회를 들어보았다.
지원씨도 국회에서의 그 순간을 떠올렸다. 표결이 발표되기 직전이었다.그녀는 지하철역 화장실에 들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서로 모르는 시민들과 함께였는데 같이 계시던 중년부부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남편이 물었다.
“오늘도 이러다가 (탄핵소추안이) 통과가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그러자 아내가 답했다.
“에이 뭐 그런걸 걱정해. 그러면 될 때까지 하면 되지.”
지원씨는 그들의 대화에 가슴이 뭉클하고 힘이 되었다고 했다. 인생을 먼저 살아본 선배들의 말 때문이었을까. 의결을 위한 200표가 안되면 어쩌나 굉장히 떨렸고, 이미 한 번 실패를 맛봤던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의연하게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그 어머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될 때까지 싸울건데, 벌써부터 지치면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고 했다.
부채감, 그들을 행동하게 한 숨은 동력
“저는 12월 3일에 이제 처음에 계엄이 터졌을 때 그때 국회에 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부채감이 좀 세게 남아 있었거든요. 모두에게 당황스러웠던 밤이었잖아요. 그때 택시를 타면 국회로 달려갈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지금도 국회에 달려오셨던 분들 덕분이다 얘기를 많이 하시잖아요. 저도 그래요. 좀 죄책감도 있었고요. 그래서 12월 4일 이후부터 함께하게 되었던 거죠.”

지원씨는 담담하게 회상했다. 나라를 지키고 싶다는 거창한 이유보다 부채감을 덜고 싶은 마음에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원봉사단의 존재를 몰랐다. 그리고 나중에 자원봉사단에 대해 듣고서도 경험이 많은이가 해야할 것 같았다. 그런데 형광 조끼를 입고있는 것만으로도 시민분들에게 안전하다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덕에 그녀도 용기를 냈다. 이런 작은 연대의 말이 동기가 되었고, 타인에게도 참여해달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희윤씨도 집회가 열리니 가야 한다라는 당연함이 먼저였다. 탄핵안이 통과되던 날, 국회의사당 앞에서 사람들이 몰리는 상황을 직접 겪어보기도 했다. 인파속에 끼어보니, 안전관리를 위한 자원봉사자의 큰 역할을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그들에게 전해들은 자원봉사의 내용은 ‘사서고생’에 가까워보였다. 추운날씨에 사람들이 몰리는 야외에서 장시간동안 서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들의 시간을 내야했다. 집회장소까지 이동비용까지 들었다. 또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감정노동을 할 때도 있었다. 이따금 불평을 토로하는 시민들도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인파관리를 하다보면 안내에 따라주지 않는 유튜버들이나 정당의 보좌진, 언론사 관계자들도 나타났다. 묵묵히 버텨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겨울에 시작했던 집회는 기약없이 길어졌다. 봄꽃이 피어나도 기다리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지난 3월 8일에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으로 출소했다. 검찰은 이례적으로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 한달이나 지속되던 평일저녁 집회의 시작이었다. 자원봉사자들도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희윤씨도 그 순간을 기억했다. 그렇게 3월 말쯤 되니까 자원봉사자들도 신경이 곤두섰다고 했다. 이동해주세요, 여기서계시면 안되요. 시민들에게 건내는 말 한마디가 날카로워졌다. 그녀가 한계가 왔다고 체감했던 순간이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1일, 헌법재판소가 거짓말처럼 선고날짜를 잡았다.

연대의 확장 : 다양성과 정체성 그리고 희망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는 희윤씨는, 연대라는 말이 정빠지지 않는 단어임에도, 이번처럼 체감했던 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자원봉사를 하면서 연대가 무엇인지, 그 지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우리가 광장에서 외친 민주주의라는 게 사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체잖아요? 연대라는 건 그런 다양성을 살려가는 과정 아닐까요.”
지원씨의 연대에 대한 경험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로, 여성들 사이에서 연대라는 말은 익숙해진 단어였다. 수면위로 올라온 버닝썬 사건을 보며 그녀는 여성들이 숨지 말고, 참지 말고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자라는 느낌이 컸다고 했다. 그렇게 연대라는 감각 자체는 낯선게 아니었는데, 이번 집회를 통해 연대가 확장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8년 전에 박근혜 탄핵집회 때만해도 발언에 있어서도 조금 덜 조심했고 어린 학생들이 나오면은 기특하다라는 얘기가 많았어요. 집회에 나온 사람들이 소속감을 느끼며 연대하고 있다는 감각도 잘 없었고요. 그때는 좀 유통기한이 짧은 협동작업 느낌이 강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저희가 노동계나 농민들이 요청하시면 달려가서 같이 싸우고, 또 저희가 광장에서 부르면 또 다 같이 올라와서 서로의 사안에 대해서 자기가 몰랐던 부분도 알아가고 함께 힘을 보태는 꾸준한 연대가 되었잖아요?“
이 대목에서 지원씨는 최재천 교수의 책 한구절을 인용했다.
”저는 이번에 가장 컸던 차이가 정체성에 관한 부분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접촉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저희가 알고 있는 것만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었어요. 모르니까 이걸 편견을 갖게 되고 제가 갖고 있던 지식 안에서만 그거를 판단하게 되는데요. 이번 광장에서는 8년전 박근혜때와는 달리 뒷전에 밀려있던 분들이 목소리를 내시면서 자신의 말과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같이 얘기를 하셨잖아요.“
지원씨에게도 몰랐던 다른 세계나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힘들었던 과정들을 알게되는 과정이었다. 그덕에 눈으로 그들을 확인하고, 또 입을 통해 듣고 하면서 일종의 라포가 좀 형성되었다고 표현했다. 거리감이 줄어들면서 그 문제를 내 문제의 범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대가 넓어졌다.
그녀는 덧붙였다. 어떻게 보면 시민들이 무관심했던 게 아니라 이를 표출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어떻게 보면 윤석열 파면을 기회로 우리의 사회문제를 담아낼 광장이 열린 게 아닐까. 그녀는 담담히 희망을 말했다.

서로가 서로를 더 궁금해하는 사회로
쉽지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즐거움과 재충전의 경험을 말했다. 다소 의외였지만 이어지는 답변을 통해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가 자신의 일에 공감해줄 때 행복 느끼는 것 같아요. 광장은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는 분위기였고 에너지를 받는 기분이 들었어요. 의외로 자존감도 키워주고 정서적으로 많은 위안이 되었어요.”
“사회생활의 일환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면 정말 힘들었을것 같아요. 사회적인 가면에 신경 안쓰고, 다양한 집회굿즈로 치장하고 서로 공유하는 경험도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에 쓰레기를 치우고 뒷정리할때 미화공무원 선생님들이 수거하시거든요. 그때 감사합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니까 활짝 웃으시며 화이팅 하시고 가시더라고요. 작지만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도 했어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서로를 더 궁금해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언제든 기꺼이 달려갈 수 있게끔요. 어쨌든 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잖아요.”
다섯달의 걸친 지난 날들은 평범함 일상을 되찾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도, 대통령이 바뀌어도 광장에 울려 퍼질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는 남을 것이다. 결코 그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그녀들의 뭉클한 다짐을 들으며, 이들이 앞으로 만들어갈 연대의 빛을 상상해보았다.
[기획인터뷰]#01 윤석열 퇴진 집회 '프로 자봉러' 서지원, 신희윤님을 만나다
“탄핵안이 통과됬을때 다만세 노래가 나왔는데 거기까지는 기뻤어요. 그런데 풍선이 날아가더라고요. 그 순간 탄핵안이 인용되어도 남는 과제들이 산적하겠구나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그 순간 기쁨보다 무거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희윤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의결되던 날을 꼽았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집단퇴장으로 표결이 불성립되었고, 한차례 연기되었던 상황이라 희열이려니 짐작했지만, 그녀가 답한 말의 온도는 사뭇 달랐다.
지난 10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서지원(30), 신희윤(27)씨를 만났다. 이들은 윤석열즉각퇴진 사회대개혁비상행동이 주최한 집회의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일명 프로 자봉러들이다. 인파관리와 질서유지를 비롯해 안전한 집회를 만들기 위해 애써온 그들의 소회를 들어보았다.
지원씨도 국회에서의 그 순간을 떠올렸다. 표결이 발표되기 직전이었다.그녀는 지하철역 화장실에 들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서로 모르는 시민들과 함께였는데 같이 계시던 중년부부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남편이 물었다.
“오늘도 이러다가 (탄핵소추안이) 통과가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그러자 아내가 답했다.
“에이 뭐 그런걸 걱정해. 그러면 될 때까지 하면 되지.”
지원씨는 그들의 대화에 가슴이 뭉클하고 힘이 되었다고 했다. 인생을 먼저 살아본 선배들의 말 때문이었을까. 의결을 위한 200표가 안되면 어쩌나 굉장히 떨렸고, 이미 한 번 실패를 맛봤던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의연하게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그 어머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될 때까지 싸울건데, 벌써부터 지치면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고 했다.
부채감, 그들을 행동하게 한 숨은 동력
“저는 12월 3일에 이제 처음에 계엄이 터졌을 때 그때 국회에 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부채감이 좀 세게 남아 있었거든요. 모두에게 당황스러웠던 밤이었잖아요. 그때 택시를 타면 국회로 달려갈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지금도 국회에 달려오셨던 분들 덕분이다 얘기를 많이 하시잖아요. 저도 그래요. 좀 죄책감도 있었고요. 그래서 12월 4일 이후부터 함께하게 되었던 거죠.”
지원씨는 담담하게 회상했다. 나라를 지키고 싶다는 거창한 이유보다 부채감을 덜고 싶은 마음에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원봉사단의 존재를 몰랐다. 그리고 나중에 자원봉사단에 대해 듣고서도 경험이 많은이가 해야할 것 같았다. 그런데 형광 조끼를 입고있는 것만으로도 시민분들에게 안전하다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덕에 그녀도 용기를 냈다. 이런 작은 연대의 말이 동기가 되었고, 타인에게도 참여해달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희윤씨도 집회가 열리니 가야 한다라는 당연함이 먼저였다. 탄핵안이 통과되던 날, 국회의사당 앞에서 사람들이 몰리는 상황을 직접 겪어보기도 했다. 인파속에 끼어보니, 안전관리를 위한 자원봉사자의 큰 역할을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그들에게 전해들은 자원봉사의 내용은 ‘사서고생’에 가까워보였다. 추운날씨에 사람들이 몰리는 야외에서 장시간동안 서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들의 시간을 내야했다. 집회장소까지 이동비용까지 들었다. 또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감정노동을 할 때도 있었다. 이따금 불평을 토로하는 시민들도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인파관리를 하다보면 안내에 따라주지 않는 유튜버들이나 정당의 보좌진, 언론사 관계자들도 나타났다. 묵묵히 버텨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겨울에 시작했던 집회는 기약없이 길어졌다. 봄꽃이 피어나도 기다리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지난 3월 8일에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으로 출소했다. 검찰은 이례적으로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 한달이나 지속되던 평일저녁 집회의 시작이었다. 자원봉사자들도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희윤씨도 그 순간을 기억했다. 그렇게 3월 말쯤 되니까 자원봉사자들도 신경이 곤두섰다고 했다. 이동해주세요, 여기서계시면 안되요. 시민들에게 건내는 말 한마디가 날카로워졌다. 그녀가 한계가 왔다고 체감했던 순간이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1일, 헌법재판소가 거짓말처럼 선고날짜를 잡았다.
연대의 확장 : 다양성과 정체성 그리고 희망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는 희윤씨는, 연대라는 말이 정빠지지 않는 단어임에도, 이번처럼 체감했던 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자원봉사를 하면서 연대가 무엇인지, 그 지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우리가 광장에서 외친 민주주의라는 게 사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체잖아요? 연대라는 건 그런 다양성을 살려가는 과정 아닐까요.”
지원씨의 연대에 대한 경험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로, 여성들 사이에서 연대라는 말은 익숙해진 단어였다. 수면위로 올라온 버닝썬 사건을 보며 그녀는 여성들이 숨지 말고, 참지 말고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자라는 느낌이 컸다고 했다. 그렇게 연대라는 감각 자체는 낯선게 아니었는데, 이번 집회를 통해 연대가 확장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8년 전에 박근혜 탄핵집회 때만해도 발언에 있어서도 조금 덜 조심했고 어린 학생들이 나오면은 기특하다라는 얘기가 많았어요. 집회에 나온 사람들이 소속감을 느끼며 연대하고 있다는 감각도 잘 없었고요. 그때는 좀 유통기한이 짧은 협동작업 느낌이 강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저희가 노동계나 농민들이 요청하시면 달려가서 같이 싸우고, 또 저희가 광장에서 부르면 또 다 같이 올라와서 서로의 사안에 대해서 자기가 몰랐던 부분도 알아가고 함께 힘을 보태는 꾸준한 연대가 되었잖아요?“
이 대목에서 지원씨는 최재천 교수의 책 한구절을 인용했다.
”저는 이번에 가장 컸던 차이가 정체성에 관한 부분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접촉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저희가 알고 있는 것만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었어요. 모르니까 이걸 편견을 갖게 되고 제가 갖고 있던 지식 안에서만 그거를 판단하게 되는데요. 이번 광장에서는 8년전 박근혜때와는 달리 뒷전에 밀려있던 분들이 목소리를 내시면서 자신의 말과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같이 얘기를 하셨잖아요.“
지원씨에게도 몰랐던 다른 세계나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힘들었던 과정들을 알게되는 과정이었다. 그덕에 눈으로 그들을 확인하고, 또 입을 통해 듣고 하면서 일종의 라포가 좀 형성되었다고 표현했다. 거리감이 줄어들면서 그 문제를 내 문제의 범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대가 넓어졌다.
그녀는 덧붙였다. 어떻게 보면 시민들이 무관심했던 게 아니라 이를 표출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어떻게 보면 윤석열 파면을 기회로 우리의 사회문제를 담아낼 광장이 열린 게 아닐까. 그녀는 담담히 희망을 말했다.
서로가 서로를 더 궁금해하는 사회로
쉽지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즐거움과 재충전의 경험을 말했다. 다소 의외였지만 이어지는 답변을 통해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가 자신의 일에 공감해줄 때 행복 느끼는 것 같아요. 광장은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는 분위기였고 에너지를 받는 기분이 들었어요. 의외로 자존감도 키워주고 정서적으로 많은 위안이 되었어요.”
“사회생활의 일환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면 정말 힘들었을것 같아요. 사회적인 가면에 신경 안쓰고, 다양한 집회굿즈로 치장하고 서로 공유하는 경험도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에 쓰레기를 치우고 뒷정리할때 미화공무원 선생님들이 수거하시거든요. 그때 감사합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니까 활짝 웃으시며 화이팅 하시고 가시더라고요. 작지만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도 했어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서로를 더 궁금해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언제든 기꺼이 달려갈 수 있게끔요. 어쨌든 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잖아요.”
다섯달의 걸친 지난 날들은 평범함 일상을 되찾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도, 대통령이 바뀌어도 광장에 울려 퍼질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는 남을 것이다. 결코 그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그녀들의 뭉클한 다짐을 들으며, 이들이 앞으로 만들어갈 연대의 빛을 상상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