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없는 곳, 그곳에 평화가 있다.
“평화는 전후 일본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이런 내용을 한 책에서 읽었을 때 아직 청소년이었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게 일본은 평화와 정 반대에 있는 나라였다. 억압적인 식민 통치와 아직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일본을 설명, 상징하는 키워드가 ‘평화’라니. 도대체 일본에 평화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 때문에 나는 <한일청년평화인권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일본 사람들에게 어떤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일까? 일본 사람들이 겪은 전쟁의 폭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전쟁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유일한 지상전이었던 오키나와에서의 지상전?
평화 기행으로 오키나와를 갔을 때였다. 친구와 길을 걷던 와중에 지쳐서 앉아 있는데, 한 류큐인(오키나와 선주민) 택시기사분이 우리를 다음 목적지인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까지 돈도 받지 않고 태워주셨다. 기사님은 내친김에 평화기념공원을 안내를 해주셨다. 유일한 지상전에서는 본토인보다 류큐인이 압도적으로 많이 희생되었으며, 그다음으로는 조선인, 훗카이도인 등 주변부 사람들이 주로 희생되었다고 강조하셨다. 주변부에게 강요된 희생은 일본 본토인이 공유하는 전쟁의 기억이라기보단 오히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다. 그래서 치비치리가마(チビチリガマ)처럼 일본군의 강요로 희생된 사람들의 공간은 국가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사진1] 오키나와전에서 희생된 한국인들 이름이 적혀진 비석
그렇다면 어떤 기억일까? 도쿄 대공습? 도쿄 대공습은 일본의 여러 매체를 통해서 주요한 전쟁의 기억으로 호명되고 있지만 이것도 가장 중요한 기억은 아니다. 본토인에게 훨씬 더 충격적인 기억, 그래서 전쟁의 상징이 된 기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차례의 원폭이었다.
한일청년평화인권기행 1기 때 한 일본 친구로부터 히로시마 출신 할아버지 원폭 당시 경험을 간접적으로 들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핵폭발, 방사능, 피폭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 하늘이 번쩍하더니 모든 것이 불타기 시작했다. 7만 명이 즉사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불에 타들어 가는 몸을 이끌고 강으로 뛰어 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대참상은 전쟁을 상징하는 기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폭이 우리로부터 떨어진, ‘남의 일’인 것도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군수공장이 많았고, 거기서 일하는 강제로 징용된 조선인들도 많았다. 실제로 원폭 희생자의 10분의 1은 조선인이었다. 한편, 참상의 충격은 일본을 넘어서 세계로 뻗어나갔다. 반핵운동이 탄생했다. 1950년에 핵무기 불법화 등을 담은 스톡홀름 호소문(Stockholm Appeal)이 ‘평화 지지자 세계대회(World Congress of Partisans of Peace)’에서 채택되었고, 2억 70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 반핵에 대한 세계적인 열망은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핵폭격을 고심했던 미국이 결국 핵 사용을 포기하게 만드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반핵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남의 일’이 아니었다.
기행에서 일본 도쿄의 제 5 후쿠류마루(第五福竜丸) 전시관에 방문한 적이 있다. 제 5 후쿠류마루는 참치잡이 배 이름이다. 1954년 3월 1일, 후쿠류마루는 여느 때처럼 원양 조업을 위해 먼 바다로 나가 있었다. 일하던 승조원들은 문득 서쪽 하늘에서 무언가 번쩍하는 것을 보았고, 이내 하늘에서 흰 눈 같은 것들이 내렸다. 얼마 후 승조원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몸에 이상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한 승조원(구보야마 아이키치)은 얼마 후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승조원들은 하늘에서 내렸던 게 ‘죽음의 재’, 곧 방사성 낙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미국은 같은 날 마셜제도 비키니 환초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보다 1,000배나 강력한 수소폭발로 산호초 조각들이 방사성 낙진이 되어 비산하였고, 후쿠류마루에 타고 있던 승조원 23명이 전부 피폭당했다. 이 사건은 일본의 반핵 운동의 시작을 알린 ‘비키니 사건’이며 여전히 3월 1일을 ‘비키니 데이’로 기억하면서 반핵 정신을 기리고 있다.

[사진2] 제 5 후쿠류마루 전시관
앞서 언급했던 두 차례의 원폭과 비키니 사건을 중심으로 반핵운동은 일본의 ‘평화’의 핵심이 되었다. 제 5 후쿠류마루를 전시관은 도쿄도에서 운영하는 도립 전시관이다. 국가가 전시관을 운영한다는 점에서 일본에서는 반핵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정책적으로도 확인이 된다. 예를 들어서 1967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비핵 3원칙이다. 또한 작년에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일본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日本被團協·니혼 히단쿄)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총총..
작성자 : 에너지기후팀 활동가 오민석
핵 없는 곳, 그곳에 평화가 있다.
“평화는 전후 일본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이런 내용을 한 책에서 읽었을 때 아직 청소년이었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게 일본은 평화와 정 반대에 있는 나라였다. 억압적인 식민 통치와 아직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일본을 설명, 상징하는 키워드가 ‘평화’라니. 도대체 일본에 평화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 때문에 나는 <한일청년평화인권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일본 사람들에게 어떤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일까? 일본 사람들이 겪은 전쟁의 폭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전쟁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유일한 지상전이었던 오키나와에서의 지상전?
평화 기행으로 오키나와를 갔을 때였다. 친구와 길을 걷던 와중에 지쳐서 앉아 있는데, 한 류큐인(오키나와 선주민) 택시기사분이 우리를 다음 목적지인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까지 돈도 받지 않고 태워주셨다. 기사님은 내친김에 평화기념공원을 안내를 해주셨다. 유일한 지상전에서는 본토인보다 류큐인이 압도적으로 많이 희생되었으며, 그다음으로는 조선인, 훗카이도인 등 주변부 사람들이 주로 희생되었다고 강조하셨다. 주변부에게 강요된 희생은 일본 본토인이 공유하는 전쟁의 기억이라기보단 오히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다. 그래서 치비치리가마(チビチリガマ)처럼 일본군의 강요로 희생된 사람들의 공간은 국가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사진1] 오키나와전에서 희생된 한국인들 이름이 적혀진 비석
그렇다면 어떤 기억일까? 도쿄 대공습? 도쿄 대공습은 일본의 여러 매체를 통해서 주요한 전쟁의 기억으로 호명되고 있지만 이것도 가장 중요한 기억은 아니다. 본토인에게 훨씬 더 충격적인 기억, 그래서 전쟁의 상징이 된 기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차례의 원폭이었다.
한일청년평화인권기행 1기 때 한 일본 친구로부터 히로시마 출신 할아버지 원폭 당시 경험을 간접적으로 들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핵폭발, 방사능, 피폭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 하늘이 번쩍하더니 모든 것이 불타기 시작했다. 7만 명이 즉사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불에 타들어 가는 몸을 이끌고 강으로 뛰어 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대참상은 전쟁을 상징하는 기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폭이 우리로부터 떨어진, ‘남의 일’인 것도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군수공장이 많았고, 거기서 일하는 강제로 징용된 조선인들도 많았다. 실제로 원폭 희생자의 10분의 1은 조선인이었다. 한편, 참상의 충격은 일본을 넘어서 세계로 뻗어나갔다. 반핵운동이 탄생했다. 1950년에 핵무기 불법화 등을 담은 스톡홀름 호소문(Stockholm Appeal)이 ‘평화 지지자 세계대회(World Congress of Partisans of Peace)’에서 채택되었고, 2억 70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 반핵에 대한 세계적인 열망은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핵폭격을 고심했던 미국이 결국 핵 사용을 포기하게 만드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반핵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남의 일’이 아니었다.
기행에서 일본 도쿄의 제 5 후쿠류마루(第五福竜丸) 전시관에 방문한 적이 있다. 제 5 후쿠류마루는 참치잡이 배 이름이다. 1954년 3월 1일, 후쿠류마루는 여느 때처럼 원양 조업을 위해 먼 바다로 나가 있었다. 일하던 승조원들은 문득 서쪽 하늘에서 무언가 번쩍하는 것을 보았고, 이내 하늘에서 흰 눈 같은 것들이 내렸다. 얼마 후 승조원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몸에 이상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한 승조원(구보야마 아이키치)은 얼마 후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승조원들은 하늘에서 내렸던 게 ‘죽음의 재’, 곧 방사성 낙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미국은 같은 날 마셜제도 비키니 환초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보다 1,000배나 강력한 수소폭발로 산호초 조각들이 방사성 낙진이 되어 비산하였고, 후쿠류마루에 타고 있던 승조원 23명이 전부 피폭당했다. 이 사건은 일본의 반핵 운동의 시작을 알린 ‘비키니 사건’이며 여전히 3월 1일을 ‘비키니 데이’로 기억하면서 반핵 정신을 기리고 있다.
[사진2] 제 5 후쿠류마루 전시관
앞서 언급했던 두 차례의 원폭과 비키니 사건을 중심으로 반핵운동은 일본의 ‘평화’의 핵심이 되었다. 제 5 후쿠류마루를 전시관은 도쿄도에서 운영하는 도립 전시관이다. 국가가 전시관을 운영한다는 점에서 일본에서는 반핵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정책적으로도 확인이 된다. 예를 들어서 1967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비핵 3원칙이다. 또한 작년에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일본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日本被團協·니혼 히단쿄)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총총..
작성자 : 에너지기후팀 활동가 오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