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핵발전소 저지 전국 탈핵 순례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핵발전소 추가 말라!> 6화
영광 순례 일곱째
영광에서 정읍까지 닷새 92.6km, 길에서 만난 위험과 뜻밖의 친절
9월 3일 영광 월야면사무소를 출발한 순례단은 광주와 장성, 백양사역을 지나 7일 정읍시청에 닿았다. 닷새 동안 걸은 거리는 92.6km였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이 길은 전기가 흐르는 방향과 거의 겹친다. 한빛핵발전소에서 만든 전기가 광주를 지나 북쪽으로 향하는 길을, 우리는 사람의 걸음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시속 4km로 걸으면 지도 위의 선에 불과했던 송전선로가 마을과 논밭을 가로지르는 길이 된다. 그 아래 사는 사람도 한 명씩 이름을 갖는다.
40년을 보냈더니, 이제 폐기물까지

고준위핵폐기물 부지내 건식저장 시설 반대 기자회견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40년의 설계수명을 채운 한빛 1호기는 지난해 말 멈췄고, 2호기도 이달 운전을 중단한다. 지난해 12월 우리는 1호기 정문 앞에서 설계수명이 끝나면 멈춘다는 약속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국수력원자력은 두 원자로의 수명을 각각 10년 늘리는 운영변경허가를 신청했다.
한빛 4호기 격납건물에서 140여 개의 공극이 발견돼 5년 넘게 멈췄을 때도 돌아온 말은 "안전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수명연장은 그 말을 다시 믿으라는 요구다.
이제 핵폐기물까지 눌러앉으려 한다. 한빛의 사용후핵연료 저장률은 85.3%이고 2030년이면 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수원은 지난 4월 부지 안 건식저장시설 인허가를 신청했다. '임시'라지만 설계수명은 최소 50년이다. 중간저장과 최종처분 목표는 법적 의무가 아닌 '노력'에 불과하다. 먼저 짓고 나중에 옮기겠다는 계획에서 옮기는 날짜만 언제나 미래에 있다.
의견을 묻는 범위도 위험의 범위보다 좁다.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은 반경 30km인데 설명회와 토론회는 5km 안의 영광과 고창에서만 열렸다. 토론회장에서는 반대 문구가 적힌 조끼를 입었다는 이유로 주민과 순례자들의 입장까지 제지됐다. 위험이 미치는 곳과 의견을 묻는 곳이 다르고 반대를 드러내는 일조차 막힌 자리도 결국 '공론화'의 실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주민을 결정의 주체가 아니라 설득의 대상으로만 취급해온 방식이다.
물 한 병을 건네는 사람들
길 위에는 뜻밖의 친절도 있었다. 광주와 전남의 교통경찰들은 순례단의 행렬을 살피며 차량을 통제해 주었다. 뙤약볕 아래 걷는 사람들에게 물과 모자를 챙겨주고 사진을 찍어주었으며, 무거운 가방까지 대신 들어주었다.

순례단의 안전을 위해 파견된 경찰이 물과 모자를 건냈다.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무더운 날 오래 걸어본 사람은 안다. 물 한 병과 모자 하나가 얼마나 고마운지. 순례는 각자의 두 발로 걷는 것 같지만, 실은 이런 손길들이 이어 붙인 길이다.
갈재 정상에서는 국립공원공단 직원들을 만났다. 그들은 순례단을 보자 핵발전소를 줄이면 전기가 부족해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왜 걷고 있는지,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환과 함께 전력을 만들고 쓰는 체계까지 바꿔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거창한 토론은 아니었다.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굳었던 표정이 풀리고 반가운 인사가 오갔다. 생각이 같지 않아도 묻고 들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그날의 걸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 예순다섯이여"
입암면을 앞두고 마을회관 앞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다. 그는 송전탑부터 핵발전소, 햇빛소득마을과 영농형 태양광까지 에너지 문제를 훤히 꿰고 있었다. 마을을 가로지를 송전탑 건설에는 이미 합의가 이뤄졌다고 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 예순다섯이여."
이제 와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푸념이었다. 그 말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마을의 고령화는 인구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지역이 스스로 결정할 힘을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송전선로는 마을을 지나가지만, 그 노선을 정하는 자리에 마을은 없었다.
어르신은 영농형 태양광을 두고도 물었다. 수도권으로 보낼 전기를 만들기 위해 농촌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한다면 왜 농촌이 또 부담을 져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입암저수지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는 문제를 두고도 마을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걱정은 결국 돈으로 모였다.
"내가 일찍 죽으면 혜택도 못 받는디, 누가 하겠어?"
그 한마디에 농촌에서 살아가는 노인의 현실이 담겨 있었다. 재생에너지가 아무리 필요한 에너지라도 주민이 감당해야 할 비용이 있고, 혜택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나뉜다면 갈등은 생길 수밖에 없다.
발전원의 종류만 바꾸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어디에 시설을 세울 것인지, 누가 비용을 내고 이익을 가져갈 것인지, 주민의 동의와 결정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까지 바뀌어야 한다. 지역에서 만든 전기를 지역에서 쓰는 분산형 체계가 필요한 이유다. 주민이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에너지 전환마저 또 하나의 개발사업이 될 수 있다.
동학의 땅에서 다시 들은 말
7일 순례단이 도착한 정읍은 얼마 전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농민과 시민의 행진이 지나간 곳이다. 그때 정읍의 농민 대표는 주민 동의 없이 추진되는 송전탑 공사를 '수탈'이라고 불렀다. 제대로 된 평가도 민주적 절차도 없이 지역의 땅과 삶을 가져가는 방식에 반대한다고 했다.
동학의 땅에서 수탈과 착취, 식민지라는 말을 다시 듣던 날, 나는 무슨 말을 보태야 할지 몰랐다. 130여 년 전 이곳의 농민들은 권력과 지주가 곡식과 땅을 빼앗고 그 대가와 책임까지 농민에게 떠넘기는 세상에 맞서 일어섰다. 자신이 일군 것을 내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는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2026년 정읍의 송전선로 앞에서 그때의 말이 다시 등장했다. 전기를 더 많이 쓰는 기업과 대도시를 위해 논과 밭 위로 송전탑이 들어서지만, 노선을 정하는 과정에서 주민의 목소리는 뒤로 밀린다. 땅과 경관, 공동체를 내놓는 쪽과 그 전기로 불을 켜는 쪽은 여전히 다른 곳에 있다.
곡식과 토지를 가져가던 수단이 발전소와 송전선로라는 기술로 달라졌을 뿐이다. 필요한 것을 가져가는 사람과 그 비용을 떠안는 사람, 결정하는 사람과 결정당하는 사람의 자리는 그대로다.
호남에는 이미 전국 재생에너지 설비의 60% 가까이가 몰려 있다. 계통이 모자라 발전을 멈추는 일이 되풀이되는데도, 지난 7월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영광 한빛에 원자로 2기를 더 지을 부지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산업의 필요는 왜 늘 같은 지역의 몸으로 지불되는가. 더 지을 자리가 있다는 말이 곧 더 지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자리 옆에는 사람이 산다.
9개월, 그리고 이틀
영광에서 그날의 순례를 마쳤을 때는 당장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그러나 함께 걷던 하태성 동해삼척기후위기비상행동 공동대표가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분향소에 가자고 했다.

유가족들은 피해자 유해수습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무안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부끄럽게도 나는 참사가 일어난 지 9개월이 되도록 희생자들의 유해 수습조차 끝나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인적이 끊긴 공항에는 피해자와 유가족만 남아 있었다.
내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을 뿐, 조금만 돌아봤다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알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시민만 탓할 수도 없다. 무관심은 개인의 태도이기 전에 오랜 학습의 결과다. 권력이 지우려는 일은 너무 쉽게 잊힌다. 그 지우기는 반대 목소리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반대할 자격이 있다는 감각까지 지운다.

무안공항에는 제주항공 분향소 앞에 참사 피해자 유류품이 놓여 있다.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우리가 영광에서 정읍으로 걷는 사이, 동남권에서는 새울 3호기가 다시 멈췄다. 8월 11일 운전원이 설정값을 잘못 입력해 자동정지한 뒤 9월 4일 재가동을 승인받았지만, 이틀 뒤인 6일 증기 누설이 확인돼 원자로를 수동 정지했다.
원안위는 방사선 관련 특이사항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방사선 영향이 없었다는 말이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시운전은 상업운전 전에 문제를 찾기 위해 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인적 오류와 설비 누설이 잇따랐다면 통과의례가 아니라 신호로 읽어야 한다.
어떤 위험은 9개월 동안 방치됐고, 어떤 신호는 이틀 만에 되풀이됐다. 시간의 길이는 달랐지만 책임이 뒤로 밀리는 방식은 같았다. 더 싼 비용과 더 빠른 일정, 경제와 발전이라는 숫자가 사람의 안전보다 앞자리에 놓였다.
지워진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낮고 목소리가 작은 곳으로 밀려나 기다릴 뿐이다.
각자의 깃발로
고리에서 출발한 성원기씨는 이 순례를 제안하며 말했다. 출발점은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 핵발전소가 추가되는 것을 막는 일이지만, 지금 이 사회에는 탈핵 말고도 문제가 너무 많다고 했다. 강의 녹조,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 경시되는 농업과 어업, 기후위기 앞에서도 달라지지 않는 정부. 이것들이 얽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각자의 깃발과 피켓을 들고 함께 걸어달라고 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 걷는 일이 힘들어도 배롱나무 꽃그늘이 힘을 주기도 한다.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닷새를 걸으며 그 말의 뜻을 조금 알 것 같았다. 40년 동안 전기를 보내고 이제 폐기물까지 떠안게 된 영광, 130년 전의 말을 다시 꺼내야 했던 정읍, 9개월째 사람을 온전히 찾지 못한 무안, 이틀 만에 다시 멈춘 새울.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예순다섯이라던 어르신.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였지만 걸어서 이어보니 하나의 물음이었다. 에너지는 누구를 위해 만드는가. 그 위험과 비용은 누가 지는가. 그리고 그것을 누가 결정하는가.
9월 16일, 네 갈래의 길은 청와대 앞에서 하나가 된다. 우리는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 핵발전소를 추가하지 말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단순하고 오래된 말을 할 것이다.
안전하게 살고 싶다고.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잊지 말라고. 그 마음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글쓴이: 최경숙 환경운동연합 정책변화팀 활동가
신규 핵발전소 저지 전국 탈핵 순례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핵발전소 추가 말라!> 6화
영광 순례 일곱째
영광에서 정읍까지 닷새 92.6km, 길에서 만난 위험과 뜻밖의 친절
9월 3일 영광 월야면사무소를 출발한 순례단은 광주와 장성, 백양사역을 지나 7일 정읍시청에 닿았다. 닷새 동안 걸은 거리는 92.6km였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이 길은 전기가 흐르는 방향과 거의 겹친다. 한빛핵발전소에서 만든 전기가 광주를 지나 북쪽으로 향하는 길을, 우리는 사람의 걸음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시속 4km로 걸으면 지도 위의 선에 불과했던 송전선로가 마을과 논밭을 가로지르는 길이 된다. 그 아래 사는 사람도 한 명씩 이름을 갖는다.
40년을 보냈더니, 이제 폐기물까지
고준위핵폐기물 부지내 건식저장 시설 반대 기자회견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40년의 설계수명을 채운 한빛 1호기는 지난해 말 멈췄고, 2호기도 이달 운전을 중단한다. 지난해 12월 우리는 1호기 정문 앞에서 설계수명이 끝나면 멈춘다는 약속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국수력원자력은 두 원자로의 수명을 각각 10년 늘리는 운영변경허가를 신청했다.
한빛 4호기 격납건물에서 140여 개의 공극이 발견돼 5년 넘게 멈췄을 때도 돌아온 말은 "안전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수명연장은 그 말을 다시 믿으라는 요구다.
이제 핵폐기물까지 눌러앉으려 한다. 한빛의 사용후핵연료 저장률은 85.3%이고 2030년이면 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수원은 지난 4월 부지 안 건식저장시설 인허가를 신청했다. '임시'라지만 설계수명은 최소 50년이다. 중간저장과 최종처분 목표는 법적 의무가 아닌 '노력'에 불과하다. 먼저 짓고 나중에 옮기겠다는 계획에서 옮기는 날짜만 언제나 미래에 있다.
의견을 묻는 범위도 위험의 범위보다 좁다.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은 반경 30km인데 설명회와 토론회는 5km 안의 영광과 고창에서만 열렸다. 토론회장에서는 반대 문구가 적힌 조끼를 입었다는 이유로 주민과 순례자들의 입장까지 제지됐다. 위험이 미치는 곳과 의견을 묻는 곳이 다르고 반대를 드러내는 일조차 막힌 자리도 결국 '공론화'의 실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주민을 결정의 주체가 아니라 설득의 대상으로만 취급해온 방식이다.
물 한 병을 건네는 사람들
길 위에는 뜻밖의 친절도 있었다. 광주와 전남의 교통경찰들은 순례단의 행렬을 살피며 차량을 통제해 주었다. 뙤약볕 아래 걷는 사람들에게 물과 모자를 챙겨주고 사진을 찍어주었으며, 무거운 가방까지 대신 들어주었다.
순례단의 안전을 위해 파견된 경찰이 물과 모자를 건냈다.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무더운 날 오래 걸어본 사람은 안다. 물 한 병과 모자 하나가 얼마나 고마운지. 순례는 각자의 두 발로 걷는 것 같지만, 실은 이런 손길들이 이어 붙인 길이다.
갈재 정상에서는 국립공원공단 직원들을 만났다. 그들은 순례단을 보자 핵발전소를 줄이면 전기가 부족해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왜 걷고 있는지,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환과 함께 전력을 만들고 쓰는 체계까지 바꿔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거창한 토론은 아니었다.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굳었던 표정이 풀리고 반가운 인사가 오갔다. 생각이 같지 않아도 묻고 들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그날의 걸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 예순다섯이여"
입암면을 앞두고 마을회관 앞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다. 그는 송전탑부터 핵발전소, 햇빛소득마을과 영농형 태양광까지 에너지 문제를 훤히 꿰고 있었다. 마을을 가로지를 송전탑 건설에는 이미 합의가 이뤄졌다고 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 예순다섯이여."
이제 와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푸념이었다. 그 말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마을의 고령화는 인구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지역이 스스로 결정할 힘을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송전선로는 마을을 지나가지만, 그 노선을 정하는 자리에 마을은 없었다.
어르신은 영농형 태양광을 두고도 물었다. 수도권으로 보낼 전기를 만들기 위해 농촌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한다면 왜 농촌이 또 부담을 져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입암저수지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는 문제를 두고도 마을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걱정은 결국 돈으로 모였다.
"내가 일찍 죽으면 혜택도 못 받는디, 누가 하겠어?"
그 한마디에 농촌에서 살아가는 노인의 현실이 담겨 있었다. 재생에너지가 아무리 필요한 에너지라도 주민이 감당해야 할 비용이 있고, 혜택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나뉜다면 갈등은 생길 수밖에 없다.
발전원의 종류만 바꾸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어디에 시설을 세울 것인지, 누가 비용을 내고 이익을 가져갈 것인지, 주민의 동의와 결정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까지 바뀌어야 한다. 지역에서 만든 전기를 지역에서 쓰는 분산형 체계가 필요한 이유다. 주민이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에너지 전환마저 또 하나의 개발사업이 될 수 있다.
동학의 땅에서 다시 들은 말
7일 순례단이 도착한 정읍은 얼마 전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농민과 시민의 행진이 지나간 곳이다. 그때 정읍의 농민 대표는 주민 동의 없이 추진되는 송전탑 공사를 '수탈'이라고 불렀다. 제대로 된 평가도 민주적 절차도 없이 지역의 땅과 삶을 가져가는 방식에 반대한다고 했다.
동학의 땅에서 수탈과 착취, 식민지라는 말을 다시 듣던 날, 나는 무슨 말을 보태야 할지 몰랐다. 130여 년 전 이곳의 농민들은 권력과 지주가 곡식과 땅을 빼앗고 그 대가와 책임까지 농민에게 떠넘기는 세상에 맞서 일어섰다. 자신이 일군 것을 내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는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2026년 정읍의 송전선로 앞에서 그때의 말이 다시 등장했다. 전기를 더 많이 쓰는 기업과 대도시를 위해 논과 밭 위로 송전탑이 들어서지만, 노선을 정하는 과정에서 주민의 목소리는 뒤로 밀린다. 땅과 경관, 공동체를 내놓는 쪽과 그 전기로 불을 켜는 쪽은 여전히 다른 곳에 있다.
곡식과 토지를 가져가던 수단이 발전소와 송전선로라는 기술로 달라졌을 뿐이다. 필요한 것을 가져가는 사람과 그 비용을 떠안는 사람, 결정하는 사람과 결정당하는 사람의 자리는 그대로다.
호남에는 이미 전국 재생에너지 설비의 60% 가까이가 몰려 있다. 계통이 모자라 발전을 멈추는 일이 되풀이되는데도, 지난 7월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영광 한빛에 원자로 2기를 더 지을 부지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산업의 필요는 왜 늘 같은 지역의 몸으로 지불되는가. 더 지을 자리가 있다는 말이 곧 더 지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자리 옆에는 사람이 산다.
9개월, 그리고 이틀
영광에서 그날의 순례를 마쳤을 때는 당장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그러나 함께 걷던 하태성 동해삼척기후위기비상행동 공동대표가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분향소에 가자고 했다.
유가족들은 피해자 유해수습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무안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부끄럽게도 나는 참사가 일어난 지 9개월이 되도록 희생자들의 유해 수습조차 끝나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인적이 끊긴 공항에는 피해자와 유가족만 남아 있었다.
내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을 뿐, 조금만 돌아봤다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알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시민만 탓할 수도 없다. 무관심은 개인의 태도이기 전에 오랜 학습의 결과다. 권력이 지우려는 일은 너무 쉽게 잊힌다. 그 지우기는 반대 목소리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반대할 자격이 있다는 감각까지 지운다.
무안공항에는 제주항공 분향소 앞에 참사 피해자 유류품이 놓여 있다.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우리가 영광에서 정읍으로 걷는 사이, 동남권에서는 새울 3호기가 다시 멈췄다. 8월 11일 운전원이 설정값을 잘못 입력해 자동정지한 뒤 9월 4일 재가동을 승인받았지만, 이틀 뒤인 6일 증기 누설이 확인돼 원자로를 수동 정지했다.
원안위는 방사선 관련 특이사항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방사선 영향이 없었다는 말이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시운전은 상업운전 전에 문제를 찾기 위해 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인적 오류와 설비 누설이 잇따랐다면 통과의례가 아니라 신호로 읽어야 한다.
어떤 위험은 9개월 동안 방치됐고, 어떤 신호는 이틀 만에 되풀이됐다. 시간의 길이는 달랐지만 책임이 뒤로 밀리는 방식은 같았다. 더 싼 비용과 더 빠른 일정, 경제와 발전이라는 숫자가 사람의 안전보다 앞자리에 놓였다.
지워진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낮고 목소리가 작은 곳으로 밀려나 기다릴 뿐이다.
각자의 깃발로
고리에서 출발한 성원기씨는 이 순례를 제안하며 말했다. 출발점은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 핵발전소가 추가되는 것을 막는 일이지만, 지금 이 사회에는 탈핵 말고도 문제가 너무 많다고 했다. 강의 녹조,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 경시되는 농업과 어업, 기후위기 앞에서도 달라지지 않는 정부. 이것들이 얽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각자의 깃발과 피켓을 들고 함께 걸어달라고 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 걷는 일이 힘들어도 배롱나무 꽃그늘이 힘을 주기도 한다.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닷새를 걸으며 그 말의 뜻을 조금 알 것 같았다. 40년 동안 전기를 보내고 이제 폐기물까지 떠안게 된 영광, 130년 전의 말을 다시 꺼내야 했던 정읍, 9개월째 사람을 온전히 찾지 못한 무안, 이틀 만에 다시 멈춘 새울.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예순다섯이라던 어르신.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였지만 걸어서 이어보니 하나의 물음이었다. 에너지는 누구를 위해 만드는가. 그 위험과 비용은 누가 지는가. 그리고 그것을 누가 결정하는가.
9월 16일, 네 갈래의 길은 청와대 앞에서 하나가 된다. 우리는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 핵발전소를 추가하지 말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단순하고 오래된 말을 할 것이다.
안전하게 살고 싶다고.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잊지 말라고. 그 마음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글쓴이: 최경숙 환경운동연합 정책변화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