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핵발전소 저지 전국 탈핵 순례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핵발전소 추가 말라!> 4화
고리 순례 나흘
고리 순례단 나흘 72.2km, 해체와 수명연장과 신규가 한자리에 쌓인 땅
고리 순례단은 9월 1일 고리핵발전소 앞을 떠나 나흘 동안 72.2km를 걸어 경주역에 닿았다. 그 경주역은 열차가 서지 않는 폐역이다. 나흘을 걸어 닿은 곳이 기차가 끊긴 역이었다. 사람이 오가던 길은 끊기고, 전기를 실어 나르는 길만 굵어진다.
나는 영광을 걷고 있어 이 길에는 서지 못했다. 저녁마다 건네받은 기록과 목소리로 이번 회차를 쓴다.
나흘의 경로는 한국 에너지 체제의 축소판이다. 발전소 울타리를 등지고 출발해 반나절이면 보건지소가 있는 면 소재지에 닿고, 하루를 더 걸으면 시청이 있는 도심 한복판이다. 위험을 이고 사는 마을과 그 전기를 쓰는 도시 사이가 걸어서 하루 남짓이다. 그 거리를 견디는 쪽과 누리는 쪽은 이렇게 가깝다.

9월 1일 고리핵발전소에서 출정식을 하는 순례단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출발점이 이미 질문이었다
고리·새울 부지 반경 30km 안에는 수백만 명이 산다. 이만한 인구 위에 이만한 규모로 원자로가 모여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순례단이 등지고 출발한 울타리 안의 사정은 이렇다. 지난해 해체 승인을 받은 1호기, 설계수명을 넘기고 다시 전력을 생산하는 2호기, 수명이 다해 멈춰 선 채 계속운전 심사를 기다리는 3·4호기, 상업운전을 앞두고 시험운전 중인 새울 3·4호기. 여기에 2027년 준공을 목표로 짓고 있는 연구용 원자로가 있고, 소형모듈원자로(SMR)까지 건설 후보 부지로 정해졌다. 생애주기가 제각각인 원자로가 한자리에 쌓여 있다.
울산환경운동연합 이현숙 대표에게 걷는 이유를 묻자 그가 먼저 꺼낸 것은 새울 3호기 이야기였다.
"올해 하반기 상업운전을 앞두고 지난달에 시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동 정지가 됐다고, 기자분들이 말씀해 주셔서 우리가 알게 됐거든요. 너무너무 깜짝 놀랐고 정말 무서웠습니다."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새울 3호기는 "원자로 출력 80%에서 송전을 차단하는 시운전 시험을 마친 뒤 원자로 출력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운전원이 터빈제어밸브 위치제한기의 설정값을 잘못 입력"해 자동정지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사건조사를 마치고 재가동을 승인한 것은 순례 나흘째인 9월 4일이다.
원자로가 멈춘 날부터 원인이 공개된 날(9월 4일)까지 24일. 그동안 발전소 곁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지냈다. 설명이 늦게 도착하는 곳에서 안전은 함께 확인하는 사실이 아니라 뒤늦게 받아 드는 통보가 된다.

길을 나서기 전 탈핵 메세지가 담긴 몸자보를 달고 있는 순례단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문을 닫는 순간부터가 진짜 청구서다
1978년 이 땅에서 첫 상업운전을 시작한 고리 1호기는 2017년 영구정지됐고, 지난해 6월 원안위의 해체 승인을 받았다. 국내 상업용 원전으로는 첫 해체다. 총 해체비용 1조 713억 원, 완료 목표는 12년 뒤인 2037년이다.
이 금액에서 눈여겨볼 것은 무엇이 빠져 있는가다. 1조 713억 원은 사용후핵연료를 최종 처분하는 비용을 뺀 액수다. 해체 과정에서 나올 방사성폐기물만 17만t이 넘는다. 발전을 멈춘다고 비용도 위험도 끝나지 않는다. 핵발전소는 문을 닫는 순간부터가 진짜 청구서다.
그런데 그 청구서를 받아 둘 곳이 없다. 사용후핵연료를 영구 처분할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은 반세기가 가깝도록 없었다. 대신 부지 안에 쌓는다. 올해 3월 기준 고리의 저장률은 93.4%로 네 곳 원전 부지 가운데 가장 높고, 2032년이면 포화한다. 한수원은 올해 12월 고리 부지 안 건식저장시설 인허가를 신청할 예정이다.
포화가 눈앞이라는 것은 저장시설을 지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이 시스템이 완결될 수 없다는 증거다. '임시'라는 이름을 단 시설이 한번 들어오면 언제 나가는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정부는 새로 짓는 이야기를 60년 뒤까지 하면서, 그것을 끝내 치울 사람이 우리 다음 세대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한쪽에서 해체가 시작되는 동안, 바로 옆에서는 수명이 끝난 원자로가 다시 돌아간다. 고리 2호기는 2025년 11월 2033년까지의 계속운전 허가를 받아 올해 4월부터 다시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고리 3호기는 2024년 9월, 4호기는 2025년 8월 각각 운영허가 기간 40년을 채우고 멈춰 섰다. 원안위는 지난 8월 4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두 기의 계속운전 허가안을 하반기 전체회의에 상정하겠다고 밝혔다.
원안위는 노후 원전을 신규 원전과 동등한 수준으로 심사하겠다고 했다. 그 말대로 되기를 바란다. 다만 순서가 마음에 걸린다. 심사 결과가 아니라 심사 일정이 먼저 업무보고의 항목이 된다. 규제기관이 정책 일정표 위에서 자기 계획을 설명하는 구조에서는, 40년 돌린 기계를 10년 더 돌리는 판단이 안전의 시계가 아니라 진흥의 시계에 맞춰지기 쉽다.

고리핵발전소가 있는 기장을 출발해 경주를 향해 걷고 있는 순례단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기장을 '아톰타운'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수명이 끝난 원자로를 다시 돌리는 것만이 아니다. 정부는 같은 자리에 새 원자로를 더 얹으려 한다.
지난 6월 17일 한수원 부지선정평가위원회는 국내 첫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의 건설 후보부지로 기장군을, 신규 대형 핵발전소 2기의 부지로는 영덕군을 확정했다. 기장은 87.11점으로 경주(84.56점)를 앞섰다. 고리원자력본부 안의 약 22만㎡가 이주나 매입 없이 즉시 착공할 수 있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미 원전이 있으니 새 원전을 짓기 좋다는 논리다. 위험이 쌓인 곳일수록 다음 시설을 받기 쉬워진다.
기장을 두고 '아톰타운'이라는 말이 나온다. 동남권원자력의학원과 중입자치료센터, 연구용 원자로와 동위원소 활용시설, 파워반도체 기업이 들어선 산업단지, 그리고 바로 옆의 고리핵발전소까지 한자리에 모였다는 뜻이다. 이 목록에 빠진 것이 하나 있다. 사고가 났을 때 반경 30km 안의 수백만 명이 어디로, 어떻게 피하는가.
정부는 SMR을 미래형 원전이라 홍보한다. 그러나 기장에 들어설 i-SMR은 170MW급 모듈 넷을 묶은 680MW 규모다. 587MW인 고리 1호기보다도, 640MW인 고리 2호기보다도 크다. '작다'는 말은 모듈 하나를 놓고 하는 말이고, 한 부지에서 넷이 동시에 돌아간다는 뜻은 그 말에 들어 있지 않다.
더구나 i-SMR은 아직 설계를 심사받는 중이다. 사업단은 올해 2월 표준설계인가를 신청했고 인가 목표는 2028년이다. 안전성 판단이 끝나기 전에 부지가 정해졌고,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을 어디까지 줄일 것인지가 벌써 논의된다. 비상계획구역은 사고가 났을 때 주민을 대피시키는 범위다. 그 범위를 설계가 확정되기도 전에 좁히자는 것이다. 근거가 서기 전에 자리부터 잡는 것을 우리는 실험이라고 부른다. 여기 주민들은 실험 대상이 아니다.
산업단지 쪽으로 언덕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원자로가 있다. 2027년 준공을 목표로 공사 중인 열출력 15MW급 수출용 신형연구로다. 의료·산업용 방사성동위원소를 대량 생산해 수출까지 하겠다는 시설로, 지금 운영허가 심사가 진행되고 있다.
작으면 안전한지는 이미 여러 사고가 답하고 있다. 대전 하나로 연구로에서는 2004년 봄 냉각·정화계통에서 중수 누출이 일주일간 이어졌다. 규제 당국에 보고된 것은 한 달 뒤였고, 지역 주민이 안 것은 다시 두 달이 지나서였다. 2011년에는 수조에 잠겨 있던 반도체 생산용 알루미늄 통이 위치를 벗어나 고방사선 신호가 발생해 원자로가 자동정지했고, 방사선 백색비상이 발령됐다. 연구용 원자로의 사고는 노심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동위원소를 만들고, 거르고, 저장하고, 정비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더 큰 문제는 이 시설들이 저마다 다른 절차로 심사된다는 데 있다. 가동 원전과 해체 원전, 저장시설, 연구용 원자로, SMR이 각각 다른 기준과 허가로 안전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지진도 침수도 대규모 정전도 허가 단위로 나뉘어 오지 않는다. 한 지역에 밀집한 핵시설의 누적위험을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제도가 없다는 것, 그것이 지금 기장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아톰타운은 시설의 목록이지 사람의 목록이 아니다.

기장군에 건설 중인 수출용신형연구로 건설공사 조감도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차가 서지 않는 옛 경주역에서
이현숙 대표의 말에는 안심과 슬픔이 한 문장에 같이 들어 있었다.
"울산에 안 온 게 안심이 되면서도, 영덕에 가는 건 또 슬프고. 그러니까 왜 이런 걸 국가에서 만드냐고요. 지역마다 맨날 경쟁하게 하고, 지역마다 이런 아픔을 가지게 하는 거. 이게 지방 균형 발전, 일자리 창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정치 놀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을이 안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다른 마을이 그것을 받는 것. 국가가 지역에 시켜온 일이 바로 이 구조다. 부지 선정 과정에서 오간 보상금과 지원금은 오래 함께 살아온 마을을 찬반으로 갈라놓았고, 그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다.
그래도 달라진 것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울산에는 반대 의견이 20~30%대로 유지되고 있고, 기후위기를 이유로 핵발전을 늘리겠다는 말에 젊은 세대가 먼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서 시민참여단은 건설 재개에 59.5%가 찬성했다. 동시에 원자력발전 정책의 방향으로는 53.2%가 축소를 택했고 확대는 9.7%였다. 공론화위원회의 권고도 건설은 재개하되 장기적으로 원전 비중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한 정권의 구호가 아니라 시민이 숙의로 만든 기준이었다.
건설 재개만 기억하고 축소 권고를 지우는 것은 공론화의 절반만 가져가는 일이다. 그 절반은 뒤집혔고, 뒤집은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정부는 누구를 계승하는 정부인가.
나흘 동안 순례단이 걸어서 지나온 것은 발전소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해체에 12년, 수명연장에 10년, 신규 원전에 60년, 폐기물에는 수만 년. 그 시간표 어디에도 주민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데 쓰겠다는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열차가 끊긴 역에서 순례는 다시 시작된다. 남은 길은 경주를 지나 서울로 이어진다.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줄어든 자리에 발전소만 늘어나는 일을, 우리는 발전이라 부르지 않는다.
글쓴이: 최경숙 환경운동연합 정책변화팀 활동가
신규 핵발전소 저지 전국 탈핵 순례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핵발전소 추가 말라!> 4화
고리 순례 나흘
고리 순례단 나흘 72.2km, 해체와 수명연장과 신규가 한자리에 쌓인 땅
고리 순례단은 9월 1일 고리핵발전소 앞을 떠나 나흘 동안 72.2km를 걸어 경주역에 닿았다. 그 경주역은 열차가 서지 않는 폐역이다. 나흘을 걸어 닿은 곳이 기차가 끊긴 역이었다. 사람이 오가던 길은 끊기고, 전기를 실어 나르는 길만 굵어진다.
나는 영광을 걷고 있어 이 길에는 서지 못했다. 저녁마다 건네받은 기록과 목소리로 이번 회차를 쓴다.
나흘의 경로는 한국 에너지 체제의 축소판이다. 발전소 울타리를 등지고 출발해 반나절이면 보건지소가 있는 면 소재지에 닿고, 하루를 더 걸으면 시청이 있는 도심 한복판이다. 위험을 이고 사는 마을과 그 전기를 쓰는 도시 사이가 걸어서 하루 남짓이다. 그 거리를 견디는 쪽과 누리는 쪽은 이렇게 가깝다.
9월 1일 고리핵발전소에서 출정식을 하는 순례단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출발점이 이미 질문이었다
고리·새울 부지 반경 30km 안에는 수백만 명이 산다. 이만한 인구 위에 이만한 규모로 원자로가 모여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순례단이 등지고 출발한 울타리 안의 사정은 이렇다. 지난해 해체 승인을 받은 1호기, 설계수명을 넘기고 다시 전력을 생산하는 2호기, 수명이 다해 멈춰 선 채 계속운전 심사를 기다리는 3·4호기, 상업운전을 앞두고 시험운전 중인 새울 3·4호기. 여기에 2027년 준공을 목표로 짓고 있는 연구용 원자로가 있고, 소형모듈원자로(SMR)까지 건설 후보 부지로 정해졌다. 생애주기가 제각각인 원자로가 한자리에 쌓여 있다.
울산환경운동연합 이현숙 대표에게 걷는 이유를 묻자 그가 먼저 꺼낸 것은 새울 3호기 이야기였다.
"올해 하반기 상업운전을 앞두고 지난달에 시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동 정지가 됐다고, 기자분들이 말씀해 주셔서 우리가 알게 됐거든요. 너무너무 깜짝 놀랐고 정말 무서웠습니다."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새울 3호기는 "원자로 출력 80%에서 송전을 차단하는 시운전 시험을 마친 뒤 원자로 출력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운전원이 터빈제어밸브 위치제한기의 설정값을 잘못 입력"해 자동정지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사건조사를 마치고 재가동을 승인한 것은 순례 나흘째인 9월 4일이다.
원자로가 멈춘 날부터 원인이 공개된 날(9월 4일)까지 24일. 그동안 발전소 곁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지냈다. 설명이 늦게 도착하는 곳에서 안전은 함께 확인하는 사실이 아니라 뒤늦게 받아 드는 통보가 된다.
길을 나서기 전 탈핵 메세지가 담긴 몸자보를 달고 있는 순례단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문을 닫는 순간부터가 진짜 청구서다
1978년 이 땅에서 첫 상업운전을 시작한 고리 1호기는 2017년 영구정지됐고, 지난해 6월 원안위의 해체 승인을 받았다. 국내 상업용 원전으로는 첫 해체다. 총 해체비용 1조 713억 원, 완료 목표는 12년 뒤인 2037년이다.
이 금액에서 눈여겨볼 것은 무엇이 빠져 있는가다. 1조 713억 원은 사용후핵연료를 최종 처분하는 비용을 뺀 액수다. 해체 과정에서 나올 방사성폐기물만 17만t이 넘는다. 발전을 멈춘다고 비용도 위험도 끝나지 않는다. 핵발전소는 문을 닫는 순간부터가 진짜 청구서다.
그런데 그 청구서를 받아 둘 곳이 없다. 사용후핵연료를 영구 처분할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은 반세기가 가깝도록 없었다. 대신 부지 안에 쌓는다. 올해 3월 기준 고리의 저장률은 93.4%로 네 곳 원전 부지 가운데 가장 높고, 2032년이면 포화한다. 한수원은 올해 12월 고리 부지 안 건식저장시설 인허가를 신청할 예정이다.
포화가 눈앞이라는 것은 저장시설을 지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이 시스템이 완결될 수 없다는 증거다. '임시'라는 이름을 단 시설이 한번 들어오면 언제 나가는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정부는 새로 짓는 이야기를 60년 뒤까지 하면서, 그것을 끝내 치울 사람이 우리 다음 세대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한쪽에서 해체가 시작되는 동안, 바로 옆에서는 수명이 끝난 원자로가 다시 돌아간다. 고리 2호기는 2025년 11월 2033년까지의 계속운전 허가를 받아 올해 4월부터 다시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고리 3호기는 2024년 9월, 4호기는 2025년 8월 각각 운영허가 기간 40년을 채우고 멈춰 섰다. 원안위는 지난 8월 4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두 기의 계속운전 허가안을 하반기 전체회의에 상정하겠다고 밝혔다.
원안위는 노후 원전을 신규 원전과 동등한 수준으로 심사하겠다고 했다. 그 말대로 되기를 바란다. 다만 순서가 마음에 걸린다. 심사 결과가 아니라 심사 일정이 먼저 업무보고의 항목이 된다. 규제기관이 정책 일정표 위에서 자기 계획을 설명하는 구조에서는, 40년 돌린 기계를 10년 더 돌리는 판단이 안전의 시계가 아니라 진흥의 시계에 맞춰지기 쉽다.
고리핵발전소가 있는 기장을 출발해 경주를 향해 걷고 있는 순례단 ⓒ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기장을 '아톰타운'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수명이 끝난 원자로를 다시 돌리는 것만이 아니다. 정부는 같은 자리에 새 원자로를 더 얹으려 한다.
지난 6월 17일 한수원 부지선정평가위원회는 국내 첫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의 건설 후보부지로 기장군을, 신규 대형 핵발전소 2기의 부지로는 영덕군을 확정했다. 기장은 87.11점으로 경주(84.56점)를 앞섰다. 고리원자력본부 안의 약 22만㎡가 이주나 매입 없이 즉시 착공할 수 있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미 원전이 있으니 새 원전을 짓기 좋다는 논리다. 위험이 쌓인 곳일수록 다음 시설을 받기 쉬워진다.
기장을 두고 '아톰타운'이라는 말이 나온다. 동남권원자력의학원과 중입자치료센터, 연구용 원자로와 동위원소 활용시설, 파워반도체 기업이 들어선 산업단지, 그리고 바로 옆의 고리핵발전소까지 한자리에 모였다는 뜻이다. 이 목록에 빠진 것이 하나 있다. 사고가 났을 때 반경 30km 안의 수백만 명이 어디로, 어떻게 피하는가.
정부는 SMR을 미래형 원전이라 홍보한다. 그러나 기장에 들어설 i-SMR은 170MW급 모듈 넷을 묶은 680MW 규모다. 587MW인 고리 1호기보다도, 640MW인 고리 2호기보다도 크다. '작다'는 말은 모듈 하나를 놓고 하는 말이고, 한 부지에서 넷이 동시에 돌아간다는 뜻은 그 말에 들어 있지 않다.
더구나 i-SMR은 아직 설계를 심사받는 중이다. 사업단은 올해 2월 표준설계인가를 신청했고 인가 목표는 2028년이다. 안전성 판단이 끝나기 전에 부지가 정해졌고,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을 어디까지 줄일 것인지가 벌써 논의된다. 비상계획구역은 사고가 났을 때 주민을 대피시키는 범위다. 그 범위를 설계가 확정되기도 전에 좁히자는 것이다. 근거가 서기 전에 자리부터 잡는 것을 우리는 실험이라고 부른다. 여기 주민들은 실험 대상이 아니다.
산업단지 쪽으로 언덕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원자로가 있다. 2027년 준공을 목표로 공사 중인 열출력 15MW급 수출용 신형연구로다. 의료·산업용 방사성동위원소를 대량 생산해 수출까지 하겠다는 시설로, 지금 운영허가 심사가 진행되고 있다.
작으면 안전한지는 이미 여러 사고가 답하고 있다. 대전 하나로 연구로에서는 2004년 봄 냉각·정화계통에서 중수 누출이 일주일간 이어졌다. 규제 당국에 보고된 것은 한 달 뒤였고, 지역 주민이 안 것은 다시 두 달이 지나서였다. 2011년에는 수조에 잠겨 있던 반도체 생산용 알루미늄 통이 위치를 벗어나 고방사선 신호가 발생해 원자로가 자동정지했고, 방사선 백색비상이 발령됐다. 연구용 원자로의 사고는 노심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동위원소를 만들고, 거르고, 저장하고, 정비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더 큰 문제는 이 시설들이 저마다 다른 절차로 심사된다는 데 있다. 가동 원전과 해체 원전, 저장시설, 연구용 원자로, SMR이 각각 다른 기준과 허가로 안전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지진도 침수도 대규모 정전도 허가 단위로 나뉘어 오지 않는다. 한 지역에 밀집한 핵시설의 누적위험을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제도가 없다는 것, 그것이 지금 기장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아톰타운은 시설의 목록이지 사람의 목록이 아니다.
기장군에 건설 중인 수출용신형연구로 건설공사 조감도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차가 서지 않는 옛 경주역에서
이현숙 대표의 말에는 안심과 슬픔이 한 문장에 같이 들어 있었다.
"울산에 안 온 게 안심이 되면서도, 영덕에 가는 건 또 슬프고. 그러니까 왜 이런 걸 국가에서 만드냐고요. 지역마다 맨날 경쟁하게 하고, 지역마다 이런 아픔을 가지게 하는 거. 이게 지방 균형 발전, 일자리 창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정치 놀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을이 안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다른 마을이 그것을 받는 것. 국가가 지역에 시켜온 일이 바로 이 구조다. 부지 선정 과정에서 오간 보상금과 지원금은 오래 함께 살아온 마을을 찬반으로 갈라놓았고, 그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다.
그래도 달라진 것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울산에는 반대 의견이 20~30%대로 유지되고 있고, 기후위기를 이유로 핵발전을 늘리겠다는 말에 젊은 세대가 먼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서 시민참여단은 건설 재개에 59.5%가 찬성했다. 동시에 원자력발전 정책의 방향으로는 53.2%가 축소를 택했고 확대는 9.7%였다. 공론화위원회의 권고도 건설은 재개하되 장기적으로 원전 비중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한 정권의 구호가 아니라 시민이 숙의로 만든 기준이었다.
건설 재개만 기억하고 축소 권고를 지우는 것은 공론화의 절반만 가져가는 일이다. 그 절반은 뒤집혔고, 뒤집은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정부는 누구를 계승하는 정부인가.
나흘 동안 순례단이 걸어서 지나온 것은 발전소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해체에 12년, 수명연장에 10년, 신규 원전에 60년, 폐기물에는 수만 년. 그 시간표 어디에도 주민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데 쓰겠다는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열차가 끊긴 역에서 순례는 다시 시작된다. 남은 길은 경주를 지나 서울로 이어진다.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줄어든 자리에 발전소만 늘어나는 일을, 우리는 발전이라 부르지 않는다.
글쓴이: 최경숙 환경운동연합 정책변화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