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7일 발생한 경주 산불은 나흘 만에 진화됐지만, 우리 사회에 무거운 질문을 남겼다. 일부 주민들은 송전설비 인근에서 폭발음과 불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고, 한국전력은 설비 이상 징후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원인 단정을 유보하고 있다. 산불의 최종 원인이 무엇으로 결론 나든, 이번 산불이 드러낸 구조적 문제는 분명하다. 송전설비는 발화 원인으로 의심받았을 뿐 아니라, 진화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장애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80~100m 높이의 초고압 송전탑과 복잡하게 얽힌 송전선로는 헬기의 저공 진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강풍 속에서 전선과의 충돌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종사들은 보수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초기 진화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송전망이 재난의 기폭제이자 대응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드러난 셈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산불은 더 이상 계절적 자연재해가 아니다. 고온·건조·강풍이 결합하면서 산불 발생 시기는 겨울과 초여름까지 확장되고, 규모 역시 대형화·상시화되는 추세다. 극한 기상의 빈도 증가는 산불 위험을 구조적으로 높이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소방력 강화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국가 기간 인프라인 전력 시스템의 설계 자체를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현재 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원전 확대와 수명 연장, SMR 도입 등 이른바 ‘원전 부흥’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이 전력 체계를 더욱 중앙집중적이고 거대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대규모 발전소에 의존하는 구조는 기후 재난이 일상이 된 시대에 여러 위험을 동시에 키운다.
첫째는 장거리 송전 의존도의 심화다. 동남·동해안에 밀집된 원전에서 수도권으로 전력을 보내기 위해서는 산악 지역을 가로지르는 초고압 송전망 확충이 필수적이다. 이는 산불 위험 노출 면적을 넓히고, 재난 발생 시 진화의 어려움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송전선로는 단순한 전력 통로가 아니라 잠재적 위험 인프라가 될 수 있다.
둘째는 ‘단일 실패’의 국가 리스크화다. 거대 발전소와 특정 송전로에 의존하는 구조에서는 한 지역의 산불이나 사고가 전체 계통의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대형 산불이 송전선로를 위협하면서 발전소 출력 조정이 이루어진 사례는 중앙집중형 전력 구조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발전의 집중은 곧 위험의 집중이기도 하다.
셋째는 기후 적응성의 부족이다. 원전은 대량의 냉각수를 필요로 하기에 해수 온도 상승이나 가뭄 같은 기후 변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또한 출력 조절이 어려운 경직성 전원이라는 점에서 급격히 변하는 기상 조건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안정적인 발전량보다 시스템의 유연성과 적응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발전은 지방에서, 소비는 수도권에서” 이루어지는 체계 속에서 발전소와 송전선로 인근 지역은 산불 위험, 경관 훼손, 건강권 침해라는 부담을 떠안는다. 반면 전력 소비의 편익은 대도시와 수도권 산업단지에 집중된다. 위험은 주변부로 외부화되고 편익은 중심으로 집중되는 구조는 기술적 선택을 넘어 ‘에너지 정의’의 문제다.
특히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대규모 전력 수요가 예정된 상황에서 공급 확대 중심의 정책을 지속한다면, 더 많은 초고압 송전탑이 산과 마을을 관통하게 될 것이다. 이는 재난 위험과 지역 갈등을 동시에 증폭시키는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전력 정책의 기준은 효율성에서 ‘회복력(Resilience)’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재난이 상시화된 시대에는 전기를 얼마나 싸게, 많이 생산하느냐보다 피해를 얼마나 국지적으로 제한하고 빠르게 복구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수요지 인근에 태양광, 풍력, 에너지저장장치(ESS) 같은 분산형 전원을 확대하고, 지역 단위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비상시 외부 계통과 분리돼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마이크로그리드 구축이 필요하다. 병원, 통신시설, 상수도 등 필수 기반시설이 대형 산불이나 지진 상황에서도 기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경주 산불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전기를 더 많이, 더 멀리 보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체계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충격을 분산하고 스스로 버틸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할 것인가. 기후 재난이 일상이 되어가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발전원 숫자의 경쟁이 아니다. 재난 속에서도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는 안전한 전력 시스템의 재설계다. 지금 필요한 논의는 공급 확대가 아니라, 회복력과 안전을 중심에 둔 에너지 전환이어야 한다.
지난 2월 7일 발생한 경주 산불은 나흘 만에 진화됐지만, 우리 사회에 무거운 질문을 남겼다. 일부 주민들은 송전설비 인근에서 폭발음과 불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고, 한국전력은 설비 이상 징후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원인 단정을 유보하고 있다. 산불의 최종 원인이 무엇으로 결론 나든, 이번 산불이 드러낸 구조적 문제는 분명하다. 송전설비는 발화 원인으로 의심받았을 뿐 아니라, 진화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장애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80~100m 높이의 초고압 송전탑과 복잡하게 얽힌 송전선로는 헬기의 저공 진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강풍 속에서 전선과의 충돌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종사들은 보수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초기 진화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송전망이 재난의 기폭제이자 대응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드러난 셈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산불은 더 이상 계절적 자연재해가 아니다. 고온·건조·강풍이 결합하면서 산불 발생 시기는 겨울과 초여름까지 확장되고, 규모 역시 대형화·상시화되는 추세다. 극한 기상의 빈도 증가는 산불 위험을 구조적으로 높이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소방력 강화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국가 기간 인프라인 전력 시스템의 설계 자체를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현재 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원전 확대와 수명 연장, SMR 도입 등 이른바 ‘원전 부흥’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이 전력 체계를 더욱 중앙집중적이고 거대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대규모 발전소에 의존하는 구조는 기후 재난이 일상이 된 시대에 여러 위험을 동시에 키운다.
첫째는 장거리 송전 의존도의 심화다. 동남·동해안에 밀집된 원전에서 수도권으로 전력을 보내기 위해서는 산악 지역을 가로지르는 초고압 송전망 확충이 필수적이다. 이는 산불 위험 노출 면적을 넓히고, 재난 발생 시 진화의 어려움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송전선로는 단순한 전력 통로가 아니라 잠재적 위험 인프라가 될 수 있다.
둘째는 ‘단일 실패’의 국가 리스크화다. 거대 발전소와 특정 송전로에 의존하는 구조에서는 한 지역의 산불이나 사고가 전체 계통의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대형 산불이 송전선로를 위협하면서 발전소 출력 조정이 이루어진 사례는 중앙집중형 전력 구조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발전의 집중은 곧 위험의 집중이기도 하다.
셋째는 기후 적응성의 부족이다. 원전은 대량의 냉각수를 필요로 하기에 해수 온도 상승이나 가뭄 같은 기후 변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또한 출력 조절이 어려운 경직성 전원이라는 점에서 급격히 변하는 기상 조건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안정적인 발전량보다 시스템의 유연성과 적응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발전은 지방에서, 소비는 수도권에서” 이루어지는 체계 속에서 발전소와 송전선로 인근 지역은 산불 위험, 경관 훼손, 건강권 침해라는 부담을 떠안는다. 반면 전력 소비의 편익은 대도시와 수도권 산업단지에 집중된다. 위험은 주변부로 외부화되고 편익은 중심으로 집중되는 구조는 기술적 선택을 넘어 ‘에너지 정의’의 문제다.
특히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대규모 전력 수요가 예정된 상황에서 공급 확대 중심의 정책을 지속한다면, 더 많은 초고압 송전탑이 산과 마을을 관통하게 될 것이다. 이는 재난 위험과 지역 갈등을 동시에 증폭시키는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전력 정책의 기준은 효율성에서 ‘회복력(Resilience)’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재난이 상시화된 시대에는 전기를 얼마나 싸게, 많이 생산하느냐보다 피해를 얼마나 국지적으로 제한하고 빠르게 복구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수요지 인근에 태양광, 풍력, 에너지저장장치(ESS) 같은 분산형 전원을 확대하고, 지역 단위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비상시 외부 계통과 분리돼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마이크로그리드 구축이 필요하다. 병원, 통신시설, 상수도 등 필수 기반시설이 대형 산불이나 지진 상황에서도 기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경주 산불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전기를 더 많이, 더 멀리 보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체계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충격을 분산하고 스스로 버틸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할 것인가. 기후 재난이 일상이 되어가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발전원 숫자의 경쟁이 아니다. 재난 속에서도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는 안전한 전력 시스템의 재설계다. 지금 필요한 논의는 공급 확대가 아니라, 회복력과 안전을 중심에 둔 에너지 전환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