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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개방 시대…’풀뿌리 저항’의 설 땅은?

농업개방 시대…’풀뿌리 저항’의 설 땅은?
[정읍-의령 르포]농민후보들의 ‘열기’와 현실의 ‘냉기’

2006-05-17 오후 2:29:25

경남 의령군수 선거에 출마한 박민웅 후보(민주노동당)의 사무실. “결혼식 때 입었던 양복을 처음으로 다시 찾아 입었다”며 검게 그을린 얼굴로 어색하게 웃는 한 ‘농민’ 선거운동원의 손놀림이 재다. 농번기에 치러지는 선거인지라 후보를 비롯해 대부분의 운동원들이 새벽에는 수박밭 비닐하우스 작업을, 낮엔 선거운동을 한다. 하루 서너 시간 깜빡 눈을 붙이는 게 휴식의 전부라고 한다. “농민이기에 농사는 포기할 수 없다”는 것.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소속으로 ‘농민 후보’를 자처하는 박 후보는 “지금 군민들은 정치 지도자에 대한 믿음이 없는 상태이며 농민들은 모두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했다. 왜 출마했느냐는 물음에 “시대적 부름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라고 했다. 거창했고 비장했다.

‘시대적 부름’은 무엇이었을까. “농민의 힘으로! 한미 FTA 저지! 농업문제는 농민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적힌 플랜카드가 답을 대신했다. 농업 개방의 시대, 한미 FTA 시대를 앞두고 치러지는 민선 4기 지방선거에 흐르는 ‘풀뿌리 저항’의 한 지류임에 틀림없다.

▲ 농민들의 희망을 담아낸 농민회의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있다. ⓒ프레시안

“누굴 믿어, 우리가 직접 목소리를 내야지…”

농민들의 위기감은 절박했다. 정부가 한미 FTA 협상에서 쌀을 제외하겠다고 밝혔음에도 나날이 떨어지는 쌀값과 개방 압력 앞에 이들의 시름은 달래지지 않고 있다. 의령군 용덕면 정덕리에 사는 농민 전원길 씨는 “한미 FTA가 타결되면 (우리 농업이) 1년을 버틸지, 2~3년을 버틸지가 문제일 뿐 이 나라 농업은 끝”이라고 말했다.

전북 정읍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정읍 농민회 부회장 노환영 씨는 “농민회 출신 사람이 지역기반이 두터운 ○○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적도 있지만, 쌀 개방 등 현안에 부딪혔을 때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정읍시장 선거에 출마한 이효신 후보와 함께 농민회 임원직을 맡고 있는 그는 “갈수록 농민의 입지가 좁아지는 지금, 결국 우리가 직접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농민을 위한 정치’를 표방했던 정치인들은 당선 후에는 태도를 바꿨다고 했다. 지방의회나 자치단체에 진출한 뒤에는 관광지 개발이나 기업 유치 등 농업 파괴적 문제에 ‘올인’해 왔다고 한다.

이효신 후보는 “기업을 유치해서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해도 현지에서는 비정규직만 고용할 뿐”이라고 말했다. 들어선 기업이 지역경제에 적합한 산업인지도 불분명할 뿐더러 농업을 떠난 농민들을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로 내모는 악순환만 거듭했다는 것이다.

강요된 선택, ‘개발’과 ‘도시화’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도 ‘개발’과 ‘도시화’의 공약은 여지없이 넘실댄다. 정읍시장에 출마한 유력정당 후보들은 각각 △중소기업 유치 △영화세트장 개발 △첨단산업단지 조성 △내장산 휴양지 상품화 △서남권 물류중심도시 만들기 등을 실현가능성과는 무관하게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당선이 유력한 모 의령군수 후보도 △골프장 건설 △15만 평의 지방산업도시 건설 △기업유치 등을 내걸었다.

고단한 ‘저항’보다는 장밋빛 ‘개발’이 일단 듣기에 매력적인 법. 농민 후보들이 내세우는 △한미FTA 반대 △지방자치단체의 농업예산 확충 △주민들의 무상의료, 무상급식 지원 등의 정책 방향이 유권자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턱 없이 부족해 보였다.

의령군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한 강영규 후보는 “그동안 군의원의 대다수가 건축업체를 운영하거나 그에 관련된 사람이었다”며 “지역의 정치인들이 그렇다 보니 농민을 위한 정치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개탄했다.

농민후보들의 풀뿌리 실험, 성공할까

농민 후보들이 처한 악조건은 경쟁자들의 사탕발림 공약뿐만이 아니다. 여전한 지역주의의 벽은 특정정당에 대한 선택을 강요했다. 정읍의 노환영 씨는 “막연히 여당이 좋다는 생각, 혹은 기존 정당에 대한 향수가 여전히 유권자들의 심리를 좌우한다”고 말했다.

정읍의 이효신 후보는 “농민 후보에 대한 관심이 있더라도 결국 표는 지연과 혈연으로 엮인 후보에게 가버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의령의 박민웅 후보도 가장 어려운 문제로 “농민들의 심정적 지지가 표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꼽았다. 실제로 이런 요인들로 인해 ‘농민 후보’들의 인지도와 지지도는 한자리수를 넘지 못한다.

▲ “투표를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머 나아지는게 있어야지.” 정읍시 풍월리에서 만난 농민들 ⓒ 프레시안

지역주의는 젊은층이 빠져나가면서 발생한 농촌의 고령화와 맞물려 더욱 공고해졌다. 1995년 30만 명이던 정읍의 인구는 현재 13만 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의령은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25.7%로 도내 1위다.

실제로 두 지역에서 노장년층이 대부분인 농민들은 ‘농민후보’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냉소의 반응을 보였다. 정읍시 고부면 백운리 이장인 이 모 씨는 “농민이 정치를 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어디 바빠서 투표나 하겠느냐”고 지역 분위기를 전했다.

다른 농민에게 ‘농민 후보가 나온 것을 아느냐’고 물어봐도 “그러냐”는 머쓱한 대답만 돌아왔다. “뽑아봤자 바뀌는 게 뭐가 있느냐”는 말과 함께.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 전혀 다른 반응도 없지 않았다. 의령읍 무전리에서 만난 한 농민은 “이제까지 나는 ○○당 지지자였다. 그러나 한미 FTA를 추진하는 정부나 ○○당이나 다 같은 편인 것 같은 배신감이 들었다. 농민 후보가 당선되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이번 5.31 지방선거에 나선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 후보는 7명의 단체장 후보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102명. 민주노동당 강기갑 후보를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시키기는 했지만, 대규모 후보를 내 치르는 선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이 농업 개방화 시대를 맞아 ‘절망감’과 ‘절박감’이 뒤섞인 농민들을 농촌의 주인으로 묶어세울 수 있을지 결과를 숨 죽여 지켜본다.

송호균,강이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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