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 활동소식

거래는 없고 가족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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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미루의
유럽생태기행’
에 관심을 가져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쉽게도 약속했던 6편의 이야기가 잉글랜드의 브루더호프 공동체
편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아름답고 마음벅찬 유럽 곳곳의 생태공동체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미루님께도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

전후
독일에서 탄생한 브루더호프

1920년 독일의 시골마을 자네르쯔(Sannerz)에 처음 세워졌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굶주린 사람들을 외면한 부유한 기독교인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당시 청년기독교 운동에 열심이던 젊은이
에버하르트 아놀드(Eberhard Arnold)가 가족을 데리고 작은 농장을 세운 것. 이후 동참자가 늘어나면서 ‘브루더호프-형제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이름의 마을을 정식으로 세웠으나, 나치당이 정치권력화하면서 모든 종류의 살인과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징집을 거부하자 추방명령을 받고,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이들을 받아준 나라인 남미
파라과이의 정글에서 30년 동안 풍토병과 독충과 싸우며 자신들의 신념을 지킨다. 급기야 1960년대 사회대안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나며 정글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브루더호프는 이제 미국과 영국, 호주에 여러 개의 마을을 갖춘 공동체로
성장했다.
www.bruderhof.com

브루더호프 얘기를 하려면 올해 1월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런던에서 덜컹덜컹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한 시간쯤 달려가면 도착하는 로버트브릿지(Robertbridge)역.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다 문득 ‘다벨 브루더호프(Darvel Bruderhof)’의 나무 간판 앞에서 눈을 들었을 때 마주친 구비구비 푸르른
구릉과 울창한 숲의 행렬! 계속해서 화살표를 따라, 안개비가 자욱이 껴서 한치 앞도 들여다볼 수 없던 그 깊은 숲을 빙 둘러
올라가자니 문득 거짓말처럼 ‘까르륵… 까르륵…’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었다. 어두컴컴한 오후 3시(영국의 겨울 저녁은 아주
일찍 찾아온다), 비 내리는 깊은 숲. 이런 데서 아이들의 소리가 들린다는 게 좀체 믿기지가 않아서 처음엔 ‘영화에서 보던 마녀들?’
하고 상상의 날개가 뻗어나가며 무서움이 들 정도였다. 공동체를 찾아다니는 여행이 어느덧 두서너 달째를 넘어가던 당시, 애들 웃는
소리로 마을 입구가 열리는 곳은 단언컨대 브루더호프가 처음이었다. 알고 보니 초등학교 아이들이 숲에서 선생님과 함께 모닥불 놀이를
하는 날이었다고 했다.

도착하자마자 하는 일은 사무실에서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 일. 반가운 한글이름이 여기저기 눈에 띄어 물어보니, 한 달에 많게는
수십 명씩 다녀갈 정도로 유독 한국인 방문객이 많단다. 기독교 초대교회(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전 공동소유를 원칙으로 생겨났던
기독교인의 공동체)의 원형을 간직한 공동체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찾아오는 한국인의 대부분은 기독교인. ‘거지가 속옷을 벗어주라면
겉옷까지 벗어주고 5리를 가달라면 10리를 같이 가주라’는 마태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며 모여 사는 이들이 있다는 말에 신심
깊은 교인들이 하나둘 모여 방문길에 나서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먼 길을 와서 당황하지 않으려면 브루더호프에 관한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아야 한다. 이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주여,
주여!’를 외치며 예배에 골몰하는 ‘기독교 순수파’가 아니다. 다른 종교에 이단이라는 딱지를 붙여 배척하는 것도 이들의 주요
임무가 아니다. 전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며 이라크 전쟁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지역 주민들과 츠나미 재해 돕기
콘서트를 공동개최하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이들은 한국사람이 찾아오면 ‘미안하다’고 말한다. 2백 년 전 처음 복음이 한국땅에
전파되었을 때, 미개한 이단이라 해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짓밟은 선교사들의 무지와 무례함에 대한 사과다.

이런 사정이야 나중에 한 주일을 다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고, 도착한 그날은 나보다 세 살 어린 처녀 리아네 집 ‘손님’으로
배정되어 짐을 푼 뒤 깨끗이 정돈된 아름다운 마을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루일정을 리아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아침 6시50분쯤
리아 가족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한 뒤 점심과 저녁은 마을 중심에 있는 공동식당에서 3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과
다함께 먹는다, 숙박이 모두 무료인 대신 마을 사람들과 똑같이 공동 청소나 공장일을 해야 한다. 이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공장이라니?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일단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공동식당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무얼 배우나요?

학교 급식소를 연상케 하는 네모난 책상들이 죽 열을
지어 놓여 있는 식당. 건물 앞의 종을 땡땡 울리자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메뉴는 호박수프와 이탈리아 케이크, 잘게 썰어서 먹기 좋게 찐 당근, 그리고 홍차. 테이블마다 음식이 담긴 커다란 접시가 놓여있고
사람들은 자기 접시에 먹을 만큼을 담아 덜었다.
내가 일주일간 경험한 공동식당의 메뉴는, 조리하기 쉬운 단순한 음식 위주이긴 해도, 종류만큼은 다양했다. 따뜻한 빵과 버터,
다양한 감자요리와 수프가 번갈아 나오고 직접 만든 생일 케이크나 고기 카레가 나올 때도 있었다. 채식을 하는 나를 위해서는 특별히
야채 카레를 내주기도 했다. 주방의 일꾼은 10대 여학생부터 중년의 부인까지 다양한데,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우며 자란 이들은
열다섯 살만 되면 요리 전문가가 되는 모양이었다. 이밖에도 여성 전담 ‘집안일’에 포함되는 뜨개질이나 바느질, 청소 등의 솜씨는
다들 대단하다.

커다란 강당 규모의 식당이 빽빽이 들어차자 조용히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서 정말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완벽한 4중창의 호흡을 맞추는 솜씨들이 대단했다. 말하자면 ‘잘 먹겠습니다’ 정도의 간단한 노래를 부르는 건데, 가락이
그렇게 구성지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사실 브루더호프에서 맞은 나의 첫 번째 저녁식사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식사를 하는 중간에
고등학생 아이들이 마이크 앞으로 나가 발표를 하기 시작한 것도 그랬다. 잘 들어보니 견학을 다녀와서 자신들이 배운 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찾아가자 모스크 사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반갑게 맞이해주었어요. 아무래도
요즘 이슬람에 대한 영국사회의 태도가 냉담하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모스크 안에서 예배드리는 법과 절차를 자세히 들어봤더니,
놀랍게도 이슬람이 되는 절차가 아주 간단하더라구요. 개인을 희생해야만 엄격한 이슬람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오해였어요.”

고등학교 남녀 학생들이 팀을 짜서 근처에 있는 이슬람 사원을 견학하고 돌아온 얘기였다. 그들은 폭탄테러에 대해 사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며, 종교에 상관없이 일대일로 만난 이슬람들은 우리와 다름없는 보통 사람들이었다고 보고했다.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을 표현했다. 사실 밥술을 뜨면서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게 한국적인 ‘침묵의 밥상’
문화에 익숙한 나에게는 어색했지만, 학생들의 현장학습 결과가 마을 전체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되는 과정은 부러운 것이었다.

브루더호프 안에는 영아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과정의 정규교육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이틀쯤 묵었을 때인가, 두 살 배기 유아들의
선생님으로 일하는 리아가 공동체 내의 학교를 구경시켜준 적이 있었다. 밭에서,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아빠들을 위해 마을의 어린
아이들은 비슷한 또래들과 함께 영아원이나 유치원에 맡겨진다. 물론 그곳의 선생님들은 모두 리아처럼 마을에 함께 사는 언니들.
휴식시간이면 짬짬이 선생님 언니들의 손을 잡고서 엄마아빠가 일하는 들판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매주 일요일 아침에는 강당에
마을 전체가 모여서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읽으며 어른들이 즉석 연극을 벌이기도 한다.

초등학교 이상 되는 아이들은 특별히 ‘평화의 아이들’(Kids for Peace)이라는 합창단에 들어가 그야말로 세상의 평화를
바라는 노래를 배우게 된다. 독립전쟁으로 인한 분쟁이 끊이지 않는 북아일랜드나 유럽의 몇몇 나라로 순회 공연을 갈 정도로 ‘평화의
아이들’은 실력도 좋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안에 고등학교가 없어서 근처 학교로 아이들을 내보내야만 했다고 한다. 당시
성적인 자극과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학교 사정에 말 그대로 경악을 금치 못한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고등학교 과정까지 신설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이제는 10대 후반의 다 큰 아이들도 공동체 안에서 보호받으며, 동시에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키우기 위해
현장학습을 자주 나간다.

한 번은 불교에 관심이 많은 멘즈 가족이 ‘자두마을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나를 식사에 초대했다. 딸 다섯에 아들 하나, 여섯
명의 아이를 키우는 멘즈 부부는 호기심 많고 활기에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둘째 딸 리나가 구운 따듯한 빵에 멘즈 부인의 자랑인
레몬건포도 잼을 발라서 맛있게 먹은 뒤, 넷째 딸 코제트가 바이얼린을 켜며 노래를 대여섯 곡이나 불러준다. 그러고나서 중학생인
리나가 자신의 역사공책을 구경시켜주었다. 두꺼운 파일 한 가득 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라이라마 같은 20세기의 개혁적인 인물들의
프로필을 직접 조사해 채워 넣었고, 그중의 하나로 브루더호프의 역사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자신의 공동체를 세계적인 개혁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는 노력. 중간중간 직접 그린 그림이며 시, 노랫말이 눈에 띄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훌륭했다.
‘나중에 내 딸도 이렇게 키워야지!’

학교를 구경시켜주던 리아는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키며 ‘브루더호프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이라고 알려주었었다. 그러면서 78년에
태어난 이 아이가 79년생인 저 애랑 지금은 부부라며 까르르 웃었다. 초등학교 교실을 지날 때는 그 교실의 선생님인 리아의 친구를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열심히 아이들 가르치는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문득 리아의 친구가 책장에서 얇은 교과서를 하나 꺼내가지고
온다. “이거 생각나?” 두 사람이 1학년 때 배웠던 알파벳 교재였다. “선생님이
아직도 이 책을 참고자료로 쓰신다니까. 아참, 저랑 같이 일하는 선생님이 예전에 우리 선생님이셨거든요. 호호….”

브루더호프에서 고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적어서 공동체에
신청을 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여서 ‘지금 우리 마을에 필요한 기술’을 결정하고 그 순서대로 아이의 대학진학을 지원해준다. 의사가 필요하다면
의대 지원생을 먼저 대학에 보내고, 설계사가 필요하면 건축과 지원생이 먼저 가게 된다. 한 집에 평균 예닐곱 명씩 되는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가려 한다면 재정적인 지원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리아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영아들을 돌보며
만족을 느낀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자란 곳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대학졸업장을 기본으로 갖춰야 하는 사회’였다. 경쟁이 없는
공동체 안에 뚝 떨어져 있으니 이곳이 신천지처럼 보이고,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던 나의 세계가 마치 외계인의 세상처럼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돈은 어디서 벌어요?

주로 공동식당 바닥과 테이블 닦는 일을 하던 내가 드디어 말로만 듣던 ‘공장’에 나가는 날이 왔다. 브루더호프에서 보낸 넷째
날이었다. 공장에서 만다는 물건은 장난감, 브랜드 이름은 ‘공동체 장난감’(Community Playthings)이었다. 나중에
내가 브루더호프 자랑을 할 때는 이 공장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었다. 어릴 때 ‘희망을 파는 가게’라는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곳이야말로 ‘희망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동체 장난감’은 100% 수작업을 원칙으로 유아용 의자와 책상, 장난감 냉장고와 가구들을 만든다. 사람들은 조립과 사포질,
나사 맞추기와 박스 포장 등의 다양한 일을 나누어 하는데, 모든 작업장에는 알아보기 쉽게 그림을 곁들인 작업 설명서가 붙어 있어서
아무리 지독한 문외한이라도 그 설명서만 보면 만능박사처럼 척척 일을 해낼 수가 있다.

여기서 만들어진 제품은 영국은 물론, 미국과 호주에 있는 다른 브루더호프 공동체들을 통해 수출 판매된다. 아이들의 안전을 생각해서
일일이 수작업을 하는 꼼꼼함이 제품의 질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높은 가격으로 팔린다고 한다. 이렇게 생긴 돈으로 마을 아이들을
대학에도 보내고 다같이 만들어 입는 옷감도 사고 필요한 공동물품들을 외부에서 사오기도 하는 것이다.
나중에 핀드혼의 ‘생태마을 만들기’ 과정을 들을 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한 것이 돈문제였다. 불가리아든 브라질이든 영국이든,
공동체의 꿈을 지닌 사람들은 누구든 마찬가지였다. 사람도 있고 비전도 있는데 돈이 없어서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브루더호프는
독보적이다. 농산물은 마을 안의 채마밭과 지렁이를 이용한 유기농장에서 자급자족하고, 가외의 돈은 장난감 공장을 통해 얻는 수익으로
충당한다. 한겨울에도 최소한도로 난방을 자제하는 검소한 생활방식이 몸에 배어있기는 하지만, 언제 어디서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일주일이건
한 달이건 원하는 만큼 무료로 묵어갈 수 있게 할 만큼의 경제적인 여유와 자립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외부와의 돈거래를 하는 것은 그 임무를 맡은 이들의 소임.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는 사람들이 돈구경을 할 일이 없다. 밥도
옷도 음악도 나눠서 만들고 나눠서 쓰는 브루더호프 마을 안에서는 ‘거래’라는 말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다같이 일해서 만든 부를
공평하게 나눠쓰는 일에 생활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30년 전 브루더호프의 일원이 된 중년의 한 아저씨는 ‘파운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헷갈린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처음 장난감 공장이 시작된 것은 1950년대, 몇몇 미국 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몇 년 뒤 브루더호프가 이 공장을 맡으면서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정비한 걸출한 한두 사람의 노력이 있었고, 마침내는 누구의 통제나 지시도 필요 없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는
공동작업장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리아의 동생 아이리스도 이곳에서 나사를 분리하는 일을 하고, 아흔
살이 넘어 휠체어에 의지하는 할아버지도 하여간 아무리 작은 일이든 와서 돕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노인도
장애인도 여기서는 ‘문제’가 아니다. 주어진 조건에 맞는 역할을 주면 된다. 그래서 모두가 평등하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벗은 누군가요?

주방에서 일하며 알게 된 코니 아주머니에게 놀러갔던 얘기를 이쯤에서 해야 할 것 같다. 코니는 독신이다. 그래서 피붙이 가족이
없지만 이웃의 노부부와 그 건너집에 사는 고등학생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심심할 일은 별로 없다. ‘차를 마시러 오라’던 그녀의
말을 듣고 찾아갔더니 불쑥 자리를 권하는 것도 이웃 노부부의 응접실 소파였다. 브루더호프의 집들은 모두 서너 가구가 공동 부엌과
욕실을 사용하는 공동주택(Co-housing)이기 때문에 ‘이웃’이란 바로 옆방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오후 일과를 마치고 잠시 코니에 게 들렀더니 불쑥 노부부의 응접실로 들어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앉아 있자 옆집에 사는 젊은 부부가 ‘굿 이브닝’하고 고개를 내민다. 이들은 아시아 문제가 관심이 많아서
중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물어보더니 곧 공동체 안에서 살며 느끼는 고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니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두 잔째 차를 비우고 있는데 이번에는 젊은 부부의 아들이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인사를
돌린다. 안락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던 응접실의 주인 할아버지를 휠체어로 식당까지 모셔가야 할 시간이라고 했다.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는 팔팔한 학생들에 의지해 무사히 휠체어로 옮겨 탄다.

덴마트에서 30년 전 처음 시작되어 현재까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공동주택 운동은 에너지 절약은 물론, ‘모여 사는 주거 형태’를
통해 돕고 사는 이웃사촌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어린아이를 가진 부부들이 공동주택 공동체를 선호하는데, 3대에
걸친 풍요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이의 인성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은 외로움을 타기 쉬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코니와 같은 독신자에게도 공동주택은 훌륭한 시스템이다. 가족을 생활의 중심으로 여기는 브루더호프의 정신과 잘
맞아떨어진다.

다음날 아침 일찍 코니 아주머니는 나를 데리고 동산에 올랐다. 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무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다벨 브루더호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이들의 묘비가 볕바른 동산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짤막하게 들려주던
코니는 입구에 놓여 있는 작은 함에서 두꺼운 파일을 꺼내왔다. 열어보니 묘지에 잠든 이들의 사진과 일생의 이야기, 가족들이 보낸
편지들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코니가 조그맣게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나중에 그녀가 적어준 노래의 가사는
이랬다.

늙은 양은 길을 알고 있지
늙은 양은 길을 알고 있지
그래도 젊은 양들은
자기의 길을 찾아야 한다네

“하지만 늙은 양도 여전히 길을 찾고 있지, 나처럼.”

동산을 내려오며 코니가 말했다.

서울에 돌아와서

브루더호프에 머문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자두마을에서 한 달, 핀드혼에서 석 달을 보낸 것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브루더호프의
인상은 강렬했다. 내가 브루더호프 홍보를 맡고 있는 것도 아닌데, 강렬하지 않은 걸 지금 뻥튀기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농촌문제 중에서도 노인문제에 관심이 많은 나는, 연령의 차이와 신체적 능력의 차이가 사회적인 차별과 소외로 이어지지 않는 브루더호프의
삶에서 깊은 감동을 느꼈다. 인생이 이렇게 평등하고 평화로울 수도 있구나 싶은 것이 꿈만 같아서 한참 눈을 비비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다만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사회와는 너무나 달라서 문화적인 충격을 느꼈을 뿐이었다.

8개월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더니 나의 고향 서울은 어딜 가나 콘크리트와 첨단 크리스탈 빌딩의 숲이었다. 나무들이 셋방
사는 사람처럼 기를 못 편 채 가끔씩 고개를 들고, 인생과 예술은 분리되어 사람들이 노래방이나 가야 예술적인 기질을 발휘하게끔
되어 있다. 서울 사람들이 원래 그렇게 각박한 것이 아니고, 현대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몰아가는 것도 아니다. 브루더호프도 핀드혼도
자두마을 사람들도 모두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아니던가. 그들은 별종이 아니고 무지하게 평범한 그냥 우리 같은 21세기의
사람들이다. 그래도 나의 고향, 서울 사람들이 받지 못한 한 가지가 있긴 하다. 휴식을 원하는 자기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녹색의 교육, 평화의 교육을 우리는 받지 못했다. 이 말도 또한 이상적으로 들린다며 팽 돌아설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변화를
원하면 대안을 말하라’고 내가 방문했던 공동체 사람들이 가르쳐주었다.
좋소, 변화를 원하니 이제 대안을 만들겠소. 천천히.



(블로그 http://blog.naver.com/aboveink)

※ 이 글은 월간[이장](http://www.e-jang.net)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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