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 활동소식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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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15일 미루의 하루는...>

아침 6시 30분 명상방에서
좌선.
8시 아침식사. 과일과 요거트.
9시 ‘홈케어’ 방에 모여 각자의 일을 정한 뒤 함께 손을 잡고 ‘조율’(Tuning-in).
9시 20분 1층 라운지와 복도 청소.
11시 15분 홈케어 방에 다시 모여 ‘한 주일의 정리’, 즉 깊은 나눔의 시간.
12시 10분 다같이 손잡고 조율한 뒤(Tuning-out) 헤어짐.
12시 30분 점심식사. 스파게티와 야채, 수프.

오후 2시 홈케어 방에서
오후의 일 정한 뒤 조율.
3시30분 20분간 차 마시며 쉬는 티타임. 오후 내내 각 층에 있는 청소도구 창고 정리.
5시 홈케어 방에 모여 조율하고 헤어짐.
6시 금요일의 ‘가족 식사’. 50여 명의 공동체 멤버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식사하며
한 주일 정리. 연어 혹은 두부 스테이크와 당근 케이크 디저트.
6시 45분 금요일 저녁 ‘부엌정리팀’으로 다른 6명과 함께 부엌 청소.
7시 40분 룸메이트 포치와 방에 돌아와 휴식.


▲ 핀드혼 클루니의 작은 도서관 서가. 점성술과 심리학, 종교와 철학에 관한 책이 유난히 많다. ⓒ 미루

핀드혼 캐러반 파크에서 생태마을 프로그램을 마친 지 어느 새 4주.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리며 ‘내일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던 외침은 어디로 사라지고 나는 여전히 스코틀랜드 한 귀퉁이 핀드혼에 짱박혀 있다.
함께 생태마을 코스를 들었던 서른 명의 친구들이 미국으로, 불가리아와 미얀마로 아쉽게 손을 흔들며 돌아간 뒤 내가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핀드혼 클루니 컬리지에서 며칠만 쉬다가 떠나겠다고 마음을 정한 것. 결국은 이틀이 사흘 되고, 사흘이 일주일 되더니
무려 이 주일을 책 읽고 산책하고 가끔 일손이나 도우며 푹 쉰 끝에 LCG(Living in Comminuty as a Guest),
즉 ‘손님으로 공동체 생활 체험하기’라는 희한한 이름의 4주 프로그램에 뛰어들기로 작정하고야 말았다.

핀드혼은 정식 거주자만 3백여 명이 넘는 공룡 공동체로, 마을도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2백 50여 명이 모여 사는 본격적인
생태마을 ‘파크’, 그리고 약 50여 명의 소규모 멤버들이 중심이 되어 단기 프로그램 참가자들을 맞이하는 ‘클루니 컬리지’.
지난해 가을 처음으로 ‘일주일의 체험’ 코스에 참가했을 때 내가 머문 곳이 바로 클루니 컬리지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성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클루니 건물은 오래된 호텔을 개조한 것으로, 아쉽지만 친환경적인 설비는 거의 갖추어져
있지 않다. 종이와 유리병을 분리수거하고 작은 유기농 정원을 가꾸는 것이 전부. 그러나 오색의 ‘차크라 꽃밭’과 싱긋한 금잔디
정원에 서서 저 멀리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을 때의 평화로움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다. 게다가 내 인생의 방향을 살짝,
훨씬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주었던 ‘일주일의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던 곳이라 나로서는 더욱 애정이 가는 곳이기도 하다.

[핀드혼 TIP-1] ‘일주일의
체험(Experience Week)’ 코스

핀드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스. 핀드혼 공동체의 뿌리를 이루는 ‘영성 수행(Spiritual Practice)’을
체험 하는 프로그램으로, 토요일부터 그 다음주 금요일까지 꼭 일주일간 진행되며 거의 매주 10~20명 가량의
참가자가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
재미있는 것은 참가자들 대부분이 코스의 내용은 전혀 모르는 채로 핀드혼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찾아온다는 것.
대화와 춤, 노래, 게임을 즐기다가 공동체 멤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프로그램의 전부.
그러나 일주일이 채 다 지나기도 전에 참가자들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거대한 끈으로 이어져 있음을 체험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접하고, 그들 중 상당수가 다시 핀드혼으로 돌아와 장기 프로그램에 참가하거나 정식 멤버가 된다.
www.findhorn.org

[핀드혼 TIP-2] 핀드혼의 리더는 누구?

공동창립자 3인 중 아일린 캐디만이 현재 핀드혼 파크에 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정령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아일린은 그러나 지난 80년대에 이후 정령들로부터 더 이상 공동체에 메시지를 전달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 공식적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수의 멤버들이 스스로 공동체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권력이 민주적으로
분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포럼과 ‘피시 볼(Fish Bowl)’ 등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의사결정 시스템이
적용되었고, 독일의 제그(Zegg), 이탈리아의 다만후르(Damanhur) 등 유럽 내 다른 공동체들과 서로
교류하며 시스템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핀드혼의 중심문제 즉 멤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문제점은 핀드혼 카운슬→매니지먼트 팀→포럼의 3단계 과정을
거치며 해결되는데, 누구나 원하는 사람은 카운슬이나 매니지먼트 팀의 위원이 될 수 있고 포럼은 정해진 날에
자발적으로 모인 멤버들에 의해 진행된다. 핀드혼에는 더 이상 어떤 식으로든 권력을 가진 리더가 없으며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게 역할을 나누어 맡는다.

각설하고, 그리하여 LCG 멤버로 핀드혼의 일상생활을 탐험한 지 어언 2주. ‘뭐 좀 특별한 거
있냐’고 누가 묻는다면 ‘특별하게 일 많이 하고 있다’고 대답하련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그램의 주요 일과가 공동체 안팎을 돌보는
‘노동력 제공’이고, 일주일에 한 번씩 공동 교육과 명상, 나눔의 시간이 있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핀드혼의 멤버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일터(Work Department)를 선택해서 정해진 시간만큼 일을 하게 되어 있는데,
4주간 내가 선택한 일터는 클루니 건물을 청소하고 세탁실을 돌보는 ‘클루니 홈케어’였다. 말인즉슨 하루종일 쓸고 닦고 빨래 개고
신문지 정리한다는 뜻이다. 1년 반 가량 이곳에 머물고 있는 유일한 한국사람 재연언니 말에 따르면 ‘돈 내고 이 짓을 한다는
건 사실 정신나간’ 처사다. 50%의 참가비 감면 혜택을 받지 않았다면 벌써 한국 돌아가서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 먹으며 잘
살고 있을 텐데… 라는 탄식이 비록 농담조로나마 내 입에서도 간혹 나올 때가 있다. 밤 10시만 되면 지쳐 곯아떨어지는 고단한
생활을 그야말로 돈 주고 사서 하고 있는 격이 아닌가.


▲ 도서관에 딸린 작은 ‘해바라기 방'(Sun Room).
우리
LCG동료 아담(왼쪽)과 롤프 아저씨. 커다란 창문으로 햇살이 가득하게 들이치는 이 방에서 가능한 한 편안한
포즈로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책을 읽는 것이 내 일상의 기쁨이다.

ⓒ 미루

그러나 사실은 오전과 오후 두 번의 티타임 휴식시간과 홈케어 사람들과의 ‘나눔의 시간(Sharing)’을
빼면 일하는 시간은 고작 하루 4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에게, 겨우 그거 일하면서 힘들다고 엄살이야? 생각해보면 요즘 내가
에너지를 가장 많이 투자하는 것은 육체적인 노동이 아니다. 지금까지 내게 익숙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기준과 법칙으로 돌아가는
이곳 공동체의 삶에 새롭게 눈을 뜨고 적응하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쉴 틈이 없다.

핀드혼 사람들의 일과는 하루, 일주일, 한 달 단위로 정해진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생활이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해진
일과대로 일하고 정해진 시간에 휴식하고 정해진 시간에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는 나눔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잘 짜인 시계 톱니바퀴의 한 축이 되어 주변 사람들과 마음을 다해 호흡의 길이를 맞추는 일. 스물여덟 해를 살아온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의식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다.

8개월 전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친구들과 맥주집에서 수다 떨고 우울할 때는 쇼핑하는 ‘서울스타일’의 삶에 익숙해 있었다.
공부만 죽도록 하면 귀염받을 수 있었던 10대, 술집과 도서관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방랑을 즐기던 20대, 그 낭만에 종지부를
찍고 남보다 잘 나가기 위해 건강도 친구도 직장일을 위해 희생하던 20대 중반. 나를 길들인 것은 성공의 신화였다. 어쨌든 남보다
못한 사람은 되지 말자는 자존심의 신화. 몇몇 친구와 가족을 빼놓곤 모든 사람이 잠재적인 경쟁상대로 보이던 그 시절에는 업무통화
하느라 밥 먹는 시간을 포기하는 게 당연하게 보였었다.

‘천천히 해(Take your time)!’는 클루니에서 제일 자주 듣는 인사다. 오전에 일하는
시간이 겨우 두 시간밖에 안 되는데 그 와중에 더군다나 천천히 일하라니, 이래서야 무슨 일이 돌아가겠는가 싶은데 정원과 숙소와
식당, 주방에서 모든 일이 척척 막힘 없이 돌아간다. 천천히 하라는 인사는 결코 게으르게 일하라는 말이 아니다. 지난 주 프레데리카와의
‘사건’이 있고부터 그 사실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사건이라 부르기엔 미안하리만치 사소한 그 일은, 오전 티타임 시간에 내
방에 돌아와서 정해진 시간 20분보다 15분이나 더 쉬었다 나가다가 복도에서 홈케어 팀장인 프레데리카와 딱 마주친 그 날 벌어졌다.
양손 가득 타월을 들고 지나가던 그녀가 묻기를,

“지하층 계단도 진공청소기로 밀어야 되는 거 알지? 처음 하는 일이라 혹시 모를까봐… 근데 지금 어디서 오는 거야?”

3층에 있는 내 방 복도는 지하층 계단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차마 거짓말은 할 수가 없어서 사실대로 대답하긴 했는데 얼굴은
벌써 붉어지기 시작했다.

“음…. 칼라닛이 1층 청소도구 창고 정리하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던데. 계단 청소 마치고 가봐.”


▲ 금요일 저녁은 식당의 테이블을 모두 붙여서 ‘가족 식사’를 함께 들곤 한다.
언제인가 미국인-유대 아주머니 칼라닛의 생일이라 주방 사람들이 손수 만든 케잌을 선보였다. 제일 왼쪽 앞에
혼자 서있는 사람은 크리스. 부엌일을 주로 맡는 그는 얼마전 <주방에서 칼쓰기>라는 경이로운
수업을 진행한 바 있다.

미루

칼라닛과는 서로의 일을 마치고 같이 창고를 청소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참이었다. 그녀는
몇 달 전에 다친 다리가 아직 덜 아물어서 조금씩 절뚝거리며 걸어다니는 처지였다. 그러니까 내가 15분 더 쉬는 동안 몸도 불편한
칼라닛은 자기 할 일을 다 마치고 벌써 나와 같이 하기로 돼있는 일까지 혼자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남은 시간 동안 겨우
지하 계단 청소만 마치고 헐레벌떡 홈케어 방으로 뛰어가야 했으며 칼라닛에게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핀드혼 사람들은 자기
감정에 충실하되 ‘오버’하지 않는 법을 잘 익히고 있다. 어쩔 줄 몰라 호들갑 피우는 나의 사과에 칼라닛은 부드러운 미소로 “사과를
받아들일께”라고 말했을 뿐, 걱정하지 말라느니 까짓거 아무것도 아니라느니 하는 호사스런 대꾸는 덧붙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프레데리카가 “그렇게 큰 일이 아니야. 다만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에 누구만 더 쉬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것뿐이야,”
이렇게 정리한 뒤 다같이 촛불을 가운데 놓고 손을 맞잡았다. 눈을 감고 말 없이 서로의 기운을 느끼며 오전 일과를 정리하는 그
시간에 내 가슴을 채운 뼈아픈 후회란!

며칠 전에는 정원과 부엌, 홈케어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는 열다섯 명의 LCG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여 일하는 시간을 가졌다. 파크와 클루니를 포함한 핀드혼 전체에 신선한 유기농 야채를 공급하는 공동체 농장 일을 돕는 것이
우리의 프로젝트였다. 거기서 오후 한 나절 괭이질을 하고 나서 단단히 허리병을 얻은 나는 그야말로 ‘천천히’ 일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걸레를 집어들 때도 천천히, 문을 여닫을 때도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도 천천히. 쓸모 없는 일꾼으로 전락한 듯한 씁쓸한 기분이
오래가지 않은 것은 참 다행이었다. 홈케어 식구들이나 LCG 멤버 중 누가 특별히 내 몸을 자기 몸처럼 보살펴줬기 때문이 아니다.
이곳 사람들이 내게 베푼 은혜는, 불편한 몸을 가진 내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쨌든 정성을 다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
의심 없이 믿어주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몫의 일을 하면서 몸도 돌보고 팀의 일원이라는 소속감도 지킬 수 있었다.

‘너 거기서 뭐 배우고 있니?’라고 다시 한 번 누가 물어본다면 ‘내 몫의 하루 일과를 내 페이스대로 완성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대답하련다. 내 몸과 마음의 상태를 친절하게 살피고 돌보는 일. 핀드혼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내가 아는 한, 40년의 세월 동안 건강한 공동체가 지켜질 수 있었던 몇 개의 중요한 법칙 중 하나이다.

빛의 기둥 속으로

“LCG 도우미(focaliser)를 맡고 있는 조젯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브라질에서 온 조젯은 핀드혼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정열적인 여인으로, LCG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먼저 그녀를
만나 ‘인터뷰’라는 것을 해야만 했다. 인터뷰라면 우리말로 면접? 내가 프로그램에 적당한 사람인지 테스트하는 건가? 처음 LCG
참가 신청을 하고 조젯을 만났던 그 날, 순간 전신에는 긴장이 자르르 흘렀다. 핀드혼의 인터뷰라면 뭔가 다르긴 하겠지만, 그래도
입사 면접 때의 경쟁적인 인터뷰가 생각나서 마음이 불안했다.
조젯은 먼저 작은 테이블 위에 촛불을 올려놓고 내 쪽으로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LCG 프로그램과 우리의 에너지를 조율하고, 그 다음엔 어느 ‘일터’가 미루에게 가장 좋은지 알아보는
거야. 명상을 통해 미루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을 가질 거야. 그럼 먼저 우리의 조율을 시작할까?”

나는 조젯이 내민 두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앞에 앉은 사람의 기운을 느끼면 된다. 단 몇 초간의 이 짧은 일상적인 의식은 상대방을 분석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도록
마음의 채비를 갖춰준다. ‘땡큐’라는 말로 조율을 마친 우리는 본격적으로 LCG 프로그램과 조율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눈을 감고
조젯이 들려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천천히 걸어가고 있어. 지금 가고 있는 곳은 세상에서 네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장소야. 특정한 장소여도 좋고 꿈에 그리던
상상속의 공간이어도 좋아. 이제 네 앞에 거대한 빛의 기둥이 나타나. 이 기둥은 핀드혼 LCG 코스의 빛으로 빛나고 있어. 천천히
기둥 가까이 걸어가면서 마음속에 어떤 기분을 느낄 거야. 그리고 다시 천천히 기둥 속으로 들어가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봐.
…이제 천천히 돌아나올 시간이야. 작별을 고하고 한 걸음씩 발길을 떼어놓으면, 너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을 거야.”


▲ 내 사랑 윌, 그리고 클루니 사람들의 정신적인 안식처인 명상방. 윌 아저씨는 항상 “인생
좀 어떠냐?”는 물음으로 나를 즐겁게 한다. 명상방에서 나는 가운데의 푸른색 방석 위에 앉는다.
ⓒ 미루

이것이 핀드혼의 모든 주요 프로그램(Core Programmes)에 적용되는 ‘빛의 기둥’ 조율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이날 나는 LCG의 빛의 기둥이 햇빛처럼 환하고 부드러운 빛을 발하면서 따뜻하게 나를 안아주는 이미지를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기둥 안에 들어섰을 때 나는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웃으면서 자유로운 유영을 즐겼다. 조젯은 자신의 명상
속에서 내가 기둥의 굴곡진 선을 따라 흘러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훌륭해. 미루와 LCG 프로그램은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 이제 일터를 정해볼까. 지금 일손을
필요로 하는 일터는 클루니 홈케어, 클루니 공동식당, 파크 홈케어, 클루니 정원이야. 다시 한 번 일터의 이름들을 천천히 불러볼
테니까 눈을 감고 어느 곳이 미루에게 제일 좋을지 느껴봐.”

일터를 정하는 일은 좀전의 빛의 기둥 때처럼 간단하지가 않았다.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한 번 더 불러달라고 조젯에게 청해야
했다. 오래 전부터 정원 일을 배우고 싶어해 왔던 참이라 처음에 ‘클루니 정원’의 이름을 들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는데,
눈을 감고 들어본 나의 속마음은 엉뚱하게도 ‘클루니 홈케어’의 손을 드는 게 아닌가. 이날 내가 결국 홈케어 일을 선택한 것은
아직까지도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다. 먼지 날리는 방에서 진공청소기 돌리는 일은 내가 언제나 따분해
했던 일이 아닌가. 다만 그날 ‘클루니 홈케어’의 이름을 들었을 때 왠지 마음이 끌리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머리보다는 가슴의 명령을 따른 것을 나는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진공청소기와 친해지는
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4명의 홈케어 고정 멤버들과 생활하면서 예상치 않았던 것들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인의 눈(Supervision)’이라는
팀웍 상담시간이 좋은 예다. 팀 외부에서 초대된 한 사람이 홈케어 방을 찾아와서 팀원들이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도록 질문을
던지고 귀를 기울인다. 이 대화 과정에서 놀랍게도 겉으로는 사이좋게만 보이던 홈케어 팀의 두 사람이 감정적으로 서로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밀 지키기(Confidentiality)’의 규칙 때문에 구체적으로 이날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지금껏 숨겨온 속 얘기를 터놓은 두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점심을 같이 먹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기로
합의하고, 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는 오해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소한 개인 문제로 치부될 수도 있는 갈등들이 이곳에서는 공동체의 문제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은 문제라도
그늘에 숨기기보다는 터놓고 이야기하도록 격려 받는다. 물론 명상과 조율을 거쳐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터져나올 경우에.

저울질을 멈추고

‘외부인의 눈’을 치르고 나서 한 며칠 간 홈케어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해묵은 갈등을 풀고 화해의 과정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멤버들 사이에 더 솔직하고
화기애애한 가족 같은 분위기가 살아나기도 했다. 딱 2주일을 같이 보낸 신참으로서 때때로 사람들 사이에서 뻘쭘함을 느끼던 나도
어제오늘은 제법 농담을 던질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칼라닛이 LCG 다음 코스인 FP(Foundation Programme)에서
자기가 느낀 것들을 내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을 때 기쁜 마음으로 점심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최소 3개월 코스로, 핀드혼에서
장기체류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FP 프로그램. 그렇잖아도 FP를 하는 몇몇 친구들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알짜배기 코스’라며 극찬하는 걸 들으며 뭐가 그렇게 좋을까 궁금도 하고 내년쯤에 다시 돌아와서 나도 시도해볼까 갈팡질팡 하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 오후 햇볕이 따스하게 들어찬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할 때, 영민해 보이는 다갈색 눈의 유대 여인 칼라닛은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까 저럴까 마음을 못 정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나에게 그녀는 되물었다. 너의 속마음이 지금 정말 원하는
게 뭐냐고. 그 물음을 받고서, 여전히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로, 나는 잠시 나 자신과의 조율에 빠졌다. 생각을 멈추고
아주 잠시 있는 그대로 속마음을 들여다보자, 오후의 햇살처럼 맑은 빛이 고요히 내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어떤 걸 선택해야 내 인생에서 손해를 덜 볼지 저울질하고 있었어요. 핀드혼에 머무는 것이 좋은지, 한국에 돌아가 대학원에 빨리
진학하는 게 좋은지, 다시 직장을 갖는 게 좋은지, 인도로 여행을 계속하는 게 좋은지…. 그런데 이런 식으로 미래에 무엇이 더
이익을 줄지 계산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그걸 지금 알았어요.”

칼라닛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선택해도 네 인생은 아름다울 거야, 정말이지 그럴 거야. 지금도 너는 아름답게 잘 하고 있고. ”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죠? 칼라닛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인가요?”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없지.”
그녀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네 마음이 원하는 것을 찾으면 무엇을 해도 인생은 아름답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실. 저울질을 멈추고 지금 머물고 있는 이 순간을 즐거워하자.
이런, 어딜 가도 변함 없는 진실은 이것뿐이로군.

(블로그 http://blog.naver.com/aboveink)

※ 이 글은 월간[이장](http://www.e-jang.net)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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