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 활동소식

녹색을 꿈꾸는 이들의 오아시스, 브리스톨 슈마허 강의

첨부파일 열기첨부파일 닫기

영국
남부 데본에 자리잡은 생태교육의 메카, 슈마허 칼리지.

자연과 더불어사는 새로운 도덕과 경제, 지속가능한 생태철학을 주제로
반다나 시바, 제인 구달 등의 석학을 초대해 연중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며 가장 짧은 5일 강의부터 3주 코스까지
다양하다.
여기 참여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폭넓은 대중과의 만남을 위해 마련한 것이 1978년부터 매년 브리스톨에서
열리는 슈마허 칼리지 강의이다.
지난해 10월30일 여기 참가하기 위해 미루는 기차여행을 떠났다. (www.schumacher.org.uk)

“혹시 ….홀이 어딘지 아세요?”

영국에 살며 운이 참 좋다고 느낀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날 브리스톨 기차역 앞에서 그녀에게 이 질문을 던진 것도 내게 ‘좋은
운’을 가져다준 일이었다. 바쁜 걸음을 잠시 늦춘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슈마허 강의 들으러 오셨어요 저도 거기 가는 길이에요. 시간 거의 다 됐어요, 어서 가요!”

영국 남서부의 활기찬 도시 브리스톨은 슈마허 칼리지의 본거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기차역에 내려서 본 첫인상은 그저 ‘도시구나’라는
것뿐, 슈마허 강의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면 기차를 한 번 갈아타고 4시간이나 걸려서 이곳에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슈마허 칼리지의 공동설립자인 사티쉬 쿠마르가 강단에 서는 날. 올초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아직
눈코 뜰새 없이 직장일에 매여있었기 때문에 <한겨레21>에 실린 그의 인터뷰를 힐끗 읽고 지나쳤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날카로운 콧대를 가진 전형적인 인도남자 쿠마르는 30년 전 대서양을 건너와 그 유명한 그의 ‘발’을 영국 땅에 디뎠다.
두 발로 영국을 횡단하며 자연을 회복시키자는 걷기 명상을 펼친 이야기, 그의 노력이 영국과 유럽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들었었다.

“미루라고 해요.”
“내 이름은 타라.”


▲ 타라를 위한 사티쉬 쿠마르의 사인. 잉글랜드에서 정규교육
부적응 학생을 위한 대안 대학에서 보조교사로 일하는 타라는 불교의 기원과 싯달타의 생애를 그린
작은 책을 몇 권 샀습니다. 조만간 타라의 학교를 방문하기로 약속했지만, 헤어질 때는 무척 서운했습니다.
ⓒ 미루

내가 좋아하는 인도풍 스카프를 두른 타라와 함께 홀에 들어서자, 한눈에도 800~900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사람들이 대형강당의 자리를 빽빽히 채우고 있었다. 쥐죽은듯이 고요하던 홀에 징 소리가 울렸다. 타라와
나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강단에 선 남자는 계속해서 징을 울렸다. 알고보니 그는 ‘공 Gong’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일종의 징을 연주하며 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는데, 내게는 일상적인 그 소리에 사람들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엄숙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인도의 요가와 명상, 불교 사상은 수십년 동안 영국사람들에게 ‘신성한 무엇’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때로는 지나치게 신비화되기도 한다. 한자가 한 두 글자 새겨진 ‘오리지날’ 명상용품이 있어야 명상이 더 잘
될 것 같은 유행의 심리.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어쨌든 나도 잠시 눈을 감고 강의의 시작을 기다렸다.

쿠마르가 강단에 서기 전, 두 사람의 생태이론가가 먼저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최근 <질서정연함 속의 자연 The Nature of Order>라는 세 권 짜리 두꺼운 책을 내기도 한 영국의 생태건축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그리고 유기농을 연구하며 미국에 살고 있는 수녀 미리암 맥길리스. 두 사람의 강의는 모두 전문적인 경험과 깊이있는 지성에서
비롯된 흥미로운 것이었다. 비록 내가 두 사람이 구사하는 고난이도의 유려한 영어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의심은 되지만…
특히 마이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채 개미와 같은 목소리로 띄엄띄엄, 하지만 일단 입을 열면 번개같이 빠르게 한 단락을
통째로 얘기하던 알렉산더의 강의는, ‘유기체 생명활동의 패턴과 현대건축’이라는 정말 흥미만점 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나마 프로젝터를 통해 사진 자료를 많이 볼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강의가 끝난 후 기진맥진한 내 얼굴을
보고 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왼쪽부터 사티쉬 쿠마스, 미리암 맥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유기체의
생명분할 구조와 건축활동의 연광성에 대해 설명한 알렉산더 아저씨의 강의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라는 제목의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데 너무 두꺼워 보여서
좀 짧은 걸로 다시 찾아봐야겠어요.
ⓒ 미루

“왜 그래 강의는 재미있었어 “
“어… 사진은 재미있었어. 얘기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그랬구나! 나도 잘 안 들리는 구절이 있었는데 너는 더 힘들었겠다. 내가 이해한 대로 강의 내용을 설명해줄까 ”

내가 영국에 사는 ‘운 좋은 외국인’ 클럽의 주요 멤버라는 얘기는 이미 했다. 브라보!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의 집과 건물, 도시의 구조는 직선과 직각에 둘러싸인 채 자연의 호흡과 즐거움을 잃어버렸다는 문제의식에서
알렉산더의 아이디어는 시작된다. 옥스포드 대학 연구팀이 촬영한 나비 날개짓의 무지개색 파장을 보여주며 시작된 강의는, 인간태아의
세포가 배아상태에서 어떻게 꿈틀거리며 생성되고, 변형되는지 비디오로 찍어 보여주기도 하고 에딘버러의 고지도를 화면에 커다랗게
띄워놓고 스코틀랜드의 중세 도시로서 에딘버러가 계획되고 변형되어온 모습을 설명하기도 했다. 세포분열과 에딘버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건축과 자연의 생명활동을 연결시킴으로써 그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평생을 그 속에서 보내는 건물들은 딱딱한
직선과 경제적 효율성의 공학 대신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철학 위해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위해 나는 예전에 무척 아름답다고 느꼈던 우리나라의 고지도를 떠올렸다. 3백년 전 지도 속의 서울은
인간에 의해 점유된 오로지 ‘땅값’으로만 그 가치가 매겨지는 죽은 도시가 아니었다. 산이 있고 그 사이로 내가 흐르고 그
안에 집과 시장이 있는 자연과 공생하는 도시였다. 그 서울을 다시 살리는 실질적인 방법은 도시계획을 다시 짜서 수백 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건물의 배치와 구조를 바꿔가는 일일 것이다. 그런 꿈을 가진 사람들을 돕기 위해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현미경
속을 들여다보고 새들의 날갯짓과 나무뿌리가 뻗어가는 모습을 관찰한다. 그리고 정밀한 공학의 언어로 자연의 생명활동을 번역해간다.
아, 이건 정말 멋지잖아!

그러나 어쨌든 그날 더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더듬더듬, 웅얼웅얼 강의를 이어나간 알렉산더가 아니라 성우같은 목소리로
정연하게 유기농의 정신적 기반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밝힌 수녀 미리엄 맥길스였다. ‘우리 서구인들에게…’로 시작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치 대학 신입생으로 돌아가 서양철학입문 수업을 듣는 기분이 들었다. 지루했다는 뜻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미안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훌륭한 강의도 때로 지루할 수 있다.

‘생명의 생성활동에 있어 칼슘이니, 거름이니 하는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작용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감각과 본능을 통해
이야기하는 우주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할 때, 2천만 년 전에 묻힌 죽음과 탄생의 시를 지금 내 발 아래 흙 속에서 발견할
때 비로소 유기농의 우주론은 시작됩니다.’
그렇다. …아멘.


▲ 중형 체육관 수준의 커다란 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빼곡히 메웠습니다.

대부분 영국 사람이었지만 중간 중간 독일어
억양과 인도 억양을 들을 수 있었어요.
ⓒ 미루


이 강의가 끝났을 때 나를 제외한 9백9십9명의 유럽태생 청자들은 거의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형이상학적인 내용, 아름답게
균형을 이룬 문장, 유럽 사람은 연설과 언설에 약하다더니 정말이었다. 그녀는 강의 도중 ‘토마스 베리 Thomas Berry’라는
사람의 이름을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20세기의 가장 심오한 생태철학자 중 하나라는 이 사람의 책을 나중에 읽어봐야지, 결심하며
휴식시간을 맞았다.

이 자리에 참가하기 위해 우리 돈으로 4만원이 넘는 참가비를 냈지만,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강의도 강의였지만
휴식시간에 강당 안을 돌며 수십 개나 되는 환경단체들의 부스를 찾아다니며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자료를 받고 관련된 책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슈마허 칼리지와 생태잡지 <리서전스Resurgence>, 채식주의와 동물복지 단체, 유기농
본부인 ‘흙을 생각하는 사람들 Soil Association’을 비롯, 자연을 보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녹색은행 ‘트리오도스
은행 Triodos Bank’, 환경운동가들을 위한 법률 자문 단체 ‘환경 법률 위원회 Environmental Law Foundation’
그리고 쓰레기 분리수거 및 재활용 캠페인과 다양한 명상 프로그램들이 부스를 차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여행할 때 그
지역 분위기를 느끼려면 재래시장을 찾으라고들 한다. 강당 한 편에 줄을 이어 선 부스들과 사람들의 활기찬 행렬은 영국 환경운동의
정보가 모이는 최고의 시장이었다.


▲ 영국 유기농 운동을 주도하는 그룹 ‘Soil Association’의
부스 얼마전 에서 유기농 식품이 보통 농산물보다 영양가가
떨어진다는 보고를 읽고 관심이 많아진 나는, 자료를 집으로 좀 보내달라고 이곳 부스에 신청을
했습니다.
ⓒ 미루

나는 우선 슈마허칼리지 부스에 들러 데본에 있는 칼리지본부에서 내년에 어떤 프로그램이 열리는지 알아본 뒤 천천히 여러 부스를
돌며 얼마 전에 신문에 난 ‘유기농 야채 영양가 오히려 떨어진다’는 기사에 대한 의견을 묻고 쓰레기 분리수거가 제일 잘 되는
영국 도시가 어딘지 물어보기도 하고(영국은 분리수거 낙제국이다) 과월호 <리서전스>도 두 권 샀다.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양손 가득 쇼핑백을 거머쥐고 나오는 것보다 뿌듯한 기분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자리가 있다면! 유기농부들과 환경은행
사업가들과 그냥 관심있는 대학생, 아줌마들과 <녹색평론>과 이장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며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이런 자리가 분명히 생길 거라고 생각하며 혼자서 행복해했다.

드디어 마지막 쿠마르의 강의가 시작될 시간. 그런데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치 수다스러운 옆집 아저씨같은 쿠마르
씨의 목소리! “영혼과 정신의 힘이 없는 종교와 정치, 경제의 구조를 향해 확실히 ‘잘못됐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수십 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와 의심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천진함이 뒤섞여 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강조하며 이리저리 강단 위를 걸어다니고 손짓과 발짓을 섞어서 보는 사람이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그의 강의는 한 마디로 넘치는
기로 충만했다. 사람들의 웃음이 잦아들면 금세 이야기가 이어졌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어서 탐스럽게 꽃을 피운 정원의
오렌지 나무는 올해가 작년 같고 작년이 내년 같지만, 봄이 되면 어김없이 ‘신선하다!’며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습니까. 새로
태어난 아기도 내가 태어났을 때랑 똑같고 우리 할아버지가 태어났을 때랑 다를 게 없지만 아기들은 언제나 신선함과 새로움을
세상에 전해줍니다. 자연은 반복되지만 결코 새로운 힘을 잃지 않으며 우리 생명의 터전인 흙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흙에서부터 나오는 법! 내가 언제나 바라는 것은 ‘흙으로 일군 세상 Soil Society’ 입니다…

마지막으로 쿠마르를 포함한 세 사람의 강사에게 자유롭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으로 슈마허 강의는 막을 내렸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음악과 간단한 스낵이 마련된 가운데 사람들이 서로 사귈 수 있는 파티가 열린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나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타라는 언젠가 한 번쯤 찾아오라며 주소와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부적응 학생을 위한 대안학교에서
일한다고 했다. 열 살,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두 아이를 데리고 온 아빠와 독일어 억양이 묻어나는 나이 지긋한 신사, 매력적인
금발의 아가씨와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모나미 볼펜’을 귀에 꽂은 까불까불한 청년까지 슈마허 강의를 찾은 다양한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좋아, 언젠가 서울에서도… 긴 여행이 남아있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 이 글은 월간<이장>(http://www.e-jang.net)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admin

국제연대 활동소식의 최신글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