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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삼류 영웅들의 환경에 관한 농반 진반





진지함과 가벼움, 정통과 아류의 경계가 사회적인 통제력을 상실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문화의
영역에서 그것은 이미 유행을 넘어서는 구조화의 물결 속에 있기도 하다. 싸구려 영화들이 보여주는
진정성의 ‘아우라’에 우리는 가끔 놀란다. 단행본 출판시장에 나오지 못하고 대본소에 진열되는
공장만화들 가운데서도 우리는 가끔 진진한 문제의식을 접하고 당혹스럽다. 만일 우리가 스티븐 시걸과
구영탄에게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어째서 삼류 깨달음에 불과한 거라고 자기검열해야
하는가.
스티븐 시걸은 미남이 아니고 연기력도 별로이며 출연영화들은 엉성한 시나리오에 돈 안들이고 찍은
그야말로 B급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시걸에게서 우리 만화 대본소 시장의 공인된 영웅
가운데 하나인 구영탄의 모습을 본다. 왜? 그것은 이 둘이 소유한 같은 속성, 그러니까 키치적
감수성 때문이다.
구영탄은 주류와는 거리가 먼 반영웅의 표상이다. 멍청하고 순수하며 늘 손해보는 인간형이다. 그가
영웅이 될 소지는 요즘 구영탄 시리즈의 큰 제목인 ‘악질’ 시리즈에서 그려지듯 그의 엄청난 무력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성정포악에 윤리·도덕과는 담 쌓은 욕망과 1차원적 자존심의 존재인 악질
구영탄은 시리즈의 하나인 <골 때리는 악질, 2002>에서 악질 깡패두목이었다가 사랑하는
여자의 선도를 받고 전국 쓰레기 배출량을 10% 이상 줄이는 일등공신이 되어 한국의 환경을 구하고
자신의 인생 또한 구하는 영웅으로 나온다. 겨우 쓰레기 줍기나 잘 하는 걸로 영웅이 된다는 전개가
환경문제를 너무도 단순화시키는 웃기는 발상으로도 생각되지만 그래도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건 바로
그 순진성 때문이다. 환경문제가 곧 쓰레기 문제라고 믿는 순진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폭력이라는 수단이 정당화되어도 좋다는 단순한 믿음이 복잡계의 미로 속에 빠져버린 환경문제의 한
해결책으로 감성적인 호소력을 가지게 하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스티븐 시걸의 데뷔작인 형사 니코 (Above the Law,1988) 에서부터 최근작하프 패스트
데드 (Half Past Dead, 2002) 에 이르기까지 시걸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주류에
대한 반동성이다. 그는 늘 변두리 인생들 속에 속한 반영웅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는 정의롭지만
정치적으로는 무력한 변두리 액션왕일 뿐이다. 그는 대부분의 블록버스터 액션 스타들이 보여주는
만들어진 조금도 사실감 없는 곡예적 액션과는 차별적인 사실적인 액션을 보여준다. 그걸 무기로
주류를 한 순간에 치졸한 떼부자나 부정의한 악당으로 역전시키고 통쾌하게 부숴버린다.
시걸은 두 편의 환경 소재 영화를 찍었는데 1994년 작, 죽음의 땅 (On deadly Ground)과
1997년 작 화이어 다운 빌로우 (Fire down below) 가 그것이다. 죽음의 땅에서
극 종반의 환경론 장광설은 극과 따로 놀아서 전혀 감동적인 울림을 주지 못하지만, 굉장하지 않은가.
B급 영화의 B급 배우가 들려주는 환경설교라니. 화이어 다운 빌로우에서 시걸은 독성페기물을 무단폐기하는
악덕기업을 혼내주는 미연방환경부 (EPA)의 조사관으로 나오다. 여전히 시걸의 액션과 멜로가
영화가 공식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주제인 환경보호보다 두드러지지만 흔한 삼류 액션영웅으로 알던
시걸이 이런 유의 의식있는 체 하는 영화도 찍었다는 걸 알면 갑자기 정다운 느낌마저 든다.
‘환경부 조사관’ 시걸은 전형적인 영웅, 말하자면 미션 임파서블 2의 톰 크루즈와 같은 ‘진지한
영웅’이 아니다. ‘악질’ 구영탄은 사자처럼 새벽을 노래하고 연인을 위해 자신을 끝 없이 비워내는
천국의 신화가 되어버린 ‘진지한 까치’가 아니다. 그렇더라도 오늘날 대중의 이름으로 불리는 익명의
사람들 가운데 틀림 없이 대다수일 것인 저 많은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방식으로 넌지시 “나
삼류야, 못 났지만 그래도 이런 문제가 중요하다는 건 알잖아” 라면 말 건넨다. 이
반영웅들의 유치찬란한 개인기를 ‘값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키치는 전복하는 힘이다. 주류의 인식으로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환경문제도 들어있다.
삼류들의 발상이 존중받지 못할 까닭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진정성을 출신성분으로 재는
논리만큼 우습다. 애써 찾아보길 권하고 싶진 않으나 보게 되면 편견 없이 볼 일이다. 깨달음은
도처에 편만하다.

글 : 박현철 (함께사는길 전 편집장, 국정정책대학원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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