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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영광댁 사는 이야기 – 성지(聖地)

열흘 동안 장맛비가 내리붓다가 가끔씩 무더위와 함께 햇빛을 내비치는 요즘이고 보니 빗
줄기만 없어도 좋은 날씨 축에 낀다.

매운 약발 한창 차오르는 고추나무 키가 허리께까지 감아오르고 벌써 붉은 고추 한두개 따면
서 오져(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던 어머니는 요사이
“오메 하늘님도 비 좀 그만 내려주시제. 고추 다 잡아먹었당께”라며 울상이다. 가지마다 휘어
지게 고추를 매달고 있더니 아마도 장맛비에 고추 속도
골고 어머니 맘도 곯아내린다.




일러스트레이션 | 경연미


새벽참에 삽자루에 우비 챙겨입고 논에 물꼬 트러 가신 아버님은 아침 때가 돼서
야 “징헌 놈의 비” 하시며 들어서신다.

오전참에 원불교 성지에 갈 일이 있던 터에 ‘성지 기운 받고 오자’는 욕심까지 챙겨본다.

비는 멈추고 흰구름떼가 감싸안은 옥녀봉과 주변의 크고 작은 산들이 신령스런 기운을 더해준
다. 영광 지명인 신령스럴 영(靈)에 빛
광(光)자가 실감나는 풍광이다.

88년 전 원불교가 생겨난 종교적 발상지를 갖고 있는 곳이 영광이다. 영광 자랑 더하자면 그
뿐이랴? 백제 불교의 최초 도래지로 꼽히는
법성항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

그러나 최근 얼마간 인터넷이나 사진, 지역신문 기사로 접했던 상식 이하의 일들이 떠올라 마
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핵 폐기장 후보 터 부근 주민들이 유치 집회를 한 뒤 ‘상생, 평화, 환경, 생명’을 되살리
기 위해 기도 등 종교적 방법으로 ‘에너지
정책’ 전환운동을 벌이고 있는 원불교 성지에 위치한 영산원불교대학교 일대에 들어가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계절학기 수업 중이던 예비 교역자(원불교대학교 학생)와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원로 성
직자들은 3시간여 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다.

수업 중이던 교수는 전화를 통해 현장 상황을 급박하게 전했고 건물에 갇혀 수업받기를 포기
한 학생들은 인터넷을 이용해 청와대부터 영광군
홈페이지까지 소식을 올려 종교성지 난입, 폭력사건은 세상에 빠르게 전해졌다.

백수 길룡리란 아주 작은 마을에 초라하리만치 소박하게 자리잡은 종교 성지가 사람들의 물욕
에 의해 이리저리 짓밟히는 모습은 영광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원불교는 물론 종교계에서도 공동성명들이 줄을 잇고 있다. 더욱 가슴 답답한
건 관련회사 간부급 직원들이 버젓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사진들이다.

종교 성지가 “세상과 나몰라라”하고 고요하거나 청정하기만 하기를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성난 사람들의 분풀이 대상은 더욱 아니지 싶다.

비가 온 탓에 터럭 하나 없이 깔끔한 시야가 초록세상으로 물들어가는 길룡리 들녘을 거짓 없
이 보여준다. 아픈 기억을 말끔히 털어버리고픈 듯
말간 기운 전하는 성지 모습에 홀려 덩달아 잠시 세상의 시름 놓아본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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