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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 Peace] “상황이 나아졌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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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iya Fedorivna Ogievych


생년월일 :: 1967 4 23


가족 :: 남편과 1989년과 1995년 사이에 태어난 세 명의 아이들



 


2011년 현장 여행 동안 그린피스 인터내셔널 팀에 의해 표본 추출된 0.5리터의 우유는 우크라이나에서 허용한 방사능 허용 한도의 6.5배 이상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팀은 표본 우유를 제공한 Ogievych 가족의 집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우크라이나 북서쪽 마을인 Drozdyn에 있는 그 가족의 집은 앞 마당이 키가 큰 원형 건초 더미로 장식되어있다. 집에 다가가면서, 감마 분광계의 특유한 경보기 소리가 났고 그것은 줄어들지 않았다. 건초 더미는 세슘-137을 포함하고 있었고, 주변보다 여섯 배나 높은 방사능 수치까지 가지고 있었다.


 


Nadiya Ogievych는 감마 분광계 소리를 담담하게 듣고, 그녀의 소들을 위한 음식을 슬픔이 담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이 건초는 약 6~7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마을 가까이에서 모아왔다. 다른 장소는 이곳에서 약 1킬로미터 거리의 늪지대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우리가 6월에서 7월에 필요한 건초를 모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들이다. 우리도 이전에 측정해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방사선 수치가 높고 오염된 것임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겨울에 우리 소들을 위한 건초를 모을 다른 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늪지대 또한 방사성 핵종을 축적하고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오염된 지역에서 수집된 식물을 건초로 사용하고 소에게 주식으로 주고 있다면, 방사성 핵종은 동물에게도 축적될 것이고, 그에서 나온 우유에도 전이될 것이다. 만약 그 우유를 사람이 마신다면, 사람의 몸에 오랜 시간의 방사능 축적이 이루어져 많은 심각한 질병에 이르게 될 수 있다.


 


나 또한 영향을 받고 있고, 내 몸 속에 있는 방사능을 치료하는 과정에 있다. 나는 체르노빌의 대재앙의 결과로 공식적으로 밝혀진 방광 문제를 가지고 있다. 나는 체르노빌로 인한 환자로 인증 받았다. 나는 신장 하나를 잃었다. 남아있는 하나도 방광염에 감염되었다. 나는 치료를 위해서 때때로 Rivnenska Oblast의 수도인 Rivne에 간다. 나는 그곳에서 병원에 머물면서 약을 받아온다.”


 


체르노빌의 대재앙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우선, 나의 세 자녀의 건강에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병약하고 굉장히 심각한 두통에 시달린다. 또한 그들은 혈액 순환 문제에 기인한 혈관 긴장 이상을 보인다. 나 역시 같은 고통을 받고 있다. 우리 가족은 우리 내부의 방사능 수치를 측정하기 위해 항상 Rokytne에 있는 병원으로 간다. 우리는 항상 인체에 허용된 양을 초과한다.”


 


이들처럼 생존한 농민들에게 대재앙 이후, 그들의 삶의 방향의 변경은 선택이 아니었다.


 


우리의 하루 일상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우리는 농작물을 재배하고, 우리가 기른 모든 것을 먹는다. 우리에게는 식량을 얻을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할 딸기 류의 열매들과 버섯을 채집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방법이고 우리가 돈을 버는 방법이기도 하다.


 


 시장에는 우리가 우리 음식의 방사능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제품이 한계를 초과하면, 그들은 판매를 허용하지 않는다. 과거에 나는 많은 버섯을 팔았었지만, 지금은 많은 부분을 판매하지 못한다. 내가 제품들을 가지고 왔을 때, 가끔은 높은 수준의 방사능이 추출되어 판매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도 있다. 때때로 우리는 공중 위생 시설로부터 그들이 제품들의 방사능 수준을 검사한 목록을 받는다. 우리 제품들은 항상 허용된 수준을 넘어서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여기에 협력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Nadiya에게 그녀가 체르노빌 대재앙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았을 때를 기억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전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에는 충분한 정보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했다.


 


모두들 공황 상태에 빠졌었다. 모두가 일년 내에 죽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위험하고 끔찍한 뭔가가 이곳에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체르노빌 대재앙 이후 25년이 지났고, 어떤 사람들은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는 이제 아무 문제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Nadiya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 Nadiya는 겨울의 끝을 고대하고 있다.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를 수용한다. 겨울은 겨울이고, 여름은 여름이다. 이것이 자연이고 나는 그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Mykola Isaiev


생년월일 :: 1955 4 29


가족 :: 아내와 1981 1985년 태어난 두 명의 아이


 


Mykola Isaiev 1986년 체르노빌 사고의 결과를 정리하는 담당자 중 하나였다. 그는 1977부터 1991까지 체르노빌에서 일했다. 오늘날 그는 극심한 알레르기, 천식, 국소 빈혈, 췌장 당뇨병과 간염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는 약 2개월마다 병원에 입원해서 몇 개월을 머문다.


사고 전날, 내 근무시간은 오후 8시에 끝났다. 다음날 아침, 나는 집에서 손상된 원자로를 보았지만 여전히 출근했다. 모든 사람들이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우리가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운영에 있어서는 좋은 긴급 서비스가 있었다.”



Mykola
가 직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실제로 나쁜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의 가족에게 전화해서 나가라고 하려고 노력했지만 모든 전화 연결이 끊겨있었다..



 
“4
27일에 우리 가족은 그들을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안전 복을 입은 특별 피난 팀에 의해 Pripyat에서 나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방사능이 옅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다. 나의 아내가 그들이 탄 버스가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마을 마다 멈추었고, 그녀는 그곳에 살아도 되는지 요청해야 했다고 나중에 말해주었다.”



 
그는 그의 가족들의 행방을 문의하러 4월 말에 Kiev에 갔을 때, 그의 아내와 두 명의 아이들의 이름을 어느 목록에서도 찾지 못했다. 운 좋게도 체르노빌 공장의 사장은 그의 가족이 그를 찾고 있음이 적힌 편지를 그에게 주었고, 결국 어떤 교통수단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5월에 그는 짧게나마 그의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어떠한 건강 검사도 받지 않았다. 나의 할머니가 발코니에 자신의 옷을 보관하고 있었다. 나는 화가 났고, 공장에 머무르며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것을 돕는다는 서류에 서명할 것을 강요 받았다. 그와 동시에 나의 가족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보장받았다. 그러나 정부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병원은 그들에게 약간의 음식과 비타민을 주었을 뿐이다. 의사들은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피난자들은 내부에 있기를 권고했다. 사람들은 방사능에 노출된다는 것의 결과를 잘 알지 못했고 그 지역에 있었던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했다.”



 
Mykola
는 그의 업무를 계속하기 위해 체르노빌로 돌아갔다. 6월 말에 이 일을 하는 동안 그가 받은 방사선의 양은 매우 높아서 그의 눈, 코와 폐를 화상으로 고통스럽게 했고, 그는 잠깐 떠나 보내졌다. 이 때, 그와 그의 가족은 Kiev에 아파트를 얻기로 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아파트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Boris Yeltsin이 도착했을 때, 엄청난 대기 열을 보고는 그들은 모두 즉시 아파트를 지급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하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나는 내 손에 아파트 열쇠를 쥘 수 있었다.”



최대한 그들의 개인적인 소유물들을 염려하면서, 그는 단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인 James Fenimore Cooper‘The Last of the Mohicans’와 가족들을 위한 냉장고만을 구해왔다. 냉장고가 안전한 것처럼 여겨졌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코니에 보관하는 것을 선호했다.


 Mykola는 정리 담당자로서 그의 작업에 대한 많은 메달을 받았으나 이것들은 일상 생활에서 그를 돕지는 못했다.



 
“2011
년부터 정리 담당자는 무료로 공급되는 약을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우리는 우리 약에 대한 값을 지불해야 한다. Kiev에 거주하는 4,800명의 정리 담당자들 중에 단 1%만이 재활을 받게 된다. 45,000명의 사람들은 여전히 영구적인 아파트를 할당 받지 못했고, 그 중 15,000명만이 공식적으로 체르노빌 피해자로 인증 받은 사람들이다. 현재 정부는 우리에게 부여된 모든 혜택을 취소시키고 싶어한다. 헌법 제 16조에는 국가는 체르노빌 대재앙의 결과를 극복하는 것을 의무로 하고, 이것은 체르노빌 사건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 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명시한다. 이것은 서면으로는 좋은 법이지만, 시행적인 면에 있어서는 전혀 이행되고 있지 못하다.”



 
체르노빌 피해자의 권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Mykola는 다양한 NGO와 일을 시작했다. 1991, 그는 체르노빌 피해자 조합을 설립하고 대표가 되었다. 오늘날, 그는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해 1998년 설립한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인민 당사국의 부대표이다.


 (원문보기)


번역: 환경연합 번역자원활동가 강혜인(style_k@naver.com
      “친구 한명이 매우 환경과 동물에 관심이 많아서 매일 얘기를 듣다보니 저도 관심이 많아졌답니다~ 이렇게 조그만 일이라도 도움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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