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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새싹들 ” 줏대 세우마”

풀뿌리 새싹들 “줏대 세우마”

사진/
6·13지방선거에 출마한 부문별 후보들은 차별화된 선거운동으로
지지를 받았다.

6·13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이색 당
선자들…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줄 건가

16강 세리머니는 감동적이었다. 푸른 그라운드를 손 맞잡
고 달리던 선수들이
관중석을 향해 미끄러지듯 몸을 낮춰 인사했다. 승리를 안겨준 운동장과
승리를 응원해준 관중들을 향한 멋진
답례였다. 비록 열띤 관중은 없었지만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풀
뿌리 당선자들 역시 한국대표 선수단과
마찬가지 심정이다. 48.9%라는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으나 어느 때보다 시
민·여성·환경·노동자·농민의 깃발을
든 기초의원 후보들이 대거 출마해 약진한 선거였다. 돈선거·조직선거라
는 독초들의 마당에서도 건강한 희망의
싹이 움터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책개발에서 선거운동
에 이르기까지 기존 정치와 차별화를
이룬 ‘풀뿌리 대표선수들’의 당선비결과 포부를 소개한다.

환경
경기 고양시는 녹색 해방구

각각 화정1동 화정2동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한 김달수(35), 김혜련(26)씨.
2002고양시민행동의 추천후보이자
고양환경운동연합 상근활동가인 두 사람은 나란히 녹색바람을 일으키며 승
리했다. 환경후보답게 돈도 거의 안
썼다. 홈페이지에 ‘선거비용 유리지갑’이라는 코너를 마련해 매일매일
쓴 돈을 공개한 김달수씨는 사무실 비용,
기탁금, 법정 홍보물 제작비 등을 포함해 모두 800만원 안팎을 쓴 것으로
집계한다. 후보 밑으로 들어간
돈은 밥값과 차비뿐이다. 그는 아파트 앞마당이나 마을버스에 동승해 환경
호르몬이 밥상에 끼치는 영향, 폐형광등이
우리를 어떻게 위협하나 등을 알리는 테마 유세를 했다.

옆동네에서 출마한 김혜련씨도 마찬가지다. 주민들이 1만원씩 ‘빌려
준’ 돈으로 법정 기탁금을 마련한 김씨는
76년생으로 전국 최연소 기초의원 당선자다. 합동유세 당시 상대 후보에게
서 “예쁜 아가씨”라는 호칭을 들으며
경쟁자로 대접받지 못했지만 “못생긴 아저씨보다 예쁜 아가씨가 낫다!”
는 유권자들의 자발적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특히 “고양시가 왜 베드타운으로 취급돼야 하는가, 그건 직장 남
성의 시각이다. 수많은 주부·어린이·청소년·어르신들이
하루 종일 지내는 공간이다”라고 문제제기해 여성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
았다. 자전거를 타고 선거구를 누비며
재미있는 선거운동을 했다는 김혜련씨는 고양환경운동연합 회원사업부장이
라는 현직을 유지하며 시의정 활동을 할
예정이다. 전국적으로 환경운동연합이 지지한 기초의원 후보는 39명, 이
중 15명이 당선돼 녹색 주민자치
시대를 선포했다. 고양시는 시의원 33명 가운데 8명이 녹색의원이다.

농민
모종 하면서 축하인사 받네

선거 다음날에도 보리 모종 내느라 축하전화 받을 새 없이 바쁜 김종성
(35)씨. 그는 이제 전북 부안군의회
농민의원이다. 전농 전북도연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낸 17명의 농민후보
가운데 김씨를 비롯해 진안 부귀면
손종엽(40)씨 등 4명이 기초의원으로 당선했다. 서울에서 대학 졸업한 뒤
10살 때부터 살던 제2의 고향
부안으로 내려와 줄곧 농사를 지어온 김씨는 지난해 쌀값 파동을 겪으며
농민의 이해를 대변해줄 지방의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가 사는 부안 계화면은 농민이 60%, 어민이 40%다.
김씨는 “새만금사업 등 정치적인
문제가 불거질 때면 일부 정치꾼들의 목적에 따라 줄곧 농민과 어민의 이
해가 갈리는 것처럼 취급받아왔다”며
“농사 짓고 고기 잡는 사람들을 대변하겠다”고 말한다.

지난 98년 지방선거까지만 해도 전북도연맹은 정당조직의 내천을 받은 기
초의원을 지지했다. 전북도연맹 조경호
사무처장은 “농민회의 풀뿌리 정치활동은 이제부터다”라며 “이번에 아
깝게 떨어진 분들이 많지만 다음번 선거에는
훨씬 더 많은 농민의원들을 배출해내겠다”고 말했다. 김종성씨는 군의원
으로 활동하는 동안 농사일을 좀 줄여야
할 형편이지만, 뒷집 사는 아버지랑 이웃 어르신들은 “4년 동안 대신 지
어줄 테니 걱정 말고 일보라”며
그의 등을 두드린다.

노동자
서민의 자존심 지켜냈다

국회의원만 총각의원이 있는 건 아니다. 서울 고척2동에서 구의원으로 당
선된 홍준호(31)씨 역시 짱짱한
미혼이다. 노동자·서민 후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출마한 홍씨는 서울에서
기초의원으로는 유일하게 당선돼 민주노동당의
‘슈팅 스타’로 떠올랐다. 고척2동에 사는 윤아무개(38·건설노동자)씨
는 홍씨의 당선을 놓고 “강남처럼
잘사는 동네가 아니면서도 늘 수구보수 정치인들의 텃밭처럼 취급돼온 고
척2동의 ‘자존심을 지켰다’”며 “구로동·개봉동
사람들도 부러워한다”고 자랑한다. 홍씨는 “구의회가 건설브로커, 부동
산업자 등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이 아니라
사심 없는 지역 일꾼의 활동무대가 돼야 한다”고 역설해 큰 호응을 받았
다. 그는 ‘여성들이 몰표를 줬다’는
일각의 설에 대해 “총각이라서가 아니라 생활협동조합 활동, 아파트자치
활동, 공동보육시설 푸른교실 운영
등을 해온 덕분”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부산의 기초의원 당선자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은 해운대구 좌동의 김용
일씨. 고졸 중퇴 학력에 트레일러
운전사 출신인 김씨는 ‘노동자 구의원 시대’를 열었다. 해운대구 좌동
은 인구 11만명의 신시가지다. 그러나
도서관, 복지시설, 병원 등은 턱없이 부족하다. 부산시가 일반회계로 잡
혀 있던 이 예산을 아시안게임 등을
핑게로 은근슬쩍 특별회계로 돌렸기 때문이다. 이를 반대하는 활동을 하
던 김용일씨는 아예 예산을 짜보겠다며
구의원에 뛰어든 것이다. 올 1월 출마 결심을 굳힌 그가 믿은 것은 튼튼
한 두 다리. 김씨가 열심히 발품파는
동안 동네 전교조 조합원들과 철도공무원들,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두 팔
걷고 그를 도왔다.

여성
살림 솜씨로 풀뿌리 챙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당의 공천 과정에서 여성후보들이 줄줄이 탈락하는
‘구태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지만,
공식적으로 정당의 그늘 밖에 있는 기초의원 선거에서는 여성후보자들이
좋은 성적을 거뒀다. 밀어주는 조직도
없지만 방해하는 조직도 없었던 탓이다.

세 번째 도전 끝에 용인시의원으로 당선된 주경희(32)씨는 44.5%의 득표
율로 남성후보들을 멀찍이 따돌리고
압승을 거뒀다. 주씨는 무료 취업알선센터를 만들어 실업극복 활동을 펼쳤
고, 저소득·실직가정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 학습지도·무료급식 학교인 푸른학교를 꾸려오는 등 4년 전 선거
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시의원은 아니었지만 시의원 못지않은 지역활동을 한 것이 당선의 밑거름
이 됐다. 올해 1월 출산해 젖먹이
아이가 있는 주씨는 “용인시에 아직 보육조례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
며 “김선미·박순옥 등 이번에 당선된
동료 시의원들과 손잡고 여성과 소외된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겠다”는 포
부를 밝힌다.

서울 양천구의원으로 당선된 이현주(42)씨는 한국여성민우회가 조직적으
로 민 여성후보 가운데 한명이다.
지난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이씨는 중앙선거관리위원
회 여성 정치지망생 연수과정을 거치며
“여성이라서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당선 결과를 놓고
“여성이라서 더 유리했다”고 자평하는
이씨는 “여성의 시각으로 주민자치, 생활정치를 실현할 일은 많다”고 말
한다. 당장 동네 아파트 옆 시유지
활용 문제를 놓고 구청과 목6동 주민들의 이해가 맞붙을 것 같다.

시민
주민의 힘으로 시정을 바꾸마!

경기 하남시의원으로 당선된 홍미라(39)씨는 후보추대 과정에서부터 ‘시
민의 힘’을 내보인 인물이다. 하남시의
직장인·주부·예술인·교수·학생·종교인·사업가·교육인·체육인·의
료인 등은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시민후보 추대를
위한 100인 위원회’를 꾸려 후보자를 골랐다. 이들이 고르고 고른 후보
가 바로 홍씨였다. 하남 민주연대
운영위원인 홍씨는 하남 신장2지구 택지개발사업을 둘러싼 비리와 맞서 싸
워왔다. 에코타운 특혜규명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주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부당이득을 특혜기업이 챙기
는 것을 막자는 주민감사청구운동.
홍씨 이름 석자는 몰라도 에코타운 운동을 잘 알던 주민들은 “그 운동을
한 사람이라면 믿을 만하다”는 공감대를
보냈다. 홍씨는 두 아이의 엄마로 방과후 대안학교인 민들레학교를 꾸려오
기도 했다. 그의 시의회 진출로 하남시민들은
저소득·맞벌이 자녀들의 육아문제를 시의회가 정신차리고 해결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한국청년연합회(KYC)의 공식후보였던 고명종(35)씨는 충주시의원으로 당
선됐다. 지난해부터 무소속이던
시의원·도의원마저 줄줄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모양을 본 고씨는 지방정
치의 정체성을 놓고 “밤잠 설치며 고민한
끝에” 출마를 결심했다고 한다. 동네과수원(관주과수) 작목반장이라는
‘현직’으로 한나라당 내천을 받은 유력한
상대후보를 가까스로 제쳤지만(1차 개표 동점, 재개표 16표차), 그가 내
건 “시의원다운 시의원” 슬로건이
나래를 펼 날은 이제부터다. 과수원 작목반장 일을 계속하며 시 의정활동
을 할 고씨는 세 딸 한별·한결·한글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4년을 보내겠다고 다짐한다.

“우리 동네 살림은 우리가 한다”는 깃발을 내걸고 맨주먹으로 선거에 뛰
어들어 값진 성과를 거둔 환경·농민·노동자·여성·시민
대표들은 지방정치의 빛나는 선수들이다. 풀뿌리 정치에 대한 꾸준한 믿음
과 용기를 기반으로 이들이 펼쳐보일
본경기가 기다려진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한겨레21 6.2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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