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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반대 – 오영숙 수녀

오영숙 수년에게 갯벌은 생
명이자
어머니로 다가온도 그 갯벌이 별들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에 병마와 싸우면서도 엄청난
열정과활동력을 발휘한다. 성북동 달동네에서 나눔의 삶을 실천하
고 있는 오영숙 수녀. 그녀에게
생명과 평화 나눔은 동일한 의미다.

나눔으로 더 강해진 생명력 병마도
그녀를
붙들지 못해

2000년 한국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새만금 간척사업 현장
체험에 참가한다.

새만금 갯벌.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 동진강과 만경강
의 독특한 2개 강
하구 갯벌이다. 파괴되면 복구하는 데 8,000년이 소요되는 생태계의 커
다란 생명 정화조.

그 갯벌이 간척사업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측량할 수 없
는 무한한 가치가 인간의
유한한 욕심 때문에 사라질 위기에 있다.

그 엄청난 사실을 몰랐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충격. 하
지만 알아도 파괴는
진행되는 어찌할수 없는 괴로운 현실. 암의 진행을 바라보는 것과 같
다.

암의 진행은 막아야 한다. 함께 한 수녀, 환경운동가 지
역주민들과의 안타까운
활동이 밤낮으로 계속된다. 국회로 세종로로 그리고 현지로. 난소암을
앓은 지 1년이 조금 지난 때였다.

피난을 왔지만 어려움이 없었다. 어머니는 엄격하지만 정
이 많고 나누기를 좋아했다.
말이 없지만 무섭지 않았던 아버지. 안정된 가정.

어린 시절 무서운 오빠는 밖에 나가 못 놀게 했지만 결국
엔 논다. 도중에 그만두면
시원하지 못하다. 하고 싶은 것은 끝을 본다. 뜨개질도 밤새 한다. 중학
교를 고무줄 뛰기로 들어갔다는
놀림을 받기도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위 수술 후 생명이 위독한 적
이 있었다. 피난 길에
아버지와 헤어지고 4남매를 데리고 나오면서 산에서 굴러 막내 딸(오영
숙 수녀)을 낙태할 뻔한 어머니.
월남하면서 밀고자 때문에 고문까지 받는다.

어머니는 죽음과 삶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희망의 대상
이다. 늘 아픈 어머니.
당신이 죽으면 어린 막내딸이 불쌍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자주 한숨을 쉬
었다.

고3 때 아버지 사업 실패로 대학진학은 포기했지만, 예비
고사는 치렀다.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던 아이는 어느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성인이 되어간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면서 아버지의 중풍을 맞는다.

회복에 대한 의지는 대단하셨다. 벽에 나무판을 대고 재
활훈련을 스스로 하신
아버지. 딸은 병 수발을 도맡아 하고 좋다면 무엇이든지 다 구해 드린
다.

오빠는 결혼해 부모님과 함께 산다. 26세에 처음으로 취
직하고 그 다음해 산
속 명상의 집에서 근무한다. 가족들은 결혼하기 어렵다고 그 곳 근무를
반대한다.

하지만 본인은 그곳에서 하느님이 부르시면 주저 없이 달
려가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그리고 그 날이 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리 수녀가 되는 것을 찬성
한다. 이미 뱃속에서 죽을 뻔한
아이였다는 말과 함께.

독립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며 자기 의사가 분명한 사람
이 수녀가 된다는 것은
상식적 통념에 맞지 않는다.

수녀회의 틀은 엄격하다. 맞을 것 같지 않은 수녀회에 들
어간 이후의 삶이 묘하게도
더 활기를 찾는다.

어머니가 아프고 난 후 수녀가 되기 전까지의 삶이 그 전
에 비해 활동성이 떨어진
것은 의문이다. 어머니 부재의 상황이었을 수 있다.

수녀가 되면서 젊은 시절 생명력이 있던 어머니와 같이
할 때의 활기가 부활된다.
어머니나 수녀회와 함께 하는 삶에서는 그 엄격함에 위축되어 가둬지기
보다는 열정과 활기 그리고 자유분방함이
솟구치는 상승적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 활기는 부활된다. 여중고 서무과장 일을 할 때다. 부
임 첫날 학교에 잡초가
많은 것을 발견한다. 본 순간부터 잠도 안자고 쉬지 않고 풀을 뽑는다.

결국 근사한 잔디밭이 만들어진다. 어린 시절은 하고 싶
은 것을 쉬지 않고 했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이어서가 아니라 나눔의 일이기에
더 쉴 수 없다. 그래서
지독한 일 중독자라고 부른다. 문제는 쉬지 않고 달려드는 데 있다. 그
래서 어머니의 문제였던 질병이
늘 따라 다닌다.

1997년부터 아이들 공부방인 ‘마가렛의 집’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IMF이후
어머니가 떠난 가정이 많다. 공부방은 이런 아이들을 위해 어머니를 대
신하고 아이들의 미래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 장소이다.

인가시설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
고 있다. 젓갈을 받아다가
직접 판매하여 유지비를 충당한다. 그렇게 일하다 1999년 난소암 진단
을 받는다.

그전에도 병은 계속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평생 성직자
의 길을 걷겠다는 종신서원
3년 만인 1980년 자궁절제 수술을 하기도 했다.

그 다음 해에는 결핵. 그래도 일 중독은 계속된다. 1990
년경 난소종양.
위험하지 않다고 해서 두고 본다.

1996년 갑상선 기능 항진증. 병은 다음에 올 평화를 예견
한다. 평화의 기간에는
나눔이 실천된다. 생명의 중요성은 병이 있기에 더 소중하다.

그래서 더 심해지는 병에 쓰러지기보다는 더 높은 생명
의 경외와 더 큰 나눔과
평화를 실천한다.

생명, 평화, 나눔은 그래서 한가지다. 새만금 문제는 병
이자 생명이다.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파괴를 막아야 한다.

그 파괴의 방지는 나눔으로 할 수 있다. 생명 평화 나눔
의 삼위 일체. 낙태
당할 위험은 생명을, 나눠주셨던 어머니의 행위는 나눔을, 병과 병사이
의 기간은 평화를 일깨워주셨다.

그 삼위일체는 바로 어머니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새만
금. 새만금은 바로 어머니
당신이다.

어릴적부터 정의파…수많은 일 척척 추진력 놀라워

오영숙 수녀가 수도자의 길을 택한 것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선택이었다.

고교(부산 성모여고) 1학년 때부터 오 수녀를 알고 지내
온 친구 김준희씨는
“워낙 말괄량이었다. 수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한다.

김씨가 기억하기로는 고교 졸업 후 오 수녀가 팔을 걷어
부치고 집안 일에 나서는
등 더욱 활달하고 능동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혼자 있으면 더욱 강해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 생활에서는 아무래도
규칙에 따라야 하지만 졸업 후에는 병약한 부모님을 건사해야 하니까 그
렇게 변한 게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수녀복을 입는다고 사람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김씨가 보
기에 수녀원 입소 후
한 1~2년 정도는 조용히 지내는 듯 보였지만 적극적인 성격은 결코 변
할 수 없었다.

‘새만금 반대’라는 사회운동은 오씨에게 극히 자연스러
운 선택으로 보인다. 김씨는
“어릴 때부터 부당한 것에는 못 참는 성격이었다.

애써 운동을 한다기보다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으로 생각할 것” 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7월부터 ‘마가렛의 집’에서 함께 일해 온 김영
애 수녀 역시 오 수녀의
특징으로 놀라운 추진력을 꼽는다.

김 수녀는 “ 워낙 진취적인 스타일” 이라고 말한다. 새
만금 운동으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쁠 때도 독거노인돕기, 공부방 아이들의 후원자 연결 등 많
은 일을 벌였다. “건강 때문에라도
한 가지는 좀 쉬어야 하는데 일 욕심이 많으셔서…. ”

이런 까닭에 며칠만 그가 동네에서 보이지 않아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의
안부를 걱정할 정도로 성북동 골목길을 밝히는 등불 같은 존재가 됐다.
‘마가렛의 집’ 아이들은 그의
모습과 행동을 교과서처럼 따라 배우고 있다.

양은경기자 ke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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