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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핵주권론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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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환경운동연합 부설 에너지대안센터 대표
/ 방송대 교수


북한 핵문제로 한반도에 또다시 위기가 닥쳤다. 9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다. 그때에 비해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국민이 이 상황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고, 전쟁반대를 위해 수십만명이 모일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전술핵 사용까지도
고려했던 당시의 긴박한 상황에서 우리가 무얼 하고 있었나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기만 하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그 상황에서 핵주권론이 들불처럼 번져갔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전쟁을 예방하기는커녕 미국의 전쟁론자들을 더 자극할지도
모를 핵주권 이야기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핵주권론에 유혹되기는 보수세력이나 진보진영 모두 마찬가지였다. 보수 세력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마당에 남한도 주체적으로
핵무기 개발능력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한국도 미국과 일본의 위협에 맞서 핵무기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 미국은 수많은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데 북한이 핵을 한두개 가지려는 게 뭐 잘못이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북한 핵이라도
통일되면 우리 것이 되는데 좋지 않느냐는 말도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핵주권론에 편승하여 한반도 비핵화선언의 핵폐기물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금지도 핵주권에 입각해서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핵주권론의 내용은 이처럼 다양했지만, 그 핵심은 우리도 핵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핵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서 핵재처리시설을 보유하자는 온건한 주장이나 핵무기 보유 주장 모두 그러한 입장을 깔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서로 소통하는
것이었다. 사실 핵무기는 핵재처리시설이나 우라늄 농축시설 없이는 만들기가 불가능한 것이니 ‘평화적’인 이용을 위한 핵재처리라는
말은 형용모순이기도 하다.

핵주권론 논의는 1994년 제네바 합의가 타결되고 북한이 핵개발 중단을 약속하면서 물밑으로 들어갔다. 민족에 대한 열정을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간혹 되살아나기는 했지만, 화제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북한 핵문제가 한반도에 다시 위기를
몰고 온 지금 그동안 숨어있던 핵주권론의 망령이 되살아날 조짐이 보인다(시민의 신문, 2003. 1. 13).

결론부터 말하자. 핵주권론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조금도 도움이 안된다. 오히려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한다. 북한에서 핵탄두를
대여섯개 보유한다고 가정하자. 물론 그것은 협상용 또는 방어용일 것이고, 최악의 상황이 아닌 한 북한에서 그것을 사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보유가 몰고올 파장이 엄청날 것은 분명하다. 남한에 다시 수백기의 미국 핵탄두가 배치될 것은 말할것도
없고, 더 심각한 일은 일본이 북한핵을 빌미로 핵무장으로 나아가리라는 것이다. 2차대전 후 일본은 몇차례 핵무장을 검토한 일이
있고, 현재도 핵무장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가 아니다. 지금 일본은 수백 아니 수천 개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몇 달 안에 손쉽게 수십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에 반해서 북한은 수년간
온갖 노력을 쏟아부어야 서너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서너개만 개발하고 중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로 옆에서 수백, 수천개의 핵폭탄이 노리고 있는데, 그에 맞설 만한
것은 그만한 수의 핵폭탄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상황이 누구에게 유리한가?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이 소련의 붕괴를 가져왔듯이
결국 북한은 군비경쟁의 결과로 폭발이든 내파든 파국을 면할 수 없게 되어있고, 이는 한반도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남한 핵무장이 가져올 위험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은 핵무장을 할 것이고, 중국은 핵개발을 확대하고 핵무기를 한반도
쪽으로 전진배치 할 것이며, 대만까지도 핵개발 경쟁에 뛰어들 것이다. 그리고 미국, 일본, 중국 그리고 북한의 압박 속에서 한반도는
항상 살얼음판 같은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국제정세 전문가들 중에는 남한이 핵개발을 할 수도 할 리도
없으니 걱정말라고 훈수하고 싶어 안달날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무시하지 말자. 박정희가 핵무기 개발을
거의 완료단계까지 진행했고, 그의 핵개발을 찬양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한국민의 80% 이상이 핵무기 보유를 찬성한다는
사실을(중앙일보, 1996.10.25).

우리가 한반도의 평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한반도를 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남한과 북한의 핵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중심에 서서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주도해나갈 수 있다. 한반도가 핵무기 없는
완전한 비핵지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일본의 핵무장과 중국의 핵확대에 대해서 경고할 수 있고 완전한 핵포기를 끌어낼 수 있는
필요조건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반도비핵화선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가 진정으로 핵으로부터 자유로운 곳,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이 될 수 있으려면 핵무기뿐만 아니라 핵발전까지도 포기되어야 한다.
핵발전은 핵무기 개발로 나아갈 수 있고, 핵발전의 확대는 끊임없이 핵개발 의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핵발전 확대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인 핵재처리와 고속증식로까지 하게 되면 핵개발 유혹과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핵발전을
하지 않으면서 핵무기를 개발한 나라는 한 나라도 없다. 파키스탄은 핵발전을 하면서 축적한 기술과 플루토늄으로 핵무기를 개발했다.
한국도 박정희 정권 시절 파키스탄과 똑같은 방식으로 핵개발을 하고 있었다. 핵발전과 핵무기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현재의 위기도 어느정도는 북한에 핵발전소를 지원하기로 한 것에 기인한다. 핵발전소 건설이 북한과 같은 곳에서는 10년이 훨씬
넘게 걸릴 수 있음은 약간의 전문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미국과 남한은 핵발전소 건설을 약속했고, 완공 약속시간이
다 된 지금까지 기초공사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그러니 제네바 합의는 이미 파기된 셈이다. 게다가 대체에너지인 중유공급도 끊겨버렸으니
한반도에 위기가 닥치는 것은 자명하다. 만일 그때 재생가능 에너지와 소형 가스화력발전소를 지원하기로 했다면 북한은 지금 에너지
결핍으로 고통받지 않을 것이고, 한반도가 현재와 같은 위기를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원한다면 핵무기와 핵발전의 포기를 분명히 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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