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환경 활동소식

촛불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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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오님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이 몇 번인가 파르르 떠는가 싶더니 이내 맥을 놓아버린다. 앉은뱅이책상에 펼쳐진 공책 위로 내려앉는 칠흑 같은 어둠. 어린 나는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숙제를 못해 가면 어쩌지, 저만치 희끄무레한 모습을 드러내는 벽지 위로 선생님의 얼굴이 나타난다. 내일은 학교 가는 길이 평소보다 몇 배는 길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나를 사로잡았던 두려움은 선생님께 듣게 될 꾸중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어둠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철석같이 믿었던 시각기관이 사실은 빛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다행히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문을 열고 엎드려 더듬더듬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안심이다. 누군가가 양초를 찾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성냥을 긋는 소리가 들리더니 양초 심지에 불을 붙이는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족쇄에 묶여있던 시신경이 모두 풀려났건만, 내 망막에 유일하게 맺힌 건 촛불 너머로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그윽한 표정이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 시절 어머니의 얼굴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듯하다. 주름과 검버섯으로 덮인 얼굴 뒤에 켜켜이 숨겨져 있는 젊음과 사랑의 기억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촛불은 어두운 그늘 밝히는 영성


촛불에 관한 기억은 또 있다. 십 년 전쯤의 일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남겨둔 추운 겨울날 우린 한 독일 가정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독일 사람들은 저녁식탁을 ‘촛불식탁’으로 불러도 좋을 만큼 촛불장식을 즐긴다. 하지만 그날은 여느 때와 달랐다. 계절 전환을 앞두고 치르는 그들의 전통의식이 있었던 까닭이다. 북방계 게르만인들은 태양의 힘이 스러져가는 겨울 초입에서 버드나무 잎과 가지를 움푹 팬 그릇에 넣고 불을 붙인다. 아이들은 저마다 소망이 적힌 종이쪽지를 그릇에 넣고 태우는데, 다 타고 나면 재가 담긴 그릇을 문밖에 내놓는다. 마지막 의식은 모든 가족이 함께 촛불을 켜는 것이다. 이들은 촛불이 태양의 힘을 북돋우고 겨울이 드리우는 어두움을 이겨내 봄에 무사히 귀환하도록 돕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서양에서 타오르는 촛불은 죽음의 제국이 드리운 어두운 그늘을 밝히는 영성을 뜻한다. 예컨대 부활절에 켜는 촛불은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거둔 승리의 상징이다.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모세의 촛대 ‘메노라’는 모든 사물에 내려지는 야훼의 은총을 뜻한다.


초여름 밤을 밝히는 촛불의 행렬이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이 촛불이 위대한 것은 고된 일상에 묻혀있던 또 다른 촛불의 기억들을 하나둘씩 불러내 각자의 삶의 궤적을 하나의 묶음으로 복원케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촛불에 대한 해석은 촛불 앞에서 잠시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던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해야 마땅하다. 아메바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촛불을 따라잡지 못해 시인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의심하고 학자들이 이론의 무기력함을 고백하고 있다지 않은가.


주인 의식·생명 우선 일깨워


마음속에서 불꽃을 일으킨 촛불의 공명 가운데서도, 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생명이 먼저다’라는 외침에 주목하고 싶다. 이번 사태의 본질이 이 두 가지에 응축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평범한 내 이웃들이 대한민국의 주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100일 지났으니 이혼합시다. 방 빼”라고 거침없이 외치는 그들의 발랄함과 경쾌함에 놀라는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의 본질인 생명가치도 다르지 않다. 어떤 국익도 국민 건강과 생명에 우선할 수 없다는 진실은 오랫동안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생명의 비밀과 디지털 과학기술의 핵심을 연결하는 그 무엇이 올 것이라는 시인 김지하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아침이다.


* 이 글은 6월 22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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