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합 인간환경회의
l968년 5월 제 44회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서 스웨덴의 유엔 대사인 아스
트 롭이 국제환경회의를 열자는 제의를 하였고, l968년 l2월 3일 제 23 차
유엔총회에서 l972년에 세계적 규모의 인간환경회의 개최를 정식으로 결의
하였다. 이때부터 `유엔인간환경회의’가 열리기까기 4년 가까운 동안 여러
국제적 모임이 열리게 되었다. 개발도상국들은 환경회의 자체에 대해 심각
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즉 이때까지 산업화를 달성하고 그 과정에서 지1구
를 오염시킨 것은 선진국인데 이제 와서 국제적인 통일기준을 정해 공해를
규정한다면 이는 이제부터 발전을 이룩하려는 개발도상국에는 크게 불리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국 개발이냐 환경이냐는 문제를 놓고 남북간에
열띤 공방전이 벌어졌다. 네 차례의 준비회의가 열리고 l972년 6월 5일부
터 l6일까지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하나뿐인 지구”(only,one earth
) 라는 구호 아래 ll3 개 나라와 3 개 국제기구 및 257 개 민간단체의 약
l,200 명이 참가한 국제연합 인간환경회의가 처음으로 열렸다.
스톡홀름에서 열렸다 하여 이 회의를 `스톡홀름 회의’라고도 부른다. 이
회의는 본회의 외의 3개 분과위원회로 나누어 진행되였다. 제 l분과위원회
에서는 1)인간거주환경의 계획과 관리, 2)환경 문제의 교육,정보,사회문화
적 측면이 논의되었고, 제 2분과위원회에서는 1)천연 자원관리의 환경적 측
면, 2)개발과 환경이 논의되었으며, 제 3분과위원회에서는 1)세계적 규모의
오염물질 파악과 규제, 2)국제기구 설치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회의에서
는 준비과정에서도 그랬지만 개발을 둘러싼 선진공업국과 개발도상국사이의
갈등, 핵 문제를 둘러싼 핵을 가진 나라들과 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들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났다. 이 회의에서는 `인간환경선언’과 행동건
의안 l09 개가 채택되고 결의되었으며, 이 회의가 시작된 날인 6월 5일을 `
세계 환경의 날’로 정하여 환경오영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행사를 해마다 하
였으며, 세계적 환경보전사업 시행기구로서 유엔환경계획(UNEP)을 창설하기
로 의견을 모았다. 또한 환경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기 위한 유엔환경기
금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회의 이듬해인 1973년에 일어난 오일쇼크는 세계
경제 전체를 불황에 몰아넣었고, l979년에 2차 오일쇼크 등으로 인해 자원
문제는 세계적인 관심사로 자리잡았다. 또한 환경오염은 우려하던 대로 약
화되기보다는 더욱 심해졌으며, 초강대국의 핵전쟁 위협은 서구 시민들의
반핵 시위를 낳았다. 이 회의에서 창설된 유엔환경계획은 환경 문제에 대
한 국제적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제환경법, 에너지
와 환경, 개발과 환경 등의 문제에 대해 수준 높은 모임이 개최되었다. 그
러나 이 기구는 기존 국제기관의 사업에서 환경관련활동에 대해 촉매적, 조
직적 기능만을 담당하게 되어 있다는 제약을 안고 출발했기 때문에 보다 적
극적이며 활발한 실천적 역할을 해내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읽을 거리
김태현, “환경 문제의 국제적 동향”, 한국공해문제연구소 편, [내 땅이
죽어간다], 일월서각, 1989, 43-51쪽;유엔 인간환경회의, “인간환경선언”,
같은 책, l89-l9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