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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제4차정책포럼 – 노동과 환경, 한국, 2003年

노동과 환경, 한국, 2003年
사소한 오해에서 커다란 화해로

1. 들어가는 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에 主義가 들어오면, 조선의 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의 조선이
된다고 얘기했다고 들었다.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
면 조선의 공자가 아닌 공자의 조선이 되며,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한다. …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
과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 한다.”

주의는 지금 식으로 얘기하면 ‘ism’을 얘기한다. 노동과 환경은 각각 영역이면서, 또한 각각
하나의 진영을 대표한다. 그리고 수많은 주의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수많은 주의들은 이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환경은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에서 관리주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파들을 이미 한국에
서 형성하고 있다. ‘Ecologie de toues les couleurs’라는 불어 표현처럼, 환경은 또한 모든 사
상과 결합이 가능하다. 가장 극좌의 진영에서부터 가장 극우의 애완동물 보호협회에 이르기까
지… 도대체 이 상황에서 환경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함유(connotation)는 무엇일까?

마찬가지로 노동이라는 단어 역시 일종의 수많은 주의에서부터, 실체를 가지고 있는 노동계
급, 혹은 계층으로서의 피고용자라는 수많은 함유들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과 환경’이라는 주제가 함유해야 하는 뜻과 풀어야 할 과제들이 무엇인
지 조망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2. 가장 1차원적인 오해 : 운동진영으로 본 두 그룹의 ‘성장’에 대한 오해

일단은 두 부분을 각각의 운동진영으로 보고 문제를 풀어보도록 하자.

2003년 현재로서 노동이 환경 부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안감은 ‘경제 성장
(economic growth)’에 관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노동을 둘러싼 이론들은 고전학파 경제학의 ‘축적론 접근’ 이후 맑스를 거쳐, 경제
성장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여준다는 기본적인 테제를 대체적으로 공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
은 ‘세속적’ – 탈종교적인 의미라는 점에서 – 관점은 사실 맑스까지를 포함한 고전주의적 관점
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후기 산업사회까지를 포함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
한 고전학파 경제학자의 주장에 대한 가장 속세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 가지 정확히 할 점은, 맑스가 자본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경제시스템을 단순힌 양적 팽
창의 관점에서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의 결과에 대한 분배적인 관점, 즉 질적인 측
면에 대해서 맑스가 주목하고 있으며, 또한 맑스의 주된 분석대상은 어떻게 경제가 축적해서 보
다 거대한 시스템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자본주의라는 매우 특수한 경제시스템이 필연적
으로 자체적인 모순에 의해서 결국에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점이다.

맑스가 이러한 자본주의의 붕괴의 필연적 붕괴를 이윤율의 모순을 통해서 추적하고 있다면, 보
다 앞선 아담 스미스는 자본사이의 경쟁의 심화를 통해서 이윤율이 감소하게 되어, 모든 시장경
제는 필연적으로 소위 ‘우울한 상태(gloomy state)’라는 ‘정체상태(stationary state)’에 도달하
게 되며, 이 모든 경제시스템의 이론적 종점인 상태에서 경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는 것은 地帶이론(rent theory)을 이론적 핵심으로 보유하고 있는 리카아도
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고전학파의 마지막이며, 맑스에게 이론적 영향을 미친 존 스튜아트 밀
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맑스를 포함한 – 힐퍼딩과 로자 룩셈부르크를
포함하며 –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밝히고 싶었던 것은 경제성장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
라는 ‘심리학적 물질관계’가 아니라 물질·사회관계로서의 경제 시스템이 어떻게 자체적 위기 혹
은 자발적 몰락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냐는 점이다.

니콜라스 죠르쥬스크-뢱겐이 60년대말 ‘entropy and economic process’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에너지적 관점에서 진정한 인간의 ‘생산’은 적어도 그 시대까지의 기술관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
았다. 왜냐하면 모든 생산은 에너지적 관계에서 화석에너지를 매개로 축적된 태양에너지를 ‘소
비’하는 것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 맑스시절 포돌린스키가 이미 동일한 관점에서 자본론의 열
역학적 관계의 모순에 관하여 지적한 바가 있다.

뢰겐의 이러한 지적은 70년대의 에너지 위기와 결합되며, 새로운 경제이론들을 만들어내는데,
허먼 댈리의 ‘정상상태(steady state)’의 이론은 이러한 면에서 아담 스미스의 우울한 상태를 현
대적인 방법론에서 재해석한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신고전학파 경제학
에서 모든 경제가 균형상태에서는 이러한 정체상태로 들어가게 된다는 점은 이론적으로 이미 입
증된 바가 있다(이것이 내생성장론이나 지식경제 등 신경제이론의 등장배경이다.)

표준경제학 내에서의 경제성장론에서는 장기적 관점에서 성장률은 인구 증가율과 일치하게 된
다.

이러한 이론적 경향을 고려한다면, ‘성장이 미덕’이라는 견해는, 실제 경제학 자체의 이론적
결론이라기 보다는 경제학의 한 편향에 불과한 ‘성장 이데올로기’에 가까운 것이며, 오히려 극단
적으로 하이에크 이후의 시카고 학파가 한동안 끌고 나가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보다 가까울
것이다.

분배할 몫 자체가 커져야 노동자에게도 분배가 돌아가게 된다는 점을 노동의 1차 테제로 설정
할 것인가? 그것은 경제성장이 되어야 국민경제가 윤택해지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적
극 ‘무조건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가장 기본적이며 원초적인 성장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
니지 않은가? 어쨌든 성장해서 같이 행복해지자고 하는 가장 폭력적인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받아
들인다면, 노동운동 역시 또 다른 자본의 피해자인 도시빈민이나 비정기노동에 대한 ‘우월적 분
배’를 중심으로 한 수혜 늘리기에 다름아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
다.

작년에 타계한 메도우(Meadows) 여사를 중심으로 70년대 전개된 제로 성장론(Zero-Economic
Growth : ZEG)는 경제성장에 관한 환경 부문의 가장 고전적인 테제를 형성하는데, 제로성장론 내
에서의 가장 주된 관점 역시 성장 자체를 ‘0’이라는 특수한 성장률에서 관리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주어진 생산을 어떻게 내부적으로 분배하고, 군사를 포함한 정부부문의 불필요한 지출과
에너지적 낭비를 생산적 복지 부문으로 전환할 것인가가 이론적 고민의 핵심이다.

개인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 자체보다는 ZEG에 근거한 내포적 성장(intensive
growth) – 이에 반하여 GNP 개념을 중심으로 한 성장이론을 외연적 성장(extensive growth)로 정
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을 선호하지만, 어쨌든 현재의 환경이론이 극단적인 근원주의자들을 제외
한다면, 후생수준이나 수혜론적인 ‘행복’ 자체에 대한 기계론적인 감소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
니다.

물론 언제나 편향은 가능하다. 말더스적인 관점에서의 기계론적 생태주의가 중산측 혹은 보다
기득권층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었던 것처럼, 생태주의는 또한 극단적인 우파의 관점과 결합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지난 프랑스 대선의 결선투표에 올라간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장 마리 르뼁에게도 환경정책은 존재하며, 보다 극단적인 주장들도 존재한다. 보다 국민들의 쾌
적한 환경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세금이 외국인들의 육아비용을 포함한 복지비용으로 지출되
고 있으므로, 환경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외국인들을 추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되고 있다.

어쨌든 현재 2003년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즉각적인 경제성장의 정지를 주장하는 70년대식 제로
성장론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sustainable development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면, 노동
과 소외된 계층, 그리고 자본 자체에 대해서 환경 분야에서 제시한 일종의 화해의 개념일 수 있
다. 환경이론들이 국민소득이 빠르게 2만불로 진행될 것에 대해서 기계론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성장을 진행시킬 것인가, 즉 양상(mode of accumulation)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분야에서 사회안전망과 분배구도에 대한 성장의 양상에 대해서 끊임
없이 질문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3. 추상에서 구체로 갈 것인가, 구체에서 추상으로 갈 것인가?

어느 이론에도 근원주의적 관점은 존재할 수 있다. 또 어느 접근에서도 현실주의적 해법은 가
능하다.

2003년, 한국에서의 노동과 환경은 어떠한 관점을 채택하여야 할 것인가? 국민소득 만 불 전단
계에서 경제 및 사회의 질적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노동과 환경은 분리 및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상호 통일적 협력 및 연대의 대상에 더욱 가깝다. 무엇보다도 새만금이나 청계
천 사업에서 보여지듯이, 노동과 노동, 환경과 환경, 혹은 기타 부문 사이의 갈등에서 문제의 본
질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 내부에서의 분배의 문제와 기본적으로는 가장 저차원적
인 건설중심의 개발주의 체계에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일종의 서구식 복지 사회에 대해서
각 진영은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기계적으로 답하기는 쉽지 않지만, 사민주의가 가능한 상태가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으로서
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사민주의의 정상적인 가동이 존재했던 국가
들의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2만불 이상의 상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여기
에서 하나의 편향적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2만불이 되면 우리나라에도 안정적인 사민주의 사
회체계가 가동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이러한 해석이 시간과 공단을 뛰어넘은 그야말로 ‘경
제학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2만불쯤 되면 우리나라 국민의 환경에 대한 의식과 수준이 높아져, 지금
생겨나는 많은 경제적 갈등에 근거한 환경문제가 발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
이 존재한다. 노동문제에 대한 편향이 존재할 수 있듯이, 이러한 관점 역시 기계론적인 관점이라
고 할 수 밖에 없다. 유럽이 보다 친환경적인 입장을 취하는 반면, 교토의정서 가입과 GMO 협약
체결을 거부한 미국이 지구적인 반환경적 입장을 현실적으로 취하는 것은 반드시 국민소득의 문
제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50년 이상의 지역환경운동의 역사를 가진 유럽의 길과 미국의 길의
차이는 소득규모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거대 테제를 중심으로 문제를 푸는 것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구체적 사안으로 문제
를 푸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협력할 부분이 많을 것인가? 그렇지 않은 부분보다는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이러
한 과정에서 실질적인 협력과 연대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1차 목표가 사민주의 사회가 되었든, 아니면 ‘환경적으로 건전한 사회’가 되었든, 문제를 만들
어내는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으며, 과정은 본질과 충돌하는 여러 가지 힘들의 협력의 과정이
될 것이다.

4. 기업이 적인가, 아니면 협력의 대상인가?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라고 되어있는 자본과 노동관계가 구체적으로는 노동과 사용자측인 회사
와의 관계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문제가 기본적인 활동의 장으로 설정하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환경부문에 있어서 기업이라는 대상은? 갈등과 설득, 그리고 회유의 대상이며, 때때
로 극단적인 갈등의 대상이다. 구체적인 문제의 한 부분은 여기에서 발생할 수 있다.

만약 어느 기업이 환경적으로 대단히 잘못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할 경우, 이 기업과 환
경 진영은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 대부분의 기업가는 자신의 생존 전략으로 국
민경제 자체의 안정성과 고용, 즉 자신들의 노동자를 볼모로 삼고 협상에 임하게 될 것이다. 유
럽 녹색당이 job-sharing에서 대단히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현실적인 갈등의
요인 때문에 그렇다.

만약에 기업과 환경과의 갈등 속에서 도산하거나, 사업장을 폐쇄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
의 직업을 잃은 노동자에게 있어서 문제의 시발점을 기업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환경을
강조한 환경운동 분야에서 문제를 찾아야 할 것인가?

만약 이 경우 문제가 지나치게 ‘깨끗한 환경’을 강조하는 환경 분야에서 찾고, 이러한 상황인
식이 사회에 전파된다면, 이것은 대단한 문제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업이 도산하는
경우는 정부와의 갈등, 환경단체와의 갈등에서도 발생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기업들 자
신들 사이에서의 경쟁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인체에 유독한 물질을 포함하는
부도덕한 한 기업이 존재하고 있고, 이 기업에 대해서 국민적인 불매운동이 발생하여, 결국 도산
하였다고 하자. 이 경우 해당기업의 노조가 환경운동에 대해서 반발하거나 비판하는 일이 발생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인가?

그렇다고 사회나 환경 분야 심지어 전체 노동을 대표하는 노동계가 환경적으로 부도덕한 기업
의 활동을 지지하고, 구명운동을 하여야 할 것인가? 물론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경향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지만, 어쨌든 기업은 언제든지 자신의 노동자들을 인질로
삼으려고 하는 경향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가 더욱 발전하면서 실업이 일반화되면서 이
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노동조합이 기업의 활동에 대해서 보다 포괄적으로 간여하고, 기업의 환경관리
상태나 물질관계에 대해서 보다 전문적인 관점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장 빠르지
만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만약 기업과 자신의 운명이 임노동관계와 이윤실현에서 하나의 끈으로
엮여진 공동운명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아니면 현재 사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유
연한’ 노동관계가 이루어지도록 하던지… 그러나 현실적으로 노동자 입장에서의 유연성이 이루
어지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기업의 환경적 활동에 대한 감시에 대해서 노동조합이 참가하여
야 하고, 적극적인 관점을 개진하여야 한다. 왜? 부도덕한 회사라도 월급을 받는 것이 목표라
면, 극단적으로 불법단체에서 자신의 수익을 올리는 조폭과 다를 것이 무어란 말인가? 조폭에게
도 부양해야 할 식구들이 있고, 그들도 나름대로의 특수노동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환경단체는 단위 노동조합이나 혹은 연합체와 협력하여 환경에 관한 전문적 고민을 공유하고,
고민해야 한다.
5. 장기적인 고민 : 결론을 대신하여

1차적인 기업을 중심으로 한 노동과 환경의 협력 외에도, 지속가능한 개발의 또 다른 핵심축
은 sustainable consumption, 에너지 패턴의 문제, 지역에서의 환경갈등, 국제적 이슈에 대한 협
력 등 개발하고 연대하여야 할 부분은 많다.

노동에 대해서 환경이 던지는 질문은, 어쩌면 조합주의적이며 귀족주의적인 노조의 우경화에
대한 경고가 될 것이다. 이 경제-사회시스템에서 피해를 받고 있는 것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임시
고용을 포함한 도시빈민, 환경, 여성, 그리고 군사부문 등의 다양한 측면이 존재한다. 노조만이
살 길이라는 노동자의 구호는 또 다른 귀족주의적 조합주의일 수 있으며, 이 역시 노동의 우경화
의 길로서 찬성할 수 없다.

환경이 노동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은, 구체성과 당파성의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실
제로 노동자들이 기업 환경활동의 감시자 및 제언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촉진하기 위
해서 환경의 프로그램들은 보다 구체적이며 현실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 정서적인 질문만으
로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분명히 발전되어야 할 분야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편
에서 노동이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은, 어쨌든 ‘쾌적하고 건전한 환경’만 있으면 된다는 비당파적
인 – 그리고 극우편향의 – 환경주의에 대한 경고이다. 환경 역시 우경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진보진영의 질문을 공유하고, 연대하여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양 쪽이 실천적으로 경계하여야 할 문제는 일종의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다. 풀뿌
리지방자치에서 문제를 풀어나가고, 2003년 한국이라는 조건에서 한 발씩 나가기 위해서는, 바
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서구의 경험을 기계적으
로 우리나라에 적용하는 일종의 이론적 엘리트주의가 문제가 된다. 물론 지나치게 작은 지역의
한 문제들을 일반화시키는 것들은 또 다른 편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크게, 때로
는 작게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기에서의 우리의 경험이며, 이
출발점 위에 무엇인가를 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글 : 우석훈 (생태경제연구회 운영위원, 경제학 박사, wasang@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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