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프로그램

환경운동연합10주년기념심포지움 – 생명지속적 발전을 위하여

1. ‘녹색의 주류화’에 관해
‘녹색의 주류화’라고 할 때 두가지 엇갈린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적어도 담론의 세계에서는
녹색담론이 이미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요, 다른 한편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지속하는 한 실제 주
류화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두번째 명제는 점검을 요하는 사안이며, 미래에 관한 예측인만큼 쉽사리 논증할 수 없
는 성질이기도 하다. 반면에 담론세계에서의 주류화 현상은 비록 엄밀한 논증은 못하더라도 여러
가지 징후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환경운동에 대한 비판이야 얼마든지 나
오며 녹색담론 중에도 여러 갈래가 있어 서로간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에서 녹색 자체가 나쁘다는 주장은 들어보기 힘들다. 오히려 거대언론이나 정부당국, 기업 등 더
러 환경파괴의 당사자로 비난받는 주체들까지 환경보호를 소리높여 외쳐대기 일쑤며 이런저런 녹
색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거저 된 일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환경위기가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동안 환경보호를 위해 싸워온 수많은 활동가들의 노력 덕분인 것이다. 실
제로 한국사회에서는 7, 80년대까지만 해도 녹색은 곧 적색으로 간주되기 일쑤였다. 그리고 물
론 지구상에는 아직 녹색담론이 생소한 나라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좀더 발전된 사
회에서는 빈말로라도 녹색을 들먹이지 않고는 ‘정치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녹색운동가는 말로만의 녹색주의자로 전락할 위험도 크다. 좁은 의미의 ‘말
로만 녹색주의자’는 결코 환경친화적이지 못한 현실에 영합하면서 빈말로 생태환경을 들먹이는
인물이겠지만, 녹색의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현실적인 영향력을 포기하고 녹색담론의 전개 자체
에 만족하는 인사들도 포함될 수 있다. ‘녹색의 주류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는 녹색이 아
닌 주류화의 길을 택했고 다른 하나는 주류화 노력 자체를 외면한 꼴이다.
이런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독일 녹색당이 정권참여세력이 되면서 야기된 현
실파(이른바 Realos)와 원칙파(Fundis)의 분열이다. 물론 현실론자들 자신은 녹색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원칙론자들은 그들대로 당장의 주류화를 외면했을 뿐 장기적으로 주류가 될 가
능성을 포기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실제로는 녹색노선이 좌절되는 현실에서 녹
색운동이 당면한 딜레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태라 하겠다.
그런데 녹색노선의 좌절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특성이라면 어찌 되는
가? 적어도 이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2.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이념
‘녹색노선의 좌절’이라고 했지만 이는 특정 사회에서 일부 또는 상당수의 녹색정책이 채택될 가
능성–아니 실제로 채택되기도 하는 현실–마저 부인하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지구 전체의 차원
에서 친환경적인 사회가 자리잡아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경제발전과 환경보존이 양립하는 사회체제를 지향할 때 흔히 내거는 표어가 ‘지속가능한 발
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다. 물론 생태근본주의(deep ecology)를 비롯한 상당수 녹색주의
자들이 이를 비판적으로 보지만, 현실 속에서 녹색담론의 주류화에 크게 이바지해온 개념인 것
은 분명하다. 당장의 현실은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위협하고 있을지라도 환경보호를
위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공적 규제의 강화, 합리적이고 지속적인 이윤에 대한 기업인들 자신의
각성 등이 작용하여, 경제의 발전을 계속하되 그것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전략이 성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주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론상의 문제를 떠나 현실의 흐름만 보더라도, ‘지속가능한 발전’ 이념이 제시된 이래
수십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환경이 개선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일부 선진국에서는 여러가지
녹색정책이 시행되어 성과를 거두었고, 특히 부유층의 생활환경에서는 뚜렷한 개선이 이룩된 바
가 있다. 그러나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삼은 ‘지구 총량제’로 계산한다면, 비록 상세한 통계수치
가 없더라도 자연파괴가 꾸준히 지속되었고 지금도 악화일로라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동서냉전이 끝난 뒤로 더욱 잦아진 전쟁은 번번이 대대적인 환경파괴를 수반하게 마련이
다. 물론 전쟁은 환경파괴이기 전에 생명파괴이며 경제와 문화의 파괴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대이라크전쟁만 하더라도 그로 인한 엄청난 환경파괴가 남의 땅에서 일어나서 그렇지, 지
구 총량제로 따진다면 선진국에서 수십년에 걸쳐 이룩한 이런저런 녹색정책의 성과를 일거에 상
쇄할 정도가 아닌가. 그 점에서 환경운동연합이 최근의 반전평화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단순히 시민적 양심의 차원이 아니라 환경보호라는 환경연 고유의 임무와도 합치하는 일이다.
전쟁으로 더욱 악화될 빈국들의 빈곤 또한 환경파괴를 촉진하는 요인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에서의 빈곤이 옛날의 빈곤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한데, 거대한 부(富)의 불평등한 분배를 그 발
전의 동력으로 삼는 체제에서는 궁핍한 대중이 자연과 조화된 가난 속에 안주하는 일이 허용되
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인 좌절감에 시달릴 뿐 아니라 현실적인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 되게 마련
이므로 환경이 어찌 되든 경제개발에 선진국 이상으로 열을 올리기 십상이다. 후진국일수록 환경
파괴가 자행되곤 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빈부차이가 없으면 안 돌아가는 계급사회에서는 심지어 민주화의 진전조차 환경보호에 도움이
못 되기 쉽다. 위에 말했듯이 저개발단계에서는 대중의 개발욕구가 환경에 대한 고려를 압도하
기 일쑤인데, 그 단계를 넘어 대중이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게 되면 기업들은 흔히 환경비용
을 ‘외면화’ 즉 기업비용이 아닌 것으로 돌려서 댓가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이윤률을 보전하려
고 한다. 물론 개별기업 차원에서는 발전된 환경기술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선진국의 기업
들은 공해산업을 저개발지역으로 이전함으로써 본국에서 강화되는 규제를 피해가기도 한다. 그러
나 문제는 여기서도 ‘지구 총량제’에 따른 계산표다. 나로서는 비전문가의 인식을 말하는 데 불
과하지만, 환경파괴의 증대와 평균이윤률의 저하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
닌가 한다.
경제의 영역 자체로 눈을 돌리면, 20세기 종반 이래 중국의 성장에 따른 환경파괴만도 다른 모
든 나라에서 이룩한 환경보존의 성과들을 무색케 할 정도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부문별로 정량
적인 대비와 분석이 나와야겠지만, 실은 선진경제 내에서조차 계속되는 환경파괴가 친환경적 성
취를 상쇄하는 바 많을 것이다. 여기에 21세기 들어 바야흐로 본격적인 개발대열에 합류할 것이
예상되는 또하나의 인구대국 인도라든가, 여전히 빈국으로 머물되 공업화된 빈국으로 탈바꿈하
고 있는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을 덧붙인다면, 경제의 운영원리 자체가 바뀌지 않는한 생태계의 위
기는 머지않아 인류문명의 존속마저 불가능하게 만들 형국이다. 아직 지구경제의 성장이 지속되
고 있는 것은 망칠 자연이 아직은 좀 남았기 때문이지 ‘지속가능한 발전’의 이념이 실력을 발휘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현실이 이러할수록 녹색운동이 절실해진다. 그러나 효과적인 운동을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발
전’이라는 이념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3. 생명과 발전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이 지니는 이론상의 주된 문제점은, 그것이 은연중에 ‘발전의 지속’을 최
고의 가치로 설정하면서 ‘발전’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좀더
철저한 녹색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차적으로 존중되고 지속되어야 할 것
은 생명이요, 발전은 그 기준에서 검토할 사안인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이름으로 발전 자체를 배격하는 것 또한 문제다. 물론 근대세계에서의 ‘발
전’은 ‘경제성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이윤의 극대화와 자본의 무한축적을 작동원리로 삼
는 경제체제 아래서는 경제성장의 추구가 인간의 다른 모든 욕구들을 압도하게 마련이다. 환경보
호와 생명존중도 이 원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만 실현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녹색주의자
가 ‘발전=경제발전=경제성장’의 등식을 설정하고 ‘발전’ 자체를 ‘죽음의 논리’로 규정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발전 자체로 말한다면, 살아 있다는 것이 곧 기계적인 지속이 아니라 변화하고 발전하는
일(또는 발전을 못했을 때 퇴행하는 일) 아닌가. 개별 생명체가 그럴뿐더러 종(種)이라는 집단
의 차원에서도 생물은 끊임없는 진화의 과정 속에 살며, 이 진화과정에서의 성취에 따라 종과
종 사이에 생존력의 우열이 가려진다. 아니, 모든 생명체의 생명이 그나름으로 존엄하다는 원칙
과는 별개로, 식물과 동물 사이에, 동물과 동물 사이에, 특히 인간과 여타 유정물(有情物) 사이
에 각자의 발전단계에 따른 생명현상으로서의 우열이 과연 없다고 할 것인가.
이야기를 인류역사라는 훨씬 짧은 시간대로 국한하더라도, 근대세계에서의 빈곤은 지난날의 빈곤
과 다른 성질임을 앞서 언급했다. 전통사회에서 선비의 이상이던 청빈(淸貧)은 일정한 신분과 물
질적 토대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사회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지금도 일부 종교인들이 서원하고
실행하는 ‘무소유’나 청빈의 삶 또한 개인의 특별한 수행(修行)뿐 아니라 종단의 집단적 재산소
유에 의해 밑받침되고 있다. 물론 일반대중도 이런 개인적 수양과 공동체적 유대를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반생명적인 사회체제를 바꾸려는 현실적인 노력과 동떨어진 개
인 또는 소집단 차원의 움직임은 환경보호 차원에서도 효과적인 대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대중과 함께 사회체제를 변혁하는 운동이 되려면 대중의 정당한 욕구를 긍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개발지상주의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동조는 분명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감염된 뒤틀린
욕구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발전을 통해 의식주 기본생활의 충족은 물론, 이를 얼마간 초과하는
풍요로움을 바라는 마음 자체가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깨끗하고 품위있는 가난이 인간의
어떤 깊은 욕구에 상응하듯이 장엄(莊嚴)과 영화(榮華)에 대한 욕망 또한 중요한 본능인 것이
다. 생명의 욕구는 실로 다양한 것이며 이들을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것이 참된 지혜이지 그중 어
느 하나만을 절대시하는 것은 독단이며 자신의 이상을 남에게 강요하는 억압행위가 되기 십상이
다. 실제로 녹색담론의 주류화 내지 유행화 현상은 바리새주의(Pharisaism)의 위험을 낳고 있
다. ‘바리새인’은 흔히 ‘위선자’의 대명사로 쓰이고 녹색이 그런 단순한 의미의 위선에 동원되기
도 하지만, 원래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혐오하고 규탄한 주된 이유는 개인 차원의 위선이라기보
다 대중의 욕구를 외면하는 저들의 엄격주의·형식주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환경관리주의적 이념이나 반대로 경제적·기술적 발전
자체를 적대시하는 생태근본주의적 노선 대신에, ‘생명지속적 발전'(life-sustaining
development)을 제의하고 싶다. 어디까지나 생명을 지속하는–영어로 sustain 즉 유지하고 북돋
는–일을 기본으로 삼되 여기에 합당한 발전의 가능성을 찾자는 것이다. 이는 물론 대안적인 세
계체제를 창출하는 장기적 작업인데, 이것이 또하나의 빈말로 끝나지 않으려면 장기적 작업이 구
체적인 중·단기적 과제들과 의미있게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4. 새만금 문제의 경우
생명지속적 발전을 위한 장기·중기·단기적 작업의 연결 가능성을 생각하는 하나의 계기로서 최
근 한국사회의 뜨거운 관심사가 되어 있는 새만금 문제를 살펴볼까 한다.
군산지역에서 변산반도에 이르는 33킬로미터의 방조제를 쌓아 바다를 막고 4만 헥타르의 간척지
(및 담수호)를 조성하겠다는 이 무지막지한 사업은 방조제 완공이 다가오면서 사상최대의 생태
적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이 사업의 무모함과 파괴성을 뒤늦게나마 나라안팎으로 알린 것은 뭐
니뭐니 해도 녹색운동가들의 공로이다. 환경운동연합은 방조제공사 중단을 올해의 ‘3대 중점사
업’ 중에서도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고, 한때 저조했던 국내외 반대운동이 다시금 불붙고 있다.
방조제의 완공만은 어떻게든 저지해서 바다와 갯벌을 살려야 한다는 당면목표에는 ‘지속가능한
발전’론자와 생태근본주의자를 포괄하는 모든 녹색운동가들이 합의하고 있다. 아니, 경제부처 관
료나 개발론자 대다수도 동의하는 실정이다. 단지 현행사업에 기득권이 걸린 세력들–특히 간척
사업의 주체로서 조직의 장래가 이 사업의 존속에 걸렸다고 할 농업기반공사와 그 상위기관인 농
림부측–과 새만금 간척지가 낙후된 지역경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리라는 환상에 젖은 상당수
지역주민들이 간척사업을 고집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새 대통령이 농지조성을 배제한 이래 새
만금 간척은 애초의 명분을 상실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공사는 여전히 진행중이며 방조제의 완공 가능성을 지금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방조
제공사가 1991년에 착공하여 이제는 쉽게 허물어뜨릴 수도 없을 만큼 진행된 탓도 있지만, 방조
제공사 중단이라는 단기목표 다음에 올 중기목표–내지는 단기작업의 2단계 과제–에 대한 합의
가 반대운동가들 사이에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합의가 없을수록 일단 중단해놓고 합의를 도
출하는 것이 순리라는 주장이 이론상 타당하지만, 사업추진세력과의 현실적인 역학관계에서 논리
만으로 승리할 전망은 밝지 않다. 더구나 이 논리에 새만금사업과 관련된 지역민들의 ‘환상’뿐
아니라 그들의 ‘개발욕구’ 자체를 어리석고 타락한 욕망으로 단정하는 허점마저 내포되었다면,
그 현실적인 위력이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간척사업 반대운동 쪽의 대안은 여러 갈래로 나온 바 있다. 대안이란 게 필요없고 이미 쌓아놓
은 둑을 허는 것만이 대안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에서부터(예컨대 허정균 「또하나의 위험한 개발
논리」, 『녹색평론』 69호, 2003. 3-4월) 기성 방조제의 훼손을 막는 마무리 공사 이외에 일체
의 추가사업을 하지 말자는 주장, 그리고 기존의 방조제를 활용하는 이런저런 방안들이 제시되었
다. 이제 와서 방조제를 헐어버리는 일이 비현실적일뿐더러 환경보호에도 얼마나 역행하는 제안
인지에 대해서는 갯벌연구가 이자 환경운동가인 전승수 교수도 지적한 바 있으며(「우리가 바라
는 새만금의 미래는?」, 디지털창비 웹매거진 2003년 3월
http://www.changbi.com/upmenu4/web1.php?no=275&vol=21&search=), 지금은 기성 방조제를 활용
할 대안을 활발히 논의하여 방조제완공 저지라는 이미 합의된 목표의 달성에 힘을 실어줄 때라
고 본다.
대안들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여기서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 자신은 건축가이자 도시설
계가인 김석철 교수의 ‘새만금 바다도시’ 제안에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토론을 촉구해
오면서, 녹색담론과 녹색운동이 당면한 여러 문제를 새롭게 성찰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직 전국적인 녹색정당이 없는 까닭도 있지만 독일 녹색당의 ‘레알로’와 ‘푼디’의
대립에 해당하는 분열은 뚜렷하지 않다. 아니, 독일과는 원래가 다른 운동지형이기에 ‘환경관리
주의’와 ‘생태주의’의 대립 또한 선명하지 않다(「환경관리주의와 생태주의의 긴장」, 『창작과
비평』 108호, 2000. 여름). 더구나 새만금 간척사업은 수개월, 길어야 1년내에 중단결정을 얻어
내야 하는 절박한 과제로서, 상당수 생태주의자들도 무언가 대안을 찾아서 공사를 저지하고 보자
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녹색평론』 같은 생태주의 담론진영에서는 일체의 개발에 반대하는 원칙을 고
수하는 듯하다. 여기에 ‘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 같은 현지의 주민운동이 힘을 더해
주고 있는데, 다만 그 대표자들의 발언에는 생태근본주의적 주장과 갯벌환경에 대한 관리 차원
의 주장, 그리고 때로는 ‘내집 뒷뜰만은 안돼'(이른바 NIMBY: Not In My Back Yard)라는 주민운
동 특유의 실감이 뒤섞여 있어 일관된 논리를 만나보기는 힘들다(예컨대 위의 『녹색평론』 69호
에 실린 신형록, 허정균씨의 발언 참조). 그에 반해 『녹색평론』 편집진의 선명한 원칙론은 일
면 존경스럽지만, 그것이 ‘녹색의 주류화’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함은 물론, 과연 새만금 갯벌과
지역주민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진실된 애정을 담은 주장인지도 의심스럽다.
김석철의 바다도시안에 내가 특별한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생명지속적 발전’을 위한 내
나름의 중·장기적 구상과 합치하는 바 있기 때문이다. 김교수 자신이 나의 그런 구상에 전적으
로 동조하는지는 장담할 길이 없다. 다만 합치의 가능성이 보이면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최대한
노력할 일이지, 완벽한 안을 만들어올 때까지는 비판만 하고 있겠다는 것은 도리가 아닐 터이
다.
물론 중·장기적 과제와 연결시킬 때는 간척사업에 대한 당장의 대안으로서도 일정한 현실성과
매력을 갖추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경우에도 매력이 있고 실현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고 판
단되면 그것이 현실이 되고 더욱 매력적이 되도록 함께 만들어가려는 실천적 자세가 중요하다.)
바다도시(aquapolis)가 워낙 획기적인 발상전환을 요구하는데다 그 내용도 자못 화려한 것이어
서 곧바로 또다른 대대적 환경파괴를 염려하기 쉽지만, 연면적 300만평이 넘는 방조제를 주로 활
용하면서 바다를 도시인프라로 삼는 바다도시는 간척지 면적을 대폭 축소해서 개발한다는 좀더
현실주의적이라는 대안들에 비해 갯벌 훼손이 한결 덜해질 수 있는 제안이라 생각된다. 또한 한
국에서는 화려하지 못한 구상이 오히려 현실성을 갖기가 날로 힘들어지는 것이 세계경제의 실정
이라는 점도 고려할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김석철 구상의 구체적 내용을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고 ‘생명지속적 발전’ 기획의
중·장기목표 문제로 돌아가고자 한다. 장기목표는 앞서도 말했듯이 끊임없는 자본축적을 기본동
력으로 삼는 세계체제를 좀더 친환경적이고 생명존중적인 사회체제로 변혁하는 일이다. 그런데
새만금바다도시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환황해권(環黃海圈) 경제의 폭발적 성장은 곧 ‘지속가능한
발전’의 결정적인 위기이기도 하다. 중국을 포함한 이 광대한 인구밀집지역이 종전의 발전모형
을 따라 성장을 계속한다면 머지않아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
다. ‘생명지속적 발전’의 새 모범이 이곳에서 나오든 다른 곳에서 유래하든 시급히 이 지역에 적
용되어야 할 상황이다.
세계체제변혁이라는 지구적(global) 의제와 한국사회라는 국지적(local) 현장에서의 당면작업들
을 연결해줄 매개항으로서 나는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중기적 과제’를 제시해왔다. 이
를 새만금 문제에 적용해보면, 환황해권 거점교역지로서 새만금바다도시–더 정확히 말하면 바다
도시와 호남평야 도시들의 ‘도시연합’–이 갖는 잠재력은 중국의 개혁·개방뿐 아니라 한반도 분
단체제의 흔들림을 전제하고 있다. 단순히 남북의 교류가 증대하고 황해상의 교역이 활발해진다
는 뜻만이 아니라, 그간 분단체제를 특징지었던 개발독재와 지역주의, 폐쇄적 사고와 부패한 관
행 들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과 정리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만금에서 진정으로 친환경적
인 개발의 새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새만금의 갯벌과 바다를 한껏 살리려는 싸
움의 성공인 동시에, 통일한반도와 동북아시아, 나아가 세계 전체를 위해 대안적 발전의 실마리
를 제공하는 성취가 될 것이다.
이 과정이 녹색운동을 위해 겹겹의 중요성을 띰은 물론이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새만금 방
조제공사는 녹색운동 스스로가 고식적인 반대운동에 머물지 않고 설득력있는 대안의 윤곽이라도
제시하지 않고는 중단시킬 수 없는 것이 현실이며, 공사중단에 성공했다고 운동이 끝날 성질도
아니다. 대안이 친환경적으로 충실히 시행되는지 줄곧 감시함은 물론, 한반도에서 조금이라도
더 생명지속적인 체제가 자리잡는 데 어떻게 기여하도록 만들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이
과정을 제대로 감당할 때 녹색은 진정한 주류화에 획기적으로 다가설 것이다.

글 : 백낙청 (재)시민방송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admin

참여프로그램의 최신글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