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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 현장운동사(함께사는길 100호특집)-생명을 위한 헌신1982~1991


공추련기관지<생존과 평화>

1982년 민주화운동그룹의 부문운동체로서의
자기전망과
위상을 가지고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창립됐다. 1986년에는 주부를 중
심으로 한 생활환경운동체를 표방한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가 설립됐다. 한편 1987년에는 <반공해협의 회>가 공개조직화하면서
한국사회 청년운동의 일각으로서 반공해운동을 자임한 <공해추방청년협의회 >를 결성했다. 반공해운동의 공통분모를
가진 세 조직은 1988년 사회개혁과 공해추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통합을 결정하고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을 결성한다. 이미 1984년 경남 온산공단의 ‘온산병’사건을 통해
공해문제는 국가주도형 경제개발이
불러온 필연의 결과라는 문제인식이 사회적으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었으므로
공추련으로의 통합은 시대의 요구를 대승적으로
수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1984년 국가주도 개발시대의 숨겨졌던 치
부하나가
세상을 놀라게했다. 온산병으로 명명된 괴질에 걸린 사람들의 존재가 드
러난 것이다. 몸이 썩어들어가는
피부병을 앓는 온산병 소녀의 상한 몸은 그대로 개발독재의 참상을 웅변
한다.

공추련의 정체성은 90년 안면도핵폐기장 건
설 백지화운동을
통해 드러났다. 안면도를 반핵운동의 성지로 만든 이 싸움을 통해 공추련은
‘반핵평화’라는 환경운동단체로서의 진정성을
획득했다. 한편 같은 해 4월 공추련은 한국 최초의 지구의날 행사를 서울 남산
에서 열었다. 지역과 국가를 벗어난
환경문제의 초국적 특성을 반영하는 ‘지구’라는 생명계의 단위에 주목한 이
행사의 개최는 향후 공추련이 민중민주운동의
부문운동체로서 반공해 전문운동을 표방한 조직에서 시민사회운동체로 거듭나
는 길로 나아가는 하나의 방향타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1991년 낙동강 페놀오염사건이 발생했다. 사
고를 일으킨
두산 전자공장은 물론이고 기업 전체가 불매운동이라는 시민사회의 ‘행동’ 앞
에 기업퇴출의 위기까지 몰렸다. 낙동강
유역의 문제였지만 국민의 응징은 전국적으로 조직되고 실천됐다. 페놀사태가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재발 가능한 문제이고,
가해자는 하나이되 피해자는 불특정 대중이라는 사실이 시민들의 환경의식을 일
깨운 것이다. 환경문제의 광역적 특성을
환기시킨 이 사건은 공해추방운동의 시민환경운동으로의 진화에 있어서 또 하나
의 기반을 제공했다. 환경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전국적인 존재확인, 즉 반공해 전문운동단체가 시민단체로 확대재편되
었을 때 이를 지탱해줄 잠재적 회원의
존재를 확인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최루탄추방캠페인을 벌이는 공추련 여성위
원회 활동가들

미래 운동의 명분과 물적 기반의 제공자를 페
놀사태 대책활동을
통해 가늠한 공추련을 비롯한 전국 반공해운동그룹들에게 1992년 리우회의는
또 다른 통합의 역사를 열게 한다.
지구촌의 환경문제가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심적인 문제라는 확인
이 세계정상회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환경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거버넌스 건설의 시작인 동시에 이에 대한 강력한 시
대의 요구였던 리우회의 참가를 통해
한국반공해운동그룹은 국경 없는 환경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강력한
국제연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고
이를 위한 조직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페놀사태와 리우회의
의 경험은 한국반공해운동그룹들로 하여금
또 한번의 대승적 통합의 역사를 열게 한다.



89년 3월 안면도 최남단에서 반핵
폐기장 투쟁 결단실을 열고 있는 안면도 핵폐기장결사반대투쟁위원회 소
속 청년들과 공추련이 파견한 활동가들

공해추방운동연합을 비롯한 전국 8개 반공해
운동단체들은
1993년 4월 2일, <환경운동연합>으로 통합을 선언한다.
환경연합은 회원을 운동과 재정의 토대로 삼는 대중성, 각계 전문가들과 긴밀
히 연결되어 문제의 비판에 그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하는 전문성, 사회·생태적 약자를 중심에 두고 문제의 현장에서 활
동하는 운동성을 표방한 ‘시민운동’을
시작한다. 2001년 10월 1일 현재 환경연합은 전국 47개 지역조직과 8만명의 회
원이 함께 하는 동북아시아
최대의 환경단체로 성장했다. 창립 당시 환경연합의 슬로건은 ‘환경은 생명이
다’였다. 그로부터 만 8년이 지난 새천년의
오늘, 당시의 테제는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인류와 지구의 생존에 관한 더
욱 절박한 명제가 되었다. 시민환경운동체로서
환경연합은, 나라와 세계의 영역에서 신뢰받는 거버넌스를 사회적으로 구축하라
는 무거운 책임을 환경을 생각하는 시민들로부터
부여받고 있다. 2002년 지자체선거를 앞두고 환경연합은 사안별 대응을 넘어 지
역으로부터 정책의 녹색변환을 기초하는
새로운 차원의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 지금은 새로운 출발의 시작이
다.




공추련은 90년 4월 22일 서울 남산에

20주년 세계 지구의 날 행사를 국내 최초로 개최했다.

상봉동 연탄공장 밀집지대에 살던 박길래씨
는 광부들만
걸리다던 진폐증에 걸렸다. 그녀는 발병 이후 환경운동가로 변신해 2000년
타계할 때까지 환경운동에 헌신했다.
사진은 90년 지구의 날 행사에 참여해 공해병없는 세상을 위해 싸우자는 연
설을 하고 있는 고 박길래씨

91년 3월 두산 전자공장의 낙동강 페놀오염
사건이 발생해
전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공추련을 비롯한 사회각계는 규탄대회를 열었다

페놀로 낙동강을 오염시킨 두산기업에 대한
전국적인 불매운동이
본격화됐다. 맥주를 쏟아버리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공추련 활동가들과 공동
대책위 위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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