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은 원칙이 될 수 있을까?
비건(지향)일기 – 지미⑤
나는 비건을 지향하고 있고, 다행히 같이 밥 먹는 주변인 대다수로부터 배려받는다. 열 곳을 거쳐 하나를 찾는 수고와 챙김 덕분에 내가 여전히 내 자리에 있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나의 식사를 배려해주는 이들과 내가 함께 하는 일이 ‘기후 운동’일 때, 나의 감정은 다만 다행스러움에 머무르지 않는다.
동물해방, 동물권 논의의 고전으로 얘기되는 명제들이 있다. 어떤 존재가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 즉 윤리적 기준을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의 유무로 삼아 비인간 동물까지 도덕적 고려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피터 싱어의 말,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존재를 대해야 한다는 ‘내재적 가치’를 동물에게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톰 레건의 말이 대표적이다.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존재를 대해야 한다는 말, 그 존재의 범주에 고통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급진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아는 동물 얼굴을 한 번씩 떠올려본다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동시에 이는 지금의 대규모 공장식 축산업과 육식 문화에 전면으로 부딪힌다. 인간은 오로지 먹기 위해 매일 동물을 죽이고 또 출생시킨다. 끊임없이 착취하고 버리고 죽임으로써 가능한 자본주의 사회는, 폭력적인 출생과 죽음의 반복인 이 거대한 산업 덕분에 유지된다. 우리는 이제껏 쫓아온 ‘성장’이 죽음을 대가로 유지된다는 것도, 이를 제대로 직면하는 일은 이 거대한 산업과 결별하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기후위기 역시 성장을 쫓다 닥친 재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에너지원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본적 성질에 대해 성찰하며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비거니즘은, 그중에서도 동물을 먹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기준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있지 않다. 위기 이후의 사회는 분명 착취와 축적에 기반한 성장이 아니라 공생과 순환을 기본으로 삼아야 하며 그 조건 중 하나로서 비건 역시 있다. 인간 중심적인 상식을 벗어나, 기후위기를 통해 확인한 최전선의 존재들에 대해 확장된 권리를 요청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나의 비건은 내가 먹는 밥 한 그릇이 채식일 수 있게끔 배려받는 것으로 충분할까? 권리가 확장되는 과정에서는 누가 동등한 존재인지에 대한 상식이 바뀌며, 많은 소수자 운동에서 이는 완료된 변화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이다. 동물이 인간과 함께 삶의 주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또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는 아직 모른다. 그럼에도 질문해본다.
더 많은 주체를 포함해야 한다며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제안하는 ‘기후정의’ 운동에서 동물 역시 주체로 함께 할 수 있을까? 비건은 우리의 원칙이 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