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순환 활동소식

조강(祖江), 영원한 한반도의 할아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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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祖江), 영원한 한반도의 할아비 강
  
 장강이 닻을 내린다.

 

  저 아스라한 백두대간의 기슭마다, 또는 크고 작은 정맥 봉우리의 계곡마다 작은 물방울 몇몇이 서로 살을 섞어 맨 처음 수줍고 앙증맞은 첫걸음을 떼던, 그 아름답고 황홀한 강물 한 줄기가 마침내 천릿길 대장정의 닻을 내린다. 길고 짧은 인간의 한 생애가 그렇듯 지난날들 돌아보면 저마다 애틋하고 눈물겹지 않은가. 그리하여 마침내, 그 시작과 삶의 날들은 비록 수천 갈래였으나 종당에는 저렇게 남김없이 한 몸이 되고 마는 것이다. 큰물이 작은 물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깨끗한 물이 더러운 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남쪽 아래로는 충청북도 속리산 천왕봉 기슭에서 거슬러온 물줄기도 있고, 북쪽으로는 함경남도 덕원군 땅인 마식령이나 아호비령(임진강 발원지) 자락에서 내려온 물줄기도 있다. 그 가운데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에서 시작하여 가장 먼 길을 달려온 물줄기는 497.5km, 물경 1,240리 길을 흘러왔다. 달려온 길의 길고 짧음이야 또 무에 그리 대수겠는가. 금강산 아래 무산에서 흘러온 물도,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월악산에서 흘러온 물도 거대한 외줄기 장강이 되어 바투 바다에 몸을 섞는 것을. 화엄경에 이르면 여타의 모든 경전들이 다 부질없으므로 그저 화엄대해(華嚴大海)라 부르듯, 한반도 중부지방의 여울이란 여울은 죄다 이곳에 모여 다만 조강이란 이름으로 바다에 든다.
 
  여기는 대한민국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한남정맥의 종착역, 김포 문수산
 
  바다가 가까워지면 땅의 존속들은 슬슬 채비를 걷고 행차의 마무리를 시작한다. 땅에서도 물이 산을 만나면 이내 돌아서고 산이 물을 만나면 금세 산이기를 접지 않았던가. 하물며 바다 앞에 이르러서야 산이든 물이든 이제 강산의 섭리와 추억을 거두어들이고 육지 존속으로서의 마지막 숨결을 가다듬는다.
 
  한강의 남쪽 울타리, 그 한남정맥의 시작은 속리산 천왕봉이다. 예부터 천왕봉의 물을 삼파수(三派水)라 불렀다. 천왕봉 꼭대기에 내리는 빗물이 동남으로는 낙동강, 남서로는 금강, 북서로는 한강이 되어 갈라지기 때문이다. 이곳의 물을 들먹이는 옛글에 흔히 보이는 삼타수(三陀水)란 명칭은 다만 삼파수가 절집의 입맛에 맞게 비틀린 말이다. 기왕 이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하자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으레 이곳을 천황봉이라 불렀다. 나라 산천의 이름이 대부분 불교에서 왔으니 불교에는 없는 말이 바로 천황이므로 모두 천왕봉이 옳다. 누구의 짓인 줄이야 따질 필요도 없겠지만 영암 월출산 천황봉을 비롯하여 함양의 천황산, 통영 앞바다 사량도의 봉우리까지 아직도 천황봉이라 부르는 이름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각설하고, 속리산 천왕봉에서 한강과 금강을 가르며 뻗어나가는 한남금북정맥은 말티고개를 지나 청주의 산성고개, 음성의 행치고개를 거쳐 안성 칠현산에 닿으면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금북정맥은 금강의 북쪽 울타리가 되어 공주 차령을 거쳐 태안의 안흥에서 막을 내리고, 한남정맥은 그로부터 수원의 광교산과 안양의 수리산을 거쳐 김포 문수산(해발376)까지 이어지며 한강의 남쪽 울타리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한다. 높은 산이든 낮은 산이든, 도시든 김포 들판이든, 천왕봉에서 문수산에 이르는 한남정맥 산줄기는 그렇게 한 틈의 오차도 없이 외줄기로 이어지며 끊이지 않는다.
 
  육지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마치 강물처럼 흐르는 바다를 예부터 염하(鹽河)라 하였다. 바다이되 강을 닮았으니 참으로 맞춤한 이름이다. 중국 사람들은 민물의 이름을 크기에 따라 천(川), 강(江), 하(河)로 나누어 불렀다. 중국의 황하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 종종 우리나라엔 하(河)가 없다 하지만, 분명 이곳 염하는 우리 선인들의 인문학 수준을 보여주는 절묘한 강이면서 바다이다.
 
  강화대교에서 염하를 따라 두어 마장 거스르면 문수산성 들목이다. 문수산성은 바다 건너 갑곶진의 돈대와 더불어 염하의 길목을 지키는 요충이었다. 멀리는 대몽항쟁의 이야기가 남아있고, 가깝게는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격전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산성의 문루에 올라 염하를 바라보면 한성의 들목을 지키던 군장들의 함성이 여태 쟁쟁하다. 문수산성에서 바닷가 해안선을 따라 완고하게 늘어선 철책과 나란히 두어 마장쯤 더 들어서면 민통선 마을 보구곶리(甫口串里)가 나오고, 마을이 끝나는가 싶으면 바리게이트와 함께 군인들이 길을 막는다. 바리게이트 뒤편의 야트막한 구릉을 넘으면 지호지간에 한강의 법정하구선인 머머리섬(유도,留島)이 떠 있지만 사정을 해 본들 군인들이 길을 열어줄리 만무다. 대설주의보의 눈보라에 묻혀 산발치 아래로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도 바다도 이내 보이지 않는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사진 찍으시면 안 됩니다.”
 
  때때로 서로 난감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면 그쯤에서 냉큼 접는 게 상책이다. 그렇다고 낙심천만하여 천근만근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설 필요도 없다. 세상 어디든 길은 또 있기 마련이니….
   

▲ 한강의 남쪽 울타리인 한남정맥이 끝을 맺는 김포 문수산에 위치한 문수산성. 바다 건너 강화도의 갑곶진 돈대와 더불어 염하의 물길을 지키는 관방의 요새였다. ⓒ김하돈

 


▲ 문수산성에서 바라본 강화대교 ⓒ김하돈

 


▲ 김포와 강화도 사이로 강처럼 흐르는 바다를 예부터 염하라 불렀다. 문수산성 문루에서 바라본 염하와 바다 건너 강화도 갑곶진. ⓒ김하돈

 

▲ 한강의 법정하구선은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머머리섬(유도)이다. 그러나 보구곶리가 민통선 마을인 탓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김하돈
 

 

  한강하구 최고의 전망대, 애기봉(愛妓峰)
 
  보구곶리에서 문수산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강변을 향해 방향을 바꾸면 거기 육지의 것들과 바다의 것들이 서로 현묘한 경계를 이루고, 하늘과 땅이 또한 보여줄 수 있는 장엄진경을 한껏 펼쳐내어 망연히 시간을 잊고 서게 하는 전망대가 하나 있다. 바다와 뭍이 그만하고 하늘과 땅이 그러하므로 인간이 철책선 몇 겹으로 가로막은 남녘과 북녘의 경계마저도 다만 속절없이 부질없다. 1.5km. 딱 그만큼 덧없는 시공을 사이에 두고 우리가 남한이라 부르고 또 북한이라 부르는 지구상에 하나 남은 분단국의 휴전선이 강심에 걸려있다. 그런 것쯤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제일 큰 지류 임진강을 맞아들인 한강이 조강이 되어 강화바다와 주고받는 점입가경의 통과의례가 참 눈물겨우면서도 가슴 시리도록 웅장하고 또 황홀하다.


▲ 평양기생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는 애기봉 전망대는 한강하구의 위용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김하돈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강 건너는 지금은 개성직할시 판문군이 된 옛 개풍군 땅이다. 고려도읍 송도의 진산 송악산(해발489)을 경계로 북쪽이 개성이요 그 남쪽이 바로 개풍군이다. 고려의 첫 임금 태조와 마지막 임금 공민왕의 능(陵)이 나란히 그곳에 있고, 조선건국을 반대했던 고려 72현이 들어가 숨어 살았던 두문동은 개풍군 광덕면이다. 조선시대에는 그곳을 해풍군 또는 풍덕군이라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힌 당시 인구는 792호에 1381명이다.
 
  날이 좋다면 송악산이 빤히 건너다보이는 곳이지만 눈이 머츰한 사이에도 가물거려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결코 없는 것이 아니니, 강물 한 가운데 그어놓았다는 휴전선은 통 보이질 않으나 분명 아직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휴전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아스라이 오두산 전망대가 보이고, 임진강과 한강이 서로 자웅을 겨루며 으르렁대는 전류(轉流)의 물결이 한 눈에 들어온다. 큰물이 서로 몸을 섞으며 달아오른 기꺼움을 주체할 수 없으니 그 물살이 일으키는 격정의 회오리를 예부터 전류라 불렀다. 김포 전류리 마을은 이에 얻은 이름이며 강가엔 전류정(轉流亭)이 있었다.
 
  전망대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한강의 종착역 보구곶리 머머리섬이 마침내 표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보구곶리에서 구태여 군인들에게 통사정을 하거나 실랑이를 벌이지 않아도 되는 까닭은 바로 이곳 애기봉의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조강의 물길이 머머리섬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돌면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염하 물길이며, 곧장 나아가면 오른쪽에서 흘러드는 예성강 하구의 물과 섞여 바야흐로 대해를 바라보게 되니 큰 바다로 나가는 대하를 마지막으로 가로막고 있는 섬이 바로 교동도다. 설령 날이 좋더라도 교동도까지 보일 리는 없지만 예성강이 돌아 나오는 북녘 땅 개풍군 끄트머리가 아득히 펼쳐진다.
 
  애기봉 전망대에서 자리를 뜰 즈음에는, 왼쪽 아래편으로 강 건너에 이르는 물길을 한 번쯤 눈여겨 보아두는 것도 괜찮다. 그 물길이 바로 저 유명한 조강도(祖江渡), 조강나루이다. 일찍이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가 나루를 건너면서 부(賦)를 지었다. “여러 물이 한데 모여 급히 흐르니 솥 안에 끓는 물이 용솟음치는 듯하네. 이무기와 악어가 입 벌리고 침 흘리는지, 독룡이 숨어 엿보는지 알 수 없구나. 그저 빨리 건너고만 싶은데 배는 가는 듯 멈추어 섰네. 해도 지지 않았는데 사방은 어둡고 바람 불지 않는데 파도 거칠구나.”


▲ 애기봉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강의 끝. 왼쪽 중앙에 작게 보이는 섬이 머머리섬이다. 머머리섬을 돌아 왼쪽으로 내려가면 염하 바닷길이고, 곧은 물길은 오른쪽 끄트머리 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예성강 하구와 합쳐진 다음 강화 교동도를 지나 서해로 들어간다. ⓒ김하돈

 


▲ 애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지역. 지금은 개성직할시 판문군이 된 옛 황해북도 개풍군 땅이다. 고려 태조와 마지막 임금 공민왕의 능이 있고, 고려 72현이 숨어살았던 두문동이 그곳에 있다. ⓒ김하돈

 


▲ 애기봉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지점. 오른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한강이고 왼쪽 위편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물이 임진강이다. 그 가운데 작은 봉우리가 교하의 오두산전망대이다. ⓒ김하돈



▲ 김포의 조강리와 개풍군 하조강리 사이를 오가던 조강나루. 강 중심으로 휴전선이 지나가고 양쪽 강변은 민통선 철책으로 막혀있지만, 조강리가 경부운하의 한강하구 첫 번째 터미널 예정지로 거론된 이후 이미 수차례 부동산 투기의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김하돈

 

 

  분단의 슬픔 마주 손짓하는 조강나루
 
  애기봉에서 나오는 길에는 김종직(1431-1492)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스물여덟의 나이로 죽고, 갑자사화 때 다시 부관참시의 거듭 죽임을 당한 사림의 풍운아 한재 이목(寒齋 李穆, 1471-1498)의 묘와 사당이 있다. 부패한 권력의 시대를 사상과 담론의 시대로 옮기고자 했던 조선의 초기 사림이 굴절되는 수난기에 거푸 참혹을 당한 그의 생애를 위해 한번쯤 들러보는 일도 괜찮을 성 싶고, 또 그가 생전에 지었다는 「다부(茶賻)」는 차를 즐기는 이들이 저 초의선사(1786-1866)의 「동다송(東茶頌)」에 견주는 것이니 이를 한번 음미해도 좋으리라.

 


▲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죽은 한재 이목의 묘. 애기봉 전망대 입구에 있다. ⓒ김하돈

 

  한재당에서 월곶면 소재지나 하성면 소재지로 통하는 큰길로 나왔다가 다시 그 두 길을 모두 버리고 강변을 향해 막다른 길을 선택하면 옛 나루 마을 조강리가 나온다. 분단과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강리는 해운과 수운으로 번성했던 옛 영화를 말끔히 잃고 역사 속의 가장 후미진 뒤안길에서 지난 반세기를 보냈다. 조강물참을 기다리던 외국의 상선이나 세곡선이 이물과 고물을 서로 맞대어 잇고 장사진을 치던 나루. 그 한강과 서해바다 뱃길의 역사 역시 분단과 함께 기꺼이 막을 내렸다.
 
  서해안을 따라 경강으로 드는 배는 물살 거칠기로 유명한 염하를 거슬러 올라와 다시 조강나루에서 물참(물때, 만조)을 기다려야만 했다. 조강의 조수는 밀물이 8시간을 들고 썰물이 4시간을 난다. 거센 기세로 밀어닥치는 밀물의 파장은 경강의 서빙고까지 미쳤다. 일찍이 조강 여울의 위용을 몸소 겪은 바 있는 이규보는 이 조강물참을 아예 시로 지어 남겼으며, 토정 이지함은 물참을 노랫말로 만들어 드나드는 사공들이 불렀다고 한다.
 
  눈 속에 묻힌 조강리는 여느 산촌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한적한 강촌이었다. 강마을이되 강이 보이지 않으니 그런 줄만 여기고, 민통선 마을이되 철책이나 병사들이 보이질 않으니 또한 그런 줄만 여기면서 마을을 돌아다녔으나 좀체 사람마저 보이지 않는다. 강변에 둑을 쌓아 만든 조강저수지가 있는 마을 끝에 이르니 비로소 거기 바리게이트와 함께 병사들이 길을 막는다.
  


▲ 조강리 마을 끝에 있는 조강저수지에 서 있는 민통선 경고 표지판. 왼쪽 저수지 둑 너머가 조강나루가 있던 한강이다. ⓒ김하돈

 

  조강리는 분단으로 끊어진 강 건너 북녘에도 있다. 나루까지는 내려가지 못한다 해도 조강리 철책선 너머에서 강 건너 개풍군의 윗조강리와 아랫조강리를 건너다 볼 수 있을까 하였으나 역시 꿈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경부운하의 한강하구 첫 번째 터미널예정지로 조강리가 거론되고 난 뒤 마치 폭풍과도 같은 부동산 바람이 지나갔다고 한다. 나는 눈보라 속에 붉은 바탕색 선연했던 민통선의 ‘검문중’ 표시판을 떠올렸다. 통일부마저 없어진다는 마당에, 휴전선으로 강물이 막히고 민통선 철책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이 최전방 마을에 뜬금없이 운하와 터미널을 운운하며 맨 먼저 투기광풍부터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냉혹한 현실이다. 반세기 넘게 분단선으로 고립되어 팍팍한 삶을 살았던 민통선마을 사람들에겐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외지인들로 하여금 동네 민심이 흉흉해지는 일 자체가 이미 재앙이다. 사람의 생리로 전답과 집값이 오르는 일이야 불감청고소원이겠지만, 돈 몇 푼 받고 떠날 사람은 떠나고, 손에 쥔 거 없어도 고향에 남겠다던 이들이 끝내 휘황해진 고향 풍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삶을 그르치는 풍경은 이 나라 땅에 이미 부지기수이다.
 
  아, 조강리의 운명은 어찌 되려는가?
 
  조만간 조강나루에 다리를 놓고 4차선 도로를 북녘으로 통하게 하려는 계획이 이미 추진 중인 모양이다. 경강의 물길과 서해안의 뱃길이 물류든 아니면 유람뱃길이든 다소나마 복원된다면 이 조강나루 뱃길의 역할도 어느 정도 살아날 것이다. 또한 배로 건너던 조강나루를 다리로 건너면서 옛 교통의 길목이 누리던 영화를 다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이라면 휴전선을 걷어내고 물길을 복원하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와야 한다. 그러나 다만, 그 어떤 가정과 상상을 동원한다 해도 조강나루와 경부운하는 결코 연결되지 않는다. 대체 어느 미친 사공이 조강나루에서 내륙으로 배를 몰아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어 부산으로 가겠는가? 아니 그러한 물길이 이 땅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경강이나 서해안 물길에 훤한 뱃사공들이 인정이나 하겠는가?
 
  조강리를 이미 몇 차례나 휩쓸고 지나갔다는, 경부운하 첫 번째 터미널이란 이름으로 몰아닥친 부동산투기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지난 천년 세월 동안 조강나루를 건너다닌 숱한 시인묵객들이 다투어 글을 남겼다. 그 가운데 단연 절창으로 꼽을 만한 것이 고려 시인 백원항(白元恒, 생몰미상)의 시다. 천년 세월이 사이에 걸렸지만 예나지금이나 나라와 세상일을 걱정하는 시름은 변함없이 조강나루를 적신다.
 
  나룻배 떠나려니 밀물이 가로막아(小舟當發晩潮催)
  강가에 말을 매고 홀로 쓴웃음 짓네(駐馬臨江獨冷咍)
  언덕 저편 세상일은 언제 끝나려는지(岸上世情何日了)
  앞사람 건너기 전 뒷사람이 또 왔네(前人未渡後人來)
 


  조강이여 지금처럼, 아니 옛날처럼
 
  철책과 나란히 달리는 김포 제방도로를 지나 새로 놓인 일산대교로 한강을 건넜다. 자유로에 실려 파주출판단지를 지날 즈음 전에는 보지 못했던 개성과 평양을 알리는 이정표가 머리 위로 스쳐지나갔다. 그래 모두 예서 얼마 되지 않는 곳들이지. 이 길로 대통령이 승용차를 타고 그곳을 다녀왔으니 이젠 그런 이정표가 길가에 걸려도 그리 낯설지 않게 되었다. 운전을 하면서 왼편으로 힐끗 쳐다보니 서울을 천천히 빠져나온 한강이 바투 오두산의 합강(合江)을 앞에 두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었다. 저 철책선만 좀 걷어내도 좋으련만.
  

▲ ⓒ김하돈

 


▲ 민족의 비극 휴전선은 한강하구의 물길 한가운데로 그어졌다. 때문에 한강하구의 강변은 온통 민통선 철책으로 막혀있다. ⓒ김하돈

 

  아니다. 지금 같아서는 저 철책선이 그래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누구라도 한강하구나 조강나루의 애기봉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한강이야말로 정녕 얼마나 위대한 강인 줄을 사무치게 절감한다. 세상의 그 어떤 도시보다 축복받은 도시가 서울인 것을, 그 어느 도시의 강물보다 아름답고 웅혼한 강이 바로 한강인 것을 온몸으로 전율처럼 느낀다. 그 한강하구는 참 슬프게도 조국의 가장 큰 생채기로 말미암아 그래도 본래 모습을 지켰다. 이로부터 나라 산천에 걸린 숱한 강변마다 사람들이 들어서고 개발이 밀려가 강의 속살이나 은밀한 지경까지 거덜을 내놓은 것을 떠올리면, 통한의 분단선이 그래도 이곳을 철책 안에 가두어 저리도 곱게 품어두었던 심사를 알 것도 같다.
 
  사람들은 왜 강이 온전해야 비로소 나도 온전하다는 간단한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일까? 내 이웃이 살인을 즐긴다면 내가 곧 그의 목표가 되듯이, 내가 살아가는 산과 물이 생명을 버리고 살기를 품는다면 그 살기의 대상이 곧 나임을 왜 인정하지 않을까? 이 땅, 어머니 대지가 품어 안은 인간 이외의 뭇 생명들은 인간에 대한 복수로 하나씩 스스로 혀를 깨물어 멸종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그들이 전부 사라지고 난 다음 인간만이 난무하는 이 문명의 지상낙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두산 전망대!
 
  북녘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임진강이 이곳에 이르러 제 이름을 버리고 한강이 된다. 그 장쾌하고 늠름한 이름이 너무 아까워 한강의 지류임에도 옛 사람들은 임진을 독립된 강으로 대접했다. 그리하여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교하 오두산 앞에서부터 한강이 끝나는 머머리섬까지를 조강이라 불렀던 것이다. 조강 할아비의 두 아들이 임진강과 한강이며, 임진강의 지류 한탄강이나, 한강의 두 갈래 남한강과 북한강은 손자 강이다. 북한강의 소양강이나 남한강의 동강과 서강은 증손자 강이 되는 셈이니, 산천이 무릇 말이 없다 하여도 사람이나 매 한가지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모셨던 까닭이다.
  


▲ 북녘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임진강이 파주 교하 오두산전망대 앞에서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김하돈

 


▲ 한강과 임진강과 만나는 지점부터 머머리섬까지를 예부터 조강이라 불렀다. 왼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봉우리가 차례로 김포의 애기봉과 문수산이고, 오른쪽 강 건너는 북한이다. ⓒ김하돈

 


▲ 태백 검룡소에서 천이백리 길을 달려온 한강이 서울을 지나 조강으로 흘러오고 있다. ⓒ김하돈

 


▲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지점. 오른쪽이 임진강, 정면이 바다로 나가는 조강 물길이다. ⓒ김하돈

 

  한 여름에도 반소매 옷은 소름이 돋는 곳이니 눈보라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의 오두산 전망대는 담배 한 대 참을 서 있기도 어려울 만큼 되우 추웠다. 그래도 오래 오래 버티고 서서 나는 한강이며 임진강이며 조강을 번갈아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조상들의 삶의 내력이 마치 저 용비봉무의 장강 물결처럼 수 천 년을 이어 온 것을, 큰 산을 보마고 히말라야를 갈 일이 무엇이고 큰물을 보마고 황하 요하를 넘볼 일이 무엇이겠는가. 무릇 이 나라 산천의 기백과 정신이 백두대간과 그 품안에 깃든 크고 작은 강줄기에 현묘하게 어리고 서렸으니, 다니면서 보라! 저 지혜로운 이들이 진즉 어느 곳에 나라를 세우고 어느 곳에 삶터를 만들었는지. 그리하여 얼마나 가슴 벅찬 이야기 속에 지금 우리가 들어앉아 펄럭이며 나부끼고 있는지. 다시 그리하여, 부디 산과 강을 그대로 두시라! 이 강산 아직은 죽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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