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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쓰레기제로운동과대안적생활양식 – 대안적 생활양식과 문명적 비전을 위한 수행과 영성

안녕하세요?
바쁘신 데도 많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특히, 토론과 발제, 사회를 맡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
니다. 저희들이 쓰레기 제로 운동을 시작한지가 5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
듭하고 또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문제를 정토회 내에 간직하지 않고 시민사회가 함께 하고
자 자리를 만들었고,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를 가지고 다시 힘을 합해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
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환경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
다. 옛날에는 환경 운동하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만, 지금은 전 국민적으로 또는 전 세계적으로 환경문제가 가져오는 심각한 문제, 단순히 질병이
나 건강을 해치는 그런 정도의 문제가 아니고, 오존층파괴, 기후변화 등의 문제는 인류뿐만 아니
라 지구상에 사는 전 생명이 공멸할, 그런 위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좀 저극적인 획기적인 정책, 삶의 변화가 오지 않는가? 이것은 아
마도 우리가 환경문제를 유발하는 개발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문제
를 유발시키는 삶의 태도, 삶의 방식은 바꾸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좀더 적극적으로 말
하면, 환경 운동을 하는 환경운동가들 마저도, 환경문제를 유발시키는 삶을, 삶의 태도를 멈추려
고 하는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만큼,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우리
들의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결국은 인생을 살아가는 인생관, 가치관
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결국 가치관이 바뀌어야 삶의 태도를 바뀔 수 있다. 그러면 가치
관을 바꾸려면 인생관 가치관의 기초가 되는 세계관이 바뀌어야 된다. 그런데 까지 생각해 본다
면, 환경운동은 단순한 여러 시민운동 사회 가운데 한 영역이 아니고, 소위 인류가 지금까지 추
구해왔던, 근대문명, 어쩌면 더 이전부터 인류가 추구해왔던 인류 문명에 대한 전환을 요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환경운동은 이제, 환경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한발 더 낳아가서
문명 전환운동, 신문명 전환운동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또 환경적 가치
가 개발 정책을 입안할 때만 환경적 가치를 주요하게 다룰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윤리, 정의
까지도 환경윤리에 토대를 두고 이러한 것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러면 환경문제를 유발시키는 현대문명의 특징을 과학기술문명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
지 않고, 현대문명의 특징은 소비주의 문명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은 소비주의의 소위,
복무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문제로 삼아야 될 것은 과학기술에 문제
를 삼을 것이 아니라 소비주의에 대해 문제를 삼아야 하지 않을까? 소비주의자라는 것이 무엇인
가? 많이 소유하는 것이 잘사는 것이다. 행복의 척도가 소비의 수준의 정도로 표시되는 그런 삶
에 길들여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사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
기에 대량 소비를 위해서는 대량생산을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과학기술
이 개발되고 이용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없는 성장주의, 소위 경제성장이 조금이라도
멈추면, 나라나 즉, 국가나 사회나 삶이 큰 위협에 빠진다 하는 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소위, 대량생산은 한정된 지구자원에 있어서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를 가지고 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자원고갈이나 하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량소비는 결국 대량의
폐기물을 배출하기 때문에, 이것이 가져오는 부작용, 소위 환경오염이 우리들에게 심각하게 제
기되고 있다. 결국, 생명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세 가지는 공기, 물, 식품인데, 이런 공기와 물
과 식품이 오염된다는 것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잘살기 위
한 것이 결국은 우리들의 삶의 토대를 파괴함으로써 공멸의 위기에 치닫고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
다. 이런 것들을 예전에는 자각하지 못해서 그랬다고 치더라도 지금은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는
데도 왜 개선이 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소비중독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마약이나 담배를 섭취 했을 때, 중독 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처
음에는 모르다가 일정시간이 지나면 건강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아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미
중독 되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오늘날 소비주의는 이미 우리들에게 건강을 해치고 삶의 터전
을 파괴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을 일종의 소비중독현상이다. 라고 볼 수 있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그 누구도 이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각한 사람까지도 이것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에 중독 되어있고,
쇠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거대한 질주에 한 발 벗어나면, 마치 세상으로부터 낙오되는 것
같기 때문에, 개인의 삶도 사회도 하나의 국가도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데에서 불교 경전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의 행진> 이라고 하
는 내용을 보면,
<숲 속에 동물들이 아주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토끼가 도토리나무 밑에서 자다가 갑자기 큰 소리를 듣고 놀랐습니다. 하늘이 솟고 땅이 꺼지는 듯한 진동을 듣고, 토끼가 놀라서 정신없이 도망을 가고 있는데, 노루가 토끼를 불러서 왜 뛰어가냐고 물었습니다. 토끼는 아무 말 없이 뛰었고, 노루가 긴가민가하면서 토끼를 따라갑니다. 토끼와 노루 두 마리가 뛰어가 고 있는데, 다른 짐승이 또 묻고, 이렇게 하다가 짐승들이 하나하나 합류가 되어 함께 달려갑니 다. 그러나 달리다 보니, 노루는 토끼보다 빨리 뛰어가는 것이 앞서 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서로 빨리 달리려고 속도 경쟁이 붙었습니다. 그러나 숲의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는데, 아무도 그것 을 알지 못하고 옆에 있는 짐승보다 빨리 달리려고만 하고 있었습니다. 숲 속의 왕인 사자가 이 이야기를 듣고, 길을 막고 소리치며 짐승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디에 가느냐? 누가 그랬느냐? 봤 느냐? 하고 묻자, 서로에게 책임을 묻다가 끼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토끼가 들었다고 대답하고 그 장소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도토리 하나가 토끼의 귀에 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 토리 소리 하나에 놀라 숲 속 짐승들의 질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숲 속의 동물들
은 어리석은 중생들의 삶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경전을 읽을 때마다, 오늘 우리들이 소
비주의로 치닫고 있는 삶이 바로 이 숲 속 동물들의 질주와 같다는 생각이 들고, 나라마다 서로
앞서 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하고 나라 안에서는 지역마다, 기업마다. 또는 개개인은 개개인대
로 이렇게 오직 조금이라도 더 GDP 수가 좀 더 올라가는 것, 소비수준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
는 것에 완전히 쇠뇌 되어 있다. 특히 한국인들은 지난 40년 가까이 오직 매년, 매년 성장 중심
에서 우리의 젊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당연히 한해가 거듭하면, 수입이, 소비수준이, 옷의 개
수가, 집 크기가. 뭔가 하나씩 늘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에 살고 있다. 이 숲 속의 동물
들이 어떤 경고를 해도 무시하고 오직 질주를 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들도 오직 이렇게 소
비를 향해서 치닫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지금은 어디정도까지 왔는가? 맑은 공기를 다 오염시켜
놓고, 비싼 공기 청정기를 집집마다 사놓고, 청정기가 있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맑은 물
을 다 오염시켜놓고 집집마다 정수기를 사서 돈을 주고 물을 사서먹고, 식품을 오염시켜 놓고,
무공해 식품 이라고 해서 2-3배 비싸게 사서 먹고 있습니다. 요즘은 특히 웰빙 이라고 해서, 이
런 것을 갖춘 집이 아주 살사는 사람의 모범처럼 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앞으로 오존층을 파괴
해서 태양열이 우리 몸에 바로 쬐이면 피부암이 발생 한다. 해서 전부 우주복을 해 입고, 그래
서 우주복도 더 부드럽고, 더 세련되고, 더 빛깔 좋고, 더 비싸고, 더 비싼 우주복을 입고, 그것
을 패션화 시켜서 자랑하고, 그 좋은 우주복을 사기위해 더욱더 오존층을 많이 파괴하는. 마치
이런 상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 후세들이 오존층이 파괴 되서 피부암이 발생한다
면,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이와 같은 똑같은 행위.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다. 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런 곳에 태어나서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좋은 우주복 사는 것이 그들의 인
생에 꿈이 될 수 있는 이런 것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소비주의에 쇠뇌 되고, 중
독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새로운 문명, 소위 이런 어리석음,
거꾸로 된 이런 문명, 이런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러면, 새로운 문명이란 무엇인가? 저는 생명의 문명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생명을 어떻
게 정의할 것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저는 생명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삶은 어디에
서 온 말인가? 삶은 쓰임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가 빗자루를 쓰다가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 우
리는 “빗자루 가 명이 다했다.” 라고 말합니다. 기계를 쓰다가도 더 이상 쓸모가 없을 때, 명
이 다 했다라고 하듯이 죽음이라는 것은 쓰임새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삶이 라는 것은 쓰임새
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쓰레기라고 하는 것은 즉, 쓰임새가 없
는 존재들을 이름 하여 쓰레기라고 말합니다. 쓰레기는 바로 죽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쓰레기가
나오는 삶이라는 것은 시체를 만들어 내는, 즉 죽음의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
연의 상태에서는 쓰레기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서로 쓰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생명현상으로 바
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문명은 곧 쓰레기 문명으로 지칭이 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죽음
의 문명이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쓰레기가 생기는가가 문제이다. 자연에서도 다 쓰
고, 옛날에도 우리가 다 썼는데, 쓰레기는 안나왔습니다. 그런데 왜 요즘은 한없이 나오는가? 첫
째, 우리가 잘못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쓰는데, 살리도록 쓰는 것이 아니라 죽도록 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쓸 때, 아이들에게도 두 가지 쓰임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보호한다고 아무것
도 시키지 않고, 밥만 먹게 한다면, 이 아이는 나중에 사람으로서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어릴 때부터 먹고 사는데, 너무 일만 시키면, 제때 배울 기회를 놓쳐서 또한 망치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 지나쳐도 죽이고, 안 써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심
부름을 시키는 것은, 그것은 아이들을 쓰는 동시에 아이는 그것을 통해서 배우는 과정이 된다.
그러면 우리가 쓸 때 어떻게 써야 하는가? 쓸 때는 살림으로 써야합니다. 그래서 기계나 집이나
물건을 쓰지 않고 가만히 놔두는 것이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잘 쓴다는 것은 그것의 수명을 오래
도록 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쓰는 것을 잘 써야 하는데, 그렇게 쓰지 못하는 것을 오용이
라 하고, 둘째는 안 써도 되는데 지나치게 쓰는 것을 과용이라고 합니다.
오용이나 과용으로 인해서, 못 쓰게 되는 현상. 즉 쓰레기. 죽음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쓰
레기를 모아둔 곳은 누구든지 싫어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나 사람이라도, 살아 있을
때, 그렇게 좋아하던 부모자식이나 부부라도 죽으면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쓰레기를 다 혐오하는 이유는 쓰레기라는 것은 바로 죽은 시체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서 우리는 쓰레기를 연구해야 합니다. 쓰레기를 연구하면 현대문명의 오류나 모순을 볼 수 있
고, 그래서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삶이라는 것은 죽음이 없는 삶이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원
한 삶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종교와의
별개의 운동이 아니라 바로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의 삶과 아주 긴밀하게 일치하는 부분이라고 생
각합니다. 여기서 결국은 쓰레기가 없는 삶,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삶으로 나아가려면, 우리
가 죽이는 삶을 변화 시켜야 되는데, 결국은 삶을 변화시키려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하고, 가치관
이 바뀌려면 인생관이 바뀌어야 하고, 인생관이 바뀌려면 세계관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면 오
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무엇인가? 어떤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이런
인생관, 가치관을 갖게 되었는가? 바로 오늘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은 우리들의 모든 존재
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나하나가 모두 독립된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합니
다. 이 독립적, 개별적 존재의 집합니다. 이 세계는 개별적 존재의 집합이며, 인류사회도 그런
개별적 존재의 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구원을 이야기 할 때도, 개별적 존재들의 구원
을 말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개별적 존재의 집합이기 때문에, 홉스가 사회를 말한 “만인의 만인
에 대한 투쟁”처럼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존재들은 서로 경쟁하고 투쟁해서 승리를 하는 것을 목
적으로 할 수 박에 없다. 그래서 이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내가 살기위해서 너를 죽여하 하는
것을 정당하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젊은 시절에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농부가 채찍을 이용해서 소를 부리는 것을 보고, 관리가 노예를 학대하는 것을 보고, 심각
하게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가 살기위해 하나가 죽어야 하는가? 하나가 행복하
기 위해서 하나가 불행해야 하는가? 하나가 편리하기 위해서는 하나가 불편해야 하는가? 이 문제
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고 하고,
이것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무도 하지 않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진리고 받
아들이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아남느냐, 어떻게 하면 승리하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배우
는 모든 학문, 처세술의 기본. 어떻게 살아남느냐를 가르치지. 어떻게 함께 사느냐의 문제를 가
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고타마 싯다르타는, 결국 하나가 살기위해 하나를 죽
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삶의 허구를 보고, 결국 왕위를 버리고 함께 살 수 있는 길. 함께 행복
해 질 수 있는 길을 찾아서, 결국은 기존의 사회로부터 떠나서 길을 찾아 나섰고, 이것을 우리
는 출가라고 합니다. 결국 우린 이런 사회를 양육강식 또는 자연도태라고 하고 이것이 바로 생
존의 원리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생존의 원리에서는 지배와 피지배, 투쟁을 통해서 승
리와 패배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런 세상을 합리화 하고, 지지 않고 어떻게 이길 것인가가 주
관심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계관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관의 밑뿌리가
될 수 있고, 오늘의 종교뿐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마르크스 주위의 철학까지도 이러한 세계관
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관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개별 존재의 집합이 아니라, 그 존재들이 서로 연관된
하나라는 겁입니다. 마치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하나의 손바닥에 연결되어 있듯이. 각각의 손가락
이 모양도 다르고 개별적으로 움직이지만, 하나의 손바닥에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연관된 하나라
는 연기적 세계관, 이것이 있어야 하면, 저것이 있어야 한다. 내가 살기위해서는 너 가 있어야
한다는. 그래서 함께 살고 함께 행복해 지는 이것이 세계의 참모습이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승
패의 문제가 아니라 조화가 가장 핵심이다. 조화와 균형이 추구하는 이상이 된다. 이것은 붓다
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때, 바로 이러한 존재의 참모습을 깨달았다. 우리가 생태연못을 이야
기 할 때, 예를 들면, 태양빛을 받아서 플랑크톤이 살고, 플랑크톤을 먹고 물벌레가 살고, 물벌
레를 먹고 개구리가 살고, 개구리를 먹고 뱀이 살고..이러한 생태 연못에서, 개구리의 입장에서
보면 물벌레는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신의 축복이고 는 뱀은 자기들에게 있어서 사탄과 같은 악마
와 같은 존재이다. 만약에 뱀만 없다면 개구리에게 있어서 천국과 같은 곳이 된다. 이렇게 삶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개구리가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뱀을 죽였을 때, 일시적으로는 개구
리에게 천국이 도래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 것 같지만, 곧 시기가 지나면 개구리에게도 전멸
이 오게 된다. 그 때 개구리는 물벌레만이 자기 삶의 토대가 아니라, 뱀마저도 자기 삶의, 지속
적 삶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연기적 세계관입니
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똑같이 보더라도 양육강식, 자연도태의 관점에서 세계를 봐서는 안 됩
니다. 이런데서 우리가 경쟁과 투쟁, 승리와 패배의 가치관이 아니라, 조화와 균형이라는 새로
운 세계관에 입각한 가치관으로의 전환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쓰레기 제로운동은 이러한 생명
운동으로서의 쓰레기 제로 운동입니다. 그래서 쓰레기 제로라는 목표를 세우고 결국은 추진해 보
았을 때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를 연구해 보았습니다. 사실 이 실험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
다. 이 실험은 한 개인이 실험을 했을 때는, 데이터를 뽑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실험을 할 수 있는 좋은 단체가 군대라고 생각했는데, 군대에서는 강제에 의해서 이루어져서 결
과는 나올 수 있을지 모르나, 그 과정에 있어서의 자발성의 결여가 있기 때문에, 시민운동으로,
또는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때, 시민은 군대처럼 강요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할 수 있는 곳은 군대 밖에 없지만, 군대는 그렇게 하기도 어렵고, 했다고 하더라도 국가정
책으로 입안 할 때는 상당부분 어렵겠다. 다시 말하면, 상당부분 조금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
다. 그래서 두 번째로 생각한 것이 수행공동체에서 한번 실험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저희
들이 이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이 실험의 어려움은 결국, 삶의 태도를, 삶의 태도의 변화를 요
구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1.2차년도 에는 수행공동체로, 수행자로서 들어와
살고 있는 약 5-60명을 대상으로 적용을 했습니다. 그다음 차 년도에는, 이 공동체에 와서, 있
을 동안만 외부 사람도 여기에 동참하도록, 그 다음 차 년도에는 정토회 나오는 동조자들이 각
각 집에서 이 실험을 하도록 하고, 그렇게 하면, 어떤 반대에 부딪히고, 문제가 발생하는지, 지
금 여기까지 왔고, 다음 단계에는 일반국민에게 실험을 한 뒤에, 국가정책으로 입안이 되어야 한
다. 이렇게 국가정책으로 실험이 되어서 입안이 될 때는, 어떤 진행 중에 어떤 저항에 부딪히는
가? 부딪힐 때 그냥 후퇴할 것인가? 저항이 있지만, 일정한 계몽과 경과가 지나면, 극복이 되는
것이 있고, 또 이것은 시작하자마자 바로 되는 것이 있고, 교육에 필요성이 있는 것이 있고, 시
설개선의 보안이 되어야 할 것이 있고, 이런 것들을 미리 다 예측해서, 정책을 입안할 때만이 결
국은 성공을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정책으
로 입안 했을때,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은 후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은 어
떤 것 보다 도 더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버리도록 하기 때문에 여론의
동의로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상당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쓰레기 제로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89년도에 문경 봉암사에서 부목으로 일
할 때입니다. 그대 제가 머슴살이를 하면서, 선방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처리하면서 알게 되었습
니다. 수박을 반 쯤 먹고 버린 쓰레기도 있고, 빵이나 음식을 버린 것도 있고, 그곳 선방에서 나
오는 쓰레기를 가만히 치우면서 살펴 보았을때, 이 쓰레기를 보면서, 지금 선방에 살고 있는 사
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 이 분들이 제대로 수행을 않하고 있구나. 왜냐면, 수행을
하는 사람들, 현재에 깨어있는 사람들은 이런 쓰레기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선방 안
에 한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매일매일 나오는 쓰레기를 보면서, 이 분들의 수행의 상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 선방은 한 달 반 만에 불난이 일어나 멈추었습니다.
그럴 때, 밖에서 보면, 갑자기 일어난 일처럼 보이지만, 저는 쓰레기를 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
람들이 볼 때는 수행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행자의 마음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
다.
이런 것을 제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쓰레기의 성상을 분석해 보면, 우리들의 삶의 태도
와 방식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쓰레기 제로 운동을 시작해 보았습니다. 이런
쓰레기 제로로 가는데 있어서, 저희들은 잡은 방침은 첫째는 적게 소비하는 것입니다. 적게 소비
한다는 것은 소위, 소비주의에 대한 반대입니다. 저는 현대문명의 핵심을 소비주의라고 봤기 때
문에, 이 소비주의를 극복하지 않고는 문명적 극복을 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래서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자자, 의식주를 소탈하게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첫째 중요한 것
은 새 것 사는 것을 가능하면 적게 사기. 가능하면 있는 것을 쓰고, 둘째는 한 번 사면 끝까지
쓰기. 다시 쓰고, 나누어 쓰고, 바꾸어 쓰고. 고쳐 쓰기 그래서 못쓰게 되었을 때, 분리수거해
서 재활용하기. 그렇게 해도 남는 것은 결국 생산 않하기 방식으로 접근해 본다면, 어떤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진행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결국 가장 힘든
것은 인간의 습관입니다. 해오던, 알아오던 습관, 우리들의 삶의 습관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첫
째는, 무지를 깨는 것이고, 둘째는 습관입니다. 그런데서 환경운동은 문명 전환운동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고 보고, 적게 쓰게 운동은 개인에게 있어서 그 헐떡거리지 않아도 됨을 말합니다. 그
래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고, 결국은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참선을 한
다든지 어떤 방법을 해야 수행이 아니라, 삶에 헐떡거림이 없는 것이 최고의 수행이며, 그것이
바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가장 큰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적게 쓰기 운동
을 하려면, 물질적 가치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첫째, 영성개발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고양시키
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그렇게 깨우쳐 졌다 하더라도 , 습관을 극복하는 진한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기술적으로 함께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리고 적게 쓴다는 것은 결국은 남는 것인데, 이 남은 것을 이웃과 나누어 쓴다면 인간의 관계가
대립과 경쟁이 아니고 공정과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말하는 평화로
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셋째는 결국, 적게 소비하기 때문에, 자연을 적게 파고 하고, 환경을 본존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것이 바로 가장 좋은 환경운동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때, 적게 쓰기 운동은 개인에게는 수행이
되고, 사회에는 사회정의와 평화가 되고, 환경운동이 된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결국 이러한 운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발성입니다. 자의냐 타의나의 문제는 얼마나
큰 차이점을 가지고 오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적게 쓰는 것은 검소라 하고, 타의로 적게 쓰는
것은 가난이라고 합니다.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낮추면 겸손이라고 하고, 남이 높음으로서 자기
가 낮아지면 비굴하다라고 합니다. 스스로 일 하고 돈은 받지 않는 것은 봉사이고, 돈을 받지
못하면 강제노역 이라합니다. 남여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한 잠자와 한 여자가 아무것도 받지 않
고 있으면, 사랑을 나누었다고 하고, 돈을 주고 받으면 매매춘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돈을 주
고 일하는 것은 놀이라 하고 돈을 받고 일하면 노동이라 합니다. 목숨도 스스로세상을 위해서
버리면 순교라고 하고, 타의에 의해 버리면 살인 이다라고 하고, 스스로 재물을 주면, 보시라고
하고, 타의에 의해 주면 강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현상이지만, 자발성에 기초할 때,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문화가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적게 쓰고, 자기를 낮추고, 대
가 없이 사는 삶이 자발성에 기초한다면 성인(聖人)이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타
의에 의해서 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이
놀이가 되는 것이 노동이지, 노동 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많이 받는 것이 노동의 해방이 될 수
가 없다. 이런데서 저희들은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바꾸어 나가려고 하는 운동. 일 그리고 자
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수행이 둘이 아닌, 이러한 소위 ,일과 수행의 일치, 이런 관점에서 어
떤 새로운 문명의 비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쓰레기 대란 이라는 문제가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데, 저희 정토회관에서는, 20분의 1정도 쓰레기가 줄었는데요. 만약에 1년정도 쓰레기를 수거하
지 않아도, 우리가 도시에서 사는데, 도시에서 사는 삶의 공간에 쓰레기를 충분히 보관할 수 있
습니다. 저는 그런 측면에서, 서울 시민들이 이제껏 쓰레기를 경기도에다 버리고 살았지만, 앞으
로 못버리게 되어서, 서울시에 버려야 되어서, 서울시의 어느 구에다 버려야 하고, 각구가 다 싫
어하면, 그럼 각 구마다 세워야 하고, 각 구는 어느 동 앞에 세워야 하지만, 그 동네마다 다 싫
어하면, 각 동은 누구의 집 앞에 쓰레기를 버려야 하지만, 집집마다 싫어한다면, 결국, 각자의
집에 쓰레기가 안나오게 할 수 밖에 벗는데. 앞으로는 돈이 없어서 물건을 못사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 버릴 곳이 없어서, 새 물건을 못사는 시대가 올 줄 모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
들이 하고 있는 이 실험은, 저는 인류가 풀 한포기 약초하나를 입에 물어보고, 약인 줄 알고 독
초를 먹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독초를 발견한 것이 모여서 오늘 인류문명이 이루어 졌지, 무
슨 신이나 부처에게 빌어서 문명이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
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비하는 호화로운 삶 보다고 바로 인류가 안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해
답을, 조그만 단초라도 열어놓을 수 있다면, 저희 정토회는 아무것도 이 세상에 귀하지 않고, 이
것 하나만 하여도 큰 기여를 했다. 오히려 이런 관점에서 쓰레기 제로 운동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정토회의 노력이 특히, 일반대중들이. 보통 사람들이 시행한 것이니
까요 이것이 우리 시민단체, 국가기관에 잘 수용이 되어서, 우리나라가 단순히 2만불 시대라고
부르짖는 저런 잘살기 위한 무모한 질주의 대열에서 잘사는 나라가 될 것이 아니라, 인류문명에
있어서 인류에게 희망이 되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그런 나라가 되어, 우리 인류에게 오래도
록 기억에 남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글 : 법륜스님(정토회 지도법사)
자료출처 : 한국불교환경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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