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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문화 워크샵 – 인간과 흐르는 강 공유하는 문화보존을 위한 노력

강과 형성된 문화는 작은 실개천과 우물로부터 시작이 된다. 강은 물을 길
러다 먹는 우물로써의 역할, 동네의
아낙들이 빨래를 하는 장소로 널리 사용이 되는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
의 장소로 사용이 되는 곳이었다.
자연스레 이러한 하천은 함께 나누는 장소가 . 다소 불편하기는 하였으나
물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다소의 불편은 감수해야 하는 장소이자 마을사람들이 정감 어린 얘기를 나
눌 수 있는 장소로 제공되었다. 강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강속에서 먹거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강에서 생
산되는 먹거리는 항상 충분하게 공급이
되었기에 욕심부리지 않고 적당량 필요한 만큼만을 잡는 현명한 지혜를 누
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위주의
개발은 급박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는 강주변의 문화는 고려되지 않았다. 이
러한 개발은 강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과
강의 문화마져 붕괴시켜 강과 인간이 단절되고, 파괴되어 버렸다. 이는 우
리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의 철학이
서서히 잊혀지고 사라져 버리는 결과가 초래 되었다. 이제 이렇게 단절된
강과 사람과 함께 한 문화의 단절은
강을 멀리하게 되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되는 사이 환경의 파괴가 가속되고,
더 이상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되어 이를 위한 해결은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렇게 단절된 강과 더불어 사람간의 문화는 강이 형성된 긴 세월만큼이
나 다양하게 인간들의 삶과 문화를
형성하며 시대를 흐르고 있다.

동강과 함께한 사람흔적

동강 유역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 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밖에 없
다. 동강 곳곳에는 백두대간의 심산유곡에서
흐르기 시작한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면서 퇴적 지형을 형성해 놓았다. 강변
으로 드리워진 넓은 충적지대인 모래언덕과
낮은 구릉지대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었
다. 지리적인 요건을 통해 보더라도 한반도
동북 지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이동해 온 선사인들이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
어와 내륙으로 향하면서 마주한 동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크고 작은 지류가 잘 발달되어 있어 유역에서 살기 좋은
자연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동강 유역에서 약 2백만 년 전인 구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는지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결과는 아직까지 없다.
다만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동강의 줄기인 남한강 유역의 충
북 단양군 애곡리 수양개와
도담리 금굴, 상시리 등지의 한강 중류 지역에서 수많은 구석기 유물들이
발굴된 것을 보더라도 동강 유역
또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조심스럽
게 추정하고 있다. 특히 동강 유역인
영월, 평창 지역에서 구석기 유적이 이미 발굴된 점과 이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동굴들로 보아 구석기 유적의
발견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있다. 약 7천 년 전부터 강 유역 곳곳에는
신석기인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아왔으며, 이러한 흔적은 동강 중류 지역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와 민
무늬토기, 석기 등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동강 유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은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소골
을 비롯하여 고성리 고방마을,
운치리 등 중상류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덕천리 소골의 신석
기 유적은 1987년부터 이루어진
국민대학교박물관의 조사에서 처음 드러났다. 동강변의 넙은 충적지인 모래
언덕에서 빗살무늬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었다. 고성리 고방마을의 신석기 유적은 고성분교 앞 고방정 서쪽으
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 아래에 있는데,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집터로 삼아 살던 곳으로 여겨지며 빗살무늬토기조각
과 숫돌, 조개껍질, 뼈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운치리의 신석기 유적은 바위그늘 유적에서 북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납운돌 갈벌에 위치하고 있으며,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민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동강 상류인 조양강 유역의 정선
읍 귤암리 귤하마을에 3기가, 중류로
내려오면서 운치리 중바닥여울 옆 모래 퇴적지에 덮개돌과 받침돌이 분리
된 채 1기가 발견되었다. 운치리 하류의
덕천리 또한 신석기시대 이래로 선사인들이 대단위 집단 취락지를 이루며
살던 곳으로 소골마을 밥마누 아래에
1기의 고인돌이, 그 옆 밭머리에 3기의 훼손된 고인돌이 있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민무늬토기
조각, 붉은간토기 조각, 숫돌제장 마을의 밭 한가운데에도 1기의 고인돌
이, 고성리 고성분교 뒤에도 3기의
고인돌이 있어 이 일대가 청동기인들의 생활 무대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
고 있다.

철기시대
철기시대 유적은 대부분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지와 일치한
다.
동강이 시작되는 정선읍 가수리 수미마을 건너편에 있는 북대마을과 가수
리 남서쪽의 운치리 수동 마을, 그리고
덕천리 소골과 제장마을은 모두 충적평야, 흐르는 물에 흙·모래·자갈 따
위가 실려 내려와 쌓여서 이루어진
평야) 지대로 이곳에서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 조각 등 많은 철기시대
유물이 채집되었다. 이밖에도 덕천리
바새마을의 퇴적지와 제장마을에는 돌무지무덤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
다.

운송의 수단과 문화의 교류

섶다리
동강유역의 사람들은 해마다 11월경이면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에 섶다
리를 놓고 마을 잔치를 벌였다.
여름철에는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이용했으나 겨울에는 하천이 얼어붙어
배를 이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겨울
한철을 보내기 위한 방편이 되었다. 교각을 놓고 다릿발을 연결해 고정시키
는데 쓰이는 나무를 ‘머그미’라
하고, 상판에 해당하는 길고 굵은 나무를 ‘열모’라고 불리웠다 한다. 섶다
리를 놓는데는 먼저 배를 상류에
줄로 매어 놓고 Y자 형태의 다릿발을 먼저 세운다. 그리고 그 위에 길이가
약 1미터 정도로 양쪽 끝에
홈을 판 머그미를 얹고 그 홈에다가 다릿발을 끼워 움직이지 않게 나무쐐기
를 박는다.

강을 낀 마을 사람들은 양쪽에서부터 교각을 세워 강 한가운
데로 나오면서 다릿발을
세운다.
이런식으로 교각을 2미터 간격으로 20미터쯤 세운 뒤 교각과 머그미 위에
길이가 약 4미터 되는 소나무를
걸쳐 놓으면 뼈대가 완성된다. 다리를 다 놓은 것과 마찬가지인 이때쯤이
되면 강양쪽에 소나무와 갈나무 가지를
열모 사이사이로 엇갈려 끼워오기 시작한다. 가지의 끝이 양쪽으로 향하게
놓는 것은 강물위로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다리를 지날 때 공포감을 덜게 하기 위함이다.
섶 위에다가 흙을 깔아 다리가 완성되면 양쪽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최고 연
장자를 앞세워 서로 마주보며 다리를
건너며 반가운 인사를 한다. 비록 겨울 삭풍을 견디고 이듬해 봄 눈이 녹
아 큰물이 내려오면 강물이 불어
떠내려 가는 다리지만 다리를 놓으면서 마을주민들은 먹을 것을 나누어 먹
으며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이루는
시간이 되었다. 동강의 섶다리는 97년 이전까지 주민 스스로 놓는 다리였으
나 영월댐 건설 찬,반 논쟁이
불씨가 되어 주민들은 더 이상 섶다리를 놓지 않게 되었다. 현재는 섶다리
로 운치를 더하던 자리에 잠수교를
놓아 섶다리를 놓은 것은 필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댐 건설갈등이 조금
은 해소된 현재는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섶다리를 재현할 움직임이 있어 그동안 댐 갈등구조에서 멀어
진 주민들의 마음이 섶다리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섶다리는 과거 섶다리를 놓는 날은 마을사람들이 화합을 이루는 시
간이었다.

뗏목과 아리랑
평화롭기만 하던 동강이 북적대기 시작한 때는 조선시대 경복궁 중수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채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1867년 대원군이 나서서 중수를 하기 시작했으나
이듬해 재목장에서 큰불이 나 대원군은
전국의 원목 산지에 재목을 급히 보낼 것을 명했다. 동강상류인 태백산과
황병산, 노추산 등지와 켜켜이 들어선
산골짜기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소나무가 뗏목으로 본격적으로 수송되기 시
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래서 동강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뗏목과 떼꾼에 얽
힌 사연이다. 동강은 1960년대
초까지 정선에서 나는 목재를 서울로 뗏목으로 엮어 나르는 물길이었다. 뗏
목 운반은 당시로서는 농사짓는 일보다
훨씬 낳은 벌이여서 강 마을 사람들에겐 솔깃한 유혹이 되곤했다. 하지만
비온 뒤 큰물을 타고 내려가는 일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기에 가족들은 온갖 방법으로 만류하기도 했다. 정
선에서 영월까지 뱀처럼 구불구불한
감입사행천의 거센 물길을 빠져나가는 골안떼는 언제나 목숨을 담보로 하
지 않으면 안되었다. 떼가 닿을 만한
곳이면 떼꾼들을 상대로 하는 객주집이 들어서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은 당
연한 일이었다. 떼가 한창 내려가던
1960년 전까지만 해도 정선에서 영월까지 강변에는 백여 곳에 이르는 객
주, 색주가가 몰려들어 강변 경제권을
이루었다. 조양강 물길인 정선 북면 아우라지에서 동강으로 이름이 바뀌는
정선읍 가수리까지는 말할 나위 없고,
가수리에서부터 해매, 운치리 점치, 덕천리 소골, 제장, 연포, 영월의 가
정, 진탄, 만지등으로 이어지는
객주집은 오가는 떼꾼들로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떼꾼들은 떼를 강가에 대
고 객주집에 들려서는 술에 흥건히
젖어 노래를 부르곤 했다. 노래라고 해야 어려서부터 귀익은 정선아리랑 가
락 일색이었다.
객주에서 하루를 쉰 떼꾼들은 굽이굽이 동강 물길을 타고 내려가다가 소나
무 숲과 절벽이 어우러진 동강의 절경에
반하면 아라리가락과 타령이 절로 흘런나왔다. 동강 물굽이는 단순히 흘러
가는 물길로서 뿐만 아니라 이들이
부른 정선아리랑 가락까지도 흐르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노래가 흐르
고 강물위에 뜬 뗏목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타보고 싶은 서정을 갖기 쉽지만, 떼꾼들에게근 동강 물길은 처절
한 싸움터 같은 곳이었다. 동강에서
떼꾼들이 가장 위험한 곳으로 여기는 곳으로

는 평창군 미탄의 황새여울과 영월 거운리의 된꼬까리를 쳤
다. 여기서 죽은 떼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떼꾼을 보낸 아낙네들의 근심은 정선아리랑으로 배어나왔
다.

우리집의 서방님은 떼를 타고 가셨는데
황새여울 된꼬까리 무사히 지나 가셨나

황새여울은 강 한가운데 바위에 황새, 청둥오리 같은 철새들이 앉아 울었
다고 해서 그렇게 불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이름과는 달리 강에 삐죽삐죽 솟아 오른 바위들은 불어
나 물을 빠른 속도로 타고 내려오는
뗏목을 산산조각 내고 뗴꾼들의 목숨을 숱하게 앗아갔다.
어라연 바로 아래에 있는 된꼬까리도 정도의 차이일뿐 황새여울과 비슷했
다. 뗏목이 바위에 걸려 재껴 놓으면
또 다시 걸리곤 했다. 긴 막대를 뗏목 밑으로 집어넣어 사투를 벌이다 걸렸
던 뗏목이 쭉 미끄러져 내려가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긴장이 풀리자 떼꾼들의 입에서는 정선 아리랑이 흘
러 나왔다.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냈으니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차려 놓게

만지는 영월 거운리에 있는 마을이다. 비가오나 가뭄이 심할 때나 마을 앞
엔 늘 물이 가득해 뗏목을 대기가
좋았던 곳이다. 강을 따라 뗏목을 댈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객주집이 들어섰
는데 만지의 너대 곳 객주집 가운대
전산옥을 꾸리던 집은 단연 으뜸이었다.

맺음말

급변하는 발전이라는 목적아래 우리와 함께 한 강과 강 문화는 고스란히
과거 속에 묻혀 버렸다. 이렇듯
강과 단절된 문제로 인해 주변의 하천과 강은 애물단지로 취급받기 일쑤였
다. 과거 제도권의 문제해결은 극렬한
투쟁의 일관될 수밖에 없었기에 참여의식의 저조 되고 정부의 방만한 관리
는 시민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진정 주변의 하천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연 속에서 소중한 가치를 깨닫
도록 지속적으로 현실에 접목시킨다는
목적아래 자연과 인간이 상호 보완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참고 문헌
1.동강아리랑 – 진용선 (수문출판사)
2.경험으로 얻은 유역관리 10대 교훈
3.제 1회 강의날 대회 사례집
4.강을 지키는 사람들 강을 살리는 NGO- 환경정의시민연대

참고 사이트
1.정선아리랑 학교 (www.arirang.re.kr)
2.환경정의시민연대 (www.ecojustice.or.kr)
3.환경부 (www.me.go.kr)
4.강네트웍 (www.rivernet.or.kr)
4.중량천 사람들 (www.jr1000.org)
자료의 인용을 흔쾌히 허락해 주신 정선아리랑연구소 진용선 소장님께 감사
드립니다.

자료출처 : 강살리기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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