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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분쟁 해결모델로서의 동강댐 건설반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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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_Ecopeace2000(국문)이시재.hwp

동강댐건설반대운동
–환경분쟁의 해결모델로서–

이시재(가톨릭대학교, 사회학)

1. 갈등해결의 제도화를 위해서

1993년 문민정권이 등장한 이래 한국에서는 환경문제를 둘러싼 갈등해결에 하나의 패턴이 생겨
나기 시작하였다. 피해주민들의 호소에 전문환경단체가 호응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가
해주체에 대해 개발을 중지하거나 보상을 요구하게 된다. 정치적 민주화를 배경으로 주민들과 환
경단체의 요구를 가해기업이나 정부기관이 전적을 무시할 수 없게 되어, 민관합동으로 만드는 조
정위원회의 구성, 그리고 그 조정위원회의 위촉으로 전문가 집단이 조사, 연구활동을 하여 그 결
과를 다시 조정위원회에 검토하여 결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피해자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영향력이 그 만큼 커진 것이며, 동시에 환경분쟁을 둘러싼
갈등의 제도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새로운 갈등해결의 방식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으나, 그 이전에는 이러한 절차를 밟지는 않았다. 전문환경단체가 정부나 가해
자의 협상의 파트너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며, 전문가들은 주로 정부의 위촉으로 주민의사를
반드시 대변한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갈등해결방식의 제도화에는 두가지 점에서 종래의 방식과 다른 것이다. 전문환경단체
와 주민간의 관계, 그리고 전문학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하는 것인가는 문제이다. 또
하나는 피해자, 환경단체의 추천을 받아서 연구에 참여한 전문가가 새롭게 등장하고있다는 점이
다. 정부에서 추천하든, 민간단체가 추천하든간에 전문가는 그 나름대로의 하나의 직업집단으로
서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으며, 이들이 서로 대립하는 전영의 추천을 받아 공동연구를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갈등해결방식이 정착하기 까지의 과정을 살피고, 동강댐건설반대운동을 전
형으로 이러한 갈등해결방식의 가능성과 함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또 이러한 갈등해소방법
은 모든 환경문제의 해결에 적용될 수가 없다. 또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와 환경단체간의 관계의
변화와 유형을 언급하려고 한다.
이러한 연구는 갈등해결방식의 제도화를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여
러 가지 환경사안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를 모색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다.

2. 갈등과 갈등해결의 유형

한국의 환경운동은 1980년대 초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출발, 전개하였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민주화는 환경문제해결의 첩경이라는 생각을 환경운동가들이 갖고 있었고, 실제로 환경문제
의 해결은 민주화과정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역사적인 경험에서알 수 있다.
환경단체들은 1993년에 출범한 문민정권이전에는 정부나 기업에 직접 저항하여환경문제를 언론
등을 통해서 사회에 알렸다. 환경단체와 환경부와의 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로 불
신과 적대를 계속하고 있었으며, 기업과 환경단체간에도 불신관계는 마찬가지이었다. 1993년 문
민정부가 들어서자, 정부 권력의 핵심적인 부분에 과거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사람들도 있었고,
환경단체와 정부간의 대화가 가능한 상태로 발전하였다.
환경단체의 교섭력이 증대되는데는 정치적 기회구조(Snow)가 크게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저항
하는 사람들의 요구가 관철되기 쉬운 정치적인 기회구조가 도래한 것이다. 제도적으로 좀 더 개
방적인 정부가 들어섰고, 시민적인 자유가 확대되었으며, 시민운동에 대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탄압이 불가능한 정치상황이 된 것이다.
정치적 기회구조의 확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종래 정부는 하나같이 개발연대블럭을 형
성하고 있었으나, 정부내에서 친환경블럭이 환경부, 지방자치단체, 의회, 그리고 정부의 핵심에
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동강댐건설반대운동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듯이 환경부나 강원도 등
지방자치단체가운데 건설반대 태도를 표명한 것이 나타났다는 것이며, 과거 민주화운동을 같이
한 경험으로 인해, 정부권력의 핵심부분에 대해 환경단체가 의사소통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 정치적 기회구조의 확대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국회의원들 가운데서도 당론
과 관계없이 친환경적인 태도를 견지한 사람들이 많아 졌고, 주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 뽑히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들도 환경문제에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문민정부는 환경단체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협력사업을 시작하였다.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해
서는 국민적인 의식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당시의 공보부에서는 국민을 대상으로하는 환경
켐페인을 전개하는데 환경단체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환경단체들도 이에 참여하여 정부의 보조금
을 받아서 국민의 환경의식의 제고와 환경실천을 확산시키는 일을 하였다. 이 사업은 지금은 행
정자치부의 시민단체 지원활동의 하나로 정착되어 있다. 또 하나는 환경단체들의 활동가들을 해
외에 단기 견학연수를 시키는 사업을 하였다. 환경단체의 활동가들이 해외의 선진 제외국의 환
경운동을 견학하고 싶어도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것 때문에 이를실천할 수가 없어서 정부의 지원
으로 해외 연수를 매년 시키고 있다. 그리고 각 지방자치단체는 1995-6년경에 지방의제를 작성하
기 시작하였는데, 지방의제 작성에 환경단체가 모두 참가하여 지방정부와 환경단체간의 협력의
사례라 증가하였다.
정부와 환경단체간에 좋은 관계만을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반핵운동과 관련하여 환경단체들
은 정부와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한국의 반핵운동은 1988년 원전주변지역주민들의 반대운동에
서 시작하였으며, 1990년에는 충남 안면도에 핵폐기물 처분장을 만든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반대
하고 나섰다. 정부는 그 이후에도 전국의 6개소에서 핵폐기장 처분장 설치를 검토하게 되었으
나, 모두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의 반대로 처분장 건설을 아직도 미루고 있다. 특히 1994년에는
서해안의 굴업도에 핵폐기물을 영구히 처분한다는 결정을 하였으나, 주변의 덕적도 주민들, 인천
시민들, 그리고 환경단체들의 격렬한 반대로 굴업도처분장계획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
부는 지난 10여년간 기존의 원전부지에 원자로를 추가건설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원전부지에 추
가로 원전을 짓지 못하였으며, 또 핵폐기물처분장을 아직도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환경단체의
요구가 기존의 원전의 폐기를 요구한 것도 아니며, 에너지정책을 원전위주에서 재생가능한 에너
지쪽을 방향을 바꾸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만큼, 정부와 환경단체간의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
니나, 아직도 원전문제에 관련해서 환경단체와 정부기관과의 대화의 창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
다.
기업가운데서도 환경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연구소를 만든다든지, 환경기금에 출연하며, 환경
친화적인 상품개발에 힘쓰는 곳이 많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한 것은 1990년대부터 우리 국민들 사이에 환경의식이 급속하게
변화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행동이 아직 친화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환경의식
이라는 점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개발보다 환경을 중시하며, 현재의 개발보다는 미래 자손
을 위해 좋은 환경을 남겨주어야 한다는 의식이 각 종 여론조사에서 확인되고 있다.
환경문제에 대한 정부의 정책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1년 봄 낙동강에 페놀유출사건이 발생
하여 대구, 부산, 마산, 창원 등 넓은 지역의 주민들이 페놀오염의 피해를 입게되자, 정부는 서
둘러 기업에게 오염의 책임을 지우고, 정부도 환경예산을 추가 편성하여 환경기초시설을 확충하
였다. 1992년 6월 유엔환경개발회의를 앞두고 정부는 국가환경선언을 발표하였으며, 생물다양성
협약, 기후협약 등에 조인하였다. 1993년이후에는 환경부와 환경단체간의 협력도 활발하여 민간
단체들이 참여하는 환경정책협의회가 발족하였고, 김영삼대통령이 스스로 환경대통령이라고 선언
하였다.
환경단체도 1993년을 경계로 크게 성장하였다. 서울의 공해추방시민연합은 전국의 8개의 지방
환경단체들과 협력하여 1993년에 환경운동연합을 결성하였다. 환경운동연합은 결성과동시에 시
민환경연구소, 법률센터, 환경정보센터, 교육연수원등을 부설로 만들고, 지방조직도 확대하였
다. 2000년 6월현재 환경운동연합은 전국게 42개의 지역조직과 7만명의 회원을 가진 세계에서 가
장 빠르게 성장한 환경단체이며, 아마도 아시아최대의 환경단체가 되었다. 녹색연합도 1993년에
배달환경연구소에서 발전적으로 전국조직으로 탈바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환경운동의 내용도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1980년대에는 피해자중심의 운동에 지원하는 방식
으로환경운동을 전개하였고, 정치색이 강한 반핵평화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93년 환경운동연합
이 결성된 다음에는 공해보다는 환경을 기치로, 민중운동으로서보다는 ‘시민운동’으로서의 정체
성을 확립하면서, 환경, 생태 등 보다 정치적인 색채보다는 환경생태주의적인 경향이 강화되었
다. 골프장건설반대운동, 갯벌파괴반대운동, 1997년부터 전개된 동강댐건설반대운동에서는 생태
환경을 지키자는 주장에 언론과 시민들이 호응한 것으로, 개발보다는 생태환경의 보존이라는 패
러다임의 큰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전개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정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환경운동를 개괄하였다. 환경운동단체와 정부간에는 대
체로 네가지의 교섭유형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정부의 환경정책이나, 환경파고행위에 반
대하는 저항형을 생각할 수 있다. 반공해운동이나, 반핵운동과 같이 기업또는 정부의 개발행위,
혹은 환경파괴행위에 대해 직접 저항하는 행동이다. 매향리 미군사격장 주변 주민들의 반대운동
은 저항형 운동의 전형이다. 정부는 미국과의 관계, 군사문제라는 차원에서 요구에 대한 협상의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다. 정부와 환경단체간에는 대화와 협상의 장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저항
의 방식도 직접행동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핵문제에 관해서는 지금도 정부와 환경단체는 직접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두 번째의 유형은 요구, 참여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환경단체의 집요한 항의행동, 혹
은 주민들의 피해보상요구에 정부가 기업이 이들을 협상의 테이블에서 만나, 요구에 대해 협상
의 방식을 취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요구참여형에는 지역주민들의 피해보상과 같이 물적인 보상
을 요구하는 경우도 포함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발프로젝트의 결정과정에 대한 참여요구로 발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구참여형이라고 할 수 있다. 시화호주변농민들의 포도밭피해에 대해 주
민들의 피해보상요구에 수자원공사는 정확한 조사를 바탕으로 보상을 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요구참여형은 1990년대초 화성산업폐기물소각장 주변 지역주민들의 항의운동에 대해 환경단체가
개입하여 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문가들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타협안은 만들어 양쪽에서 다
수용하도록 한 사례가 있다. 이것은 동강댐건설반대운동, 새만금간척반대운동, 서울시 수돗물 바
이러스균사건 등의 갈등상황의 해결에 공히 적용된 방법이다. 반핵운동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환
경갈등은 이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요구참여형은 일단 사건이 발생하여 주민들의 반대운동이 발생하고, 환경단체가 가세하여 정부
나 개발주체가 협상에 나오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환경문제를 사전에 예방하고 이
것을 계기로 반대운동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는 정부나 개발주체가 계획의 결정, 실행, 평가의 각 단계에서 환경단체 등 민간이해관계자와 대
화를 통해서 문제를 미리 걸러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진정한 참여는 그런 의미에서 의사결정과정에 주민과 환경단체가 참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
야 환경파괴를 사전에 막을 수가 있는 것이다.

갈등발생과 해결방식과정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1 갈등해결과정의 흐름

세 번째 유형은 정부와 환경단체간의 협력과 공동생산의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지
방의제작성에 있어서 민간단체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민간단체들의 지방의제의 실천에 참가하는
방식이 가장 전형적이다. 이것은 외형적으로는 갈등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니나, 의제작성과정
에서 지방정부와 환경시민단체들이 어느 쪽에서 주도하고 있는지, 혹은 지방의제가 작성된 다음
에 이것을 어느 정도 어떤 방식으로 정책화하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지방정부와 환경시민단체
간에 밀고 당기는 갈등이 존재한다. 이것은 대체로 협상을 통해서 해결된다.
1998년에는 IMF로 실업자대책이 여러 가지 발표되자, 환경운동연합은 정부에 이 기회에 산림
을 가꾸는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정부에서 자금을 대고 민간조직이 중심
이 되어 생명의 숲가꾸기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것은 실업대책과 산림보전을 위해 좋은 공동사
업이 되었다. 그 밖에 환경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전개하는 물절약운동, 에너지절약 켐페인 등에
행정자치부, 산업자원부 등에서 자금을 지원하여 공동사업을 하고 있다.
환경운동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와 전혀관계가 없는 자율적인 운동도 다수 전개하고 있다. 모
피입지 않기 운동 등은 시민을 대상으로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그것을 파는 백화점에 항의 방
문을 하는 자율형운동도 전개한다. 지리산에 반달곰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환경단체 활동
가들이 지리산에 가서 불법사냥을 적발하여 언론에 공개하고 반달곰살리기 전국 켐페인을 하는
것은 자율적인 시민운동이며, 그 대상을 시민, 기업 등이 되고 있다.

3. 동강댐건설반대운동—참여의 요구

2000년 6월5일 환경의 날에 대통령은 동강댐건설을 백지화하고 물부족과 홍수조절 문제는 다
른 방식으로 해결하겠다고 발표하여, 2년이상에 걸친 동강댐건설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통령
의 발표가 있기까지 지역주민들의 댐건설반대운동이 일어났고, 환경단체가 이것을 전국적으로 확
산시켜, 반대운동에 대한 지지를 대대적으로 획득하여, 조정위원회, 공동조사단의 결성 등을 통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결말이 났다. 동강댐건설반대운동과 문제의 해결방식은 앞서 논의
한 유형가운데 요구참여형 문제해결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문제의 발단, 성격, 반대운동
의 전개과정과 문제해결과정을 검토해 보고자한다.

3.1 발단

1990년 9월10일부터 12일까지 한강지역에 큰 비가 내렸다. 이 지역에 3일동안 내린 비는 약
400미리미터이었고 이때의 대 홍수로 인명피해 10명, 실종 14명, 부상7명 등 31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가옥 및 농토의 침수, 유실로 생긴 피해는 영월, 평창, 정선지역을 합하여 689억원에 이
르렀다. 홍수지역을 방문한 노태우대통령은 댐건설을 약속하였다. 동년 11월 건설부는 수자원공
사에게 댐건설의 타당성을 조사하라고 시달하였다.
건설부-수자원공사는 홍수조절을 위해 동강에 저수량 약7억톤의 댐규모, 그 높이는 98미터, 수
몰토지면적은 21.9평방키로미터, 수몰가구 500, 그리고 건설비 약 1조원을 계획하였다.

3.2 Framing

건설교통부와 수자원공사는 수자원의 확보와 홍수예방이라는 두가지의 이유를 내세워 동강댐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댐건설의 계획과정을 보면, 1990년의 홍수가 계기가 된 만큼, 홍수조
절이 동강댐건설의 가장 중요한 이유이었고, 수자원확보는 그후에 추가된 것이다. 건교부는 2002
년에는 한국도 불부족국가가 될 것이라는 국제기관의 예측에 근거하여 2011년까지는 34개의 댐
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한편 환경단체들은 댐건설에 의한 생태계의 파괴, 댐의 안전성위험 때문에 이를 반대하였다.
지역주민들도 지역의 생활환경의 파괴를 이유로 댐건설에 반대하였으며, 일부 주민들은 댐건설계
획에 의한 피해보상을 위해서 댐을 건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댐건설을 둘러싼 논의는 여러차례의 세미나, 토론회, 텔레비전논쟁을 통해서 전개되었지만, 추
진파와 반대파의 입장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환경단체들은 수자원부족과 홍수조절이라는 목표설정 자체에 대해서는 큰 반론을 제기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목표가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수자원확보와 홍수조절을 위한 수단으로서
동강댐건설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건교부나 수자원공사는 댐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지하댐의 건설 등 기술적인 장치로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생태계의 파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반론하지 않았다.
물부족문제에 대해서는 환경단체 등 반대파들의 주장이 급속하게 설득력을 얻어갔다. 도시의
상수관로가 노후하여 수돗물이 누수되고 있으며, 상수관을 교체하는 것으로 이를 막을 수도 있다
는 것이다. 혹은 각 가정에 절수형 변기로 교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물만 하더라도 동강댐이
공급할 수 있는 양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수도요금의 절상, 물절약운동 등
으로도 동강댐이 공급할 수 있는 수량은 확보가능하다는 것이다. 홍수조절에 관해서도 하류의 충
주댐, 팔당댐의 저수량을 조절함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댐건설은 약 1조원이 드는데, 이것의 극히 일부만 투자하여도 홍수예방을 할 수 있다는 주장
도 강하게 대두하였다.
수자원공사, 전문가들과 환경단체간에 이러한 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동강의 생태계를 지키자
는 운동은 크게 확산되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66%에서 85%까지 동강댐건설을 반대하였다.
그런 가운데 정치인들은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하여야 했다. 영월, 평창, 정선 지역의 지방
의원, 자치단체장은 일제히 댐건설을 반대하였다. 지역주민들 가운데 댐건설에 찬성하는 사람들
도 있었지만, 그들은 소수이었다. 강원도 도지사도 현지시찰을 통해서 중앙정부의 입장과 대립되
는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댐건설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매스미디어도 정부기관이라고 말 수 있는 한국방송공사까지도 동강의 생태다큐멘타리를 만들
어 이를 보도함으로써 동강의 생태계의 중요성을 확인해 주었다.
환경부도 3차례나 환경영향평가서를 반려하여 보완을 요구하였으며, 이것을 통해서 댐건설반대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명하였다.. 그렇게 되니까, 댐건설에 찬성하는 쪽은 건교부, 수자원공사,
일부의 전문가와 일부의 주민으로 고립되었다.
대통령의 입장은 어떻하였는가? 대통령은 ‘물문제는 그렇다고 하면, 홍수문제는 어떻게 하
나’로 반문하였다. 대통령으로서도 정치적인 리스크가 큰 결정을 하기가 어려웠다. 건교부, 수자
원공사, 그리고 건설업자 들도 중요한 이해집단들이기 때문에 이를 물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러나 대통령으로서는 생태환경의 보전도 중요하고, 홍수조절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
한 것은 국민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결단을 위한 합리적 근거
를 요구한 것이다.
대통령은 1999년 8월6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댐건설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사견’을 발
표하였다. 이것이 방향을 바꾸었다.
동강댐건설을 둘러싼 담론을 동기의 측면에서 단순화하면 세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공공성
을 빙자한 ‘이해관계자’의 움직임이다. 수자원공사와 건교부 등은 목표설정자체에 큰 하자가 없
더라도 동강댐건설이라는 수단의 선택에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정치적 지지’가
댐건설결정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 대통령의 행동은 정치적인 결정이
었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인 결정을 뒷받침한 것은 관련국민들이 댐건설을 반대하였기 때문이었
다. 나머지 하나는 ‘생태계의 보전’이라는 담론이다. 이것은 댐건설과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
는 시민, 환경단체를 움직인 담론이다.

3.3 정치적 기회구조의 변화

동강댐건설반대운동은 비교적 좋은 정치적 조건속에서 진행되었다. 말하자면 운동을 위한 정
치적기회구조(Snow)가 확대된 것이다. 정치적 기회란 정치제도의 개방성, 정부 등 권력기구의 내
적인 결합의 정도, 억압장치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정치적 개방성을 내걸
고 등장하였으며, 정권블럭내부의 결속의 화해, 정부부처간의 불협화음, 무용지물이 된 억압장
치 등 반대운동을 위한 조건은 매우 좋았다.
1997년12월20일, 한국은 IMF의 지배권에 들어가, 미래전망이 캄캄한 가운데 새 정권이 등장하
였다. 김대중정권은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을 처음부터 내걸었다. 대통령이 민주적
인 절차에 의해 선출되었고, 최초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부정
할 수가 없었다.
김대중정권은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립정권이다. 그러면서도 국회에서는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민주적인 정부로서 정당성을 확보하였지만, 세력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약체정권을 면치못하였다. 1998년은 IMF의 위기로 김대중정권이 경제회복을 위해 리더쉽을 발휘
하였다. 그러나, 1999년 이후 동강댐건설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강행할 만큼 강력한 정권을 구
성하지 못하였다.
동강댐건설과 관련하여 1999년에 대대적인 반대운동이 일어나자, 정부 부처간의 불협화음, 국
회의원들 가운데서도 반대파의 증대, 지방정부의 독자적인 입장표명 등 과거의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 속출하였다.

3.4 동원

어떤 사회운동이든지 처음 시작한 주체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주체가
확산되고, 또 바뀌기도 한다. 운동의 전개과정은 운동주체에 의한 자원의 동원과정이기도하다.
환경단체들은 동강댐건설을 반대하기 위해 광범위한 자원을 동원하였다. 주체형성과 자원동원이
라는 관점에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동강댐건설에 대해서는 1991년 건설부가 댐건설을 설명하자 댐건설에 의해 홍수를 막을 수 있
다고 생각한 영월군민은 찬성하였지만, 정선군민은 댐건설로 아무런 이익이 없고, 오히려 홍수피
해가 예상된다는 의미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1996년 10월이후에는 영월군에도 동강댐반대투쟁위
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98년 댐건설 및 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회에 상정되자,
환경운동연합은 이 법률안의 통과저지를 위해 반대운동을 하였고, 건교부가 영월다목적댐 건설예
정지역을 고시하자, 11월부터 환경련은 동강조사(11월18일 동강시위)와 반대운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영월, 정선, 평창지역에 수몰대책위도 구성되었다.
1998년에도 건교부는 댐건설의 강행의지를 멈추지 않았다. 환경단체와 지역주민들은 수자원공
사앞에서 공동집회, 100인선언, 동강방문, 트렉킹, 래프팅대회, 서명운동, 정책대안의 제출, 신
문광고, 퍼포먼스와 사진전시회, 백지화촉구1개월 집중선포, 문인선언, 문화 행사 등 다채로운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12월, 동강댐을 정밀조사한 후에 결정하자고 발표하였다. 청와
대에서도 환경담당비서관을 내세워 건교부와 환경단체간의 의견조정에 나섰으나 타협점을 도출하
지 못하였다.
1999년 1월에는 전국 프로듀스연합회도 반대성명을 발표하였다. 2월에는 규탄집회을 열었다. 자
연도큐멘타리 <동강>(1999년 3월3일, KBS방영)은 동강댐반대운동을 전국이슈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환경운동연합은 3월23일부터 4월25일까지 33일간의 밤샘농성을 전개하여, 2000여명이
농성장을 방문하였고, 1170만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밤샘농성기간중에는 시민행동, 토론회, 유명
인사켐페인등의 프로그램도 수행하였다. 국회의 환경노동위원회도 동강조사에 나섰으나, 지역의
찬성주민들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4월8일에는 강원도도지사도 영월, 평창, 정선지역을 순시한 다
음에 반대의견을 표명하였다.
동강댐건설반대운동은 각계각층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참여연대, 천주교계, 동강살리기 청년
연대, 민주변호사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환경을 생각하는 전국교사모임, 관광문화연대, 임옥상미
술연구소 등 여러 단체들이 동강댐 건설백지화를 위한 성명발표, 동강방문 등 다양한 활동을 전
개하였다.
환경운동연합은 국제적인 환경단체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도록 하였다.
국제강네트워크, 그린피스, 지구의 벗 등 국제환경단체들이 이에 호응하여 대통령에
동강댐건설반대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동강에는 수만명의 관광객이 모여들었다. 비경 동강
을 없어지기 전에 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모여든 것이다. 래프팅회사도 큰 돈을 벌었다. 동강 다
녀간 사람들은 절대 여기에 댐건설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국회의원, 대
통령비서실 등에서도 개인적인 휴가를 내어 동강을 다녀 온 사람들이 많았다.
7월부터는 동강현지에 지킴터를 운영하여 트렉킹, 래프팅을 몰여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켐페
인을 전개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자 8월6일에는 대통령도 개인적으로는 동강에 댐을 짖지 않았으면 좋겠다
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대통령의 ‘개인적인’ 의견 표명은 상황을 댐건설백지화 쪽으로 급진전시
켰다. 8월7일 국무총리실은 수질개혁기획단을 중심으로 영월댐 타당성 조사를 하기로 한 것이
다. 수질기획단은 환경단체의 대표들과 건교부 등으로 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건교부, 수자원
공사, 환경단체, 학계, 지역주민 대표들이 추천하는 33명의 전문가로 조사단구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6개월이내에 조사결과를 토대로 댐건설여부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환경운동연합은 여러 시민단체들과 함께 환경부와 공동으로 물절약켐페인을 전개하였다.
동강댐반대운동이 단순히 댐건설반대를 넘어서 물부족현상을 해소하기 위한시민운동을 발전했다
는 것을 의미한다.

3.5 조정결정과정

국무총리실 산하 수질개혁기획단은 영월댐건설타당성조사팀을 구성하였다. 환경단체와 건교부
등 추진파가 동수의 연구자를 추천하여, 물수급, 홍수관리, 댐안정성, 환경보호, 문화유적보호문
제 등 다섯 개의 분과로 나누어 연구를 추진하였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연구자들은 현장조사, 현지주민조사, 그리고 해외사례의 현지시찰
등을 통해서 방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조사의 구체적인 보고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결
론은 댐건설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으로 나왔다. 공동연구기간동안에 참가연구자들 가운데는 댐건
설에 찬성하였다가 연구과정에 반대로 돌아선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로 봐서,
대통령의 8월6일 발언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공동연구기간동안, 환경단체에서 추천한 연구자들은 환경단체의 간부들과 여러차례 의견교환,
진행상황의 보고를 하였다.
공동연구의 결과가 댐건설의 백지화쪽으로 기울자, 일부 찬성파들은 홍수조절전용댐을 건설하자
는 대안을 내놓아 한동안 환경단체와 공동연구자들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2000년 6월5일 대통령은 동강댐건설은 백지화하고, 홍수조절과 물부족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을 강구한다고 발표하였다.

4. 결론

동강댐건설반대운동에서 우리는 사회운동이야말로 문제해결에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운
동은 전체사회의 안목에서 보면 하나의 ‘성찰’행위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성찰하지 않고 근대화
를 추진하였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남겼다. 또 운동은 개발프로젝트를 성숙화하는 경향이 있
다. 이른바 ‘대항적 사회분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운동은 사회발전을 위해서 좋은 기능
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사회운동이 정부와의 관계에서 단순 저항형에서 요구참여형으로 바뀌어 가고있
다는 것을 알수 있다. 요구참여형은 항상 운동으로 뒷받침되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운
동에 뒷받침되지 않는 요구참여행위는 피포섭상태에 다름아니다. 요구참여형이 그러나 항상 좋
은 방법도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반핵운동은 상대방의 여하에 따르기는 하
지만 저항형이 현재의 상황에서는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조정위원회와 공동조사방식은 항상 유효한 것은 아니다. 전문가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이해대변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전문가의 의견을 검증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며, 그래
서 연구과정과 결과를 보다 폭넓은 전문가 집단에 의해 검증할 수 있는 메카니즘을 도입할 필요
가 있다.
그러나 진정 환경문제의 발생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환경문
제가 발생하기 전에 프로젝트의 결정단계, 실행단계, 그리고 평가단계에 환경단체의 참여를 허용
하고 그들의 주장을 반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21세기는 정부의 결정사항에 NGO의 역할이 점차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시대의 추세이며, 정부
의 정당성과 실행력에서 그 효력이 점차 떨어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NGO의 개입은 더욱 강조되어
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정부의 모든 부처는 NGO와의 협의과정을 법제화하여 제도화할 필요가 있
다. 이것이 진정 민주적인 accountability를 실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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