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기업의 사회적책임

환경경영포럼 – 환경경영의 기초 ; 더 이상 옮겨갈 동굴이 없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동굴 속에서 살던 시절로 잠시 돌아가 보자. 한 가족은 마음이 느긋한 가
장을 지녀 가족 모두가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즐기는 반면, 또 다른 가족은 엄격
한 가장 때문에 사뭇 귀찮은 규율을 지키며 살아야 했다.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용변을 보러 밖으
로 나가야 하고 늘 자기 주변을 청결하게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주변 환경을 청결하게 유지하려
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가족은 이내 파리를 비롯한 온갖 해충들이 들끓고 악취가 진동하는 동
굴 환경을 불평하게 될 것이다. 가족들의 원성에 가장은 마지못해 새로운 동굴을 찾아 나서고,
깨끗하고 쾌적한 동굴을 찾으면 가족들을 데리고 새 동굴로 이사한다.

이쯤 해서 이 두 가족 중 어느 가족이 효율적인 삶을 살았는지 비교해 보자. 필요하면 언제든 옮
겨갈 동굴들이 있는 상황에서는 이른바 ‘환경 경영’을 하느라 적지않은 시간을 허비한 가족보
다는 그 시간과 노력을 다른 곳에 투자하며 적당히 살다가 새로운 동굴로 이주한 가족이 더 효율
적인 삶을 살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쉽사리 옮겨갈 동굴이 없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이제는 환경 경영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은 현재 우리가 안고 있
는 환경 문제의 상당 부분이 우주 개발과 함께 해결될 것이라는 예언을 내놓았다. 과학기술의 발
달에 힘입어 인류는 곧 우주 기지를 개발할 것이고 그리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주해가면 모든
환경문제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인 인구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지
만 나는 그의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다분히 물리학자다운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천문학적인 돈을 내고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주여행을 다녀온 억만장자도 있었고, 실
제로 미국에는 우주여행상품을 개발한 여행사에 이미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신청이 밀려들었다
고 한다. 나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죽기 전에 우주여행 한번쯤은 해보고 싶다. 하지만 여행으로
족할 것 같다. 나더러 저 어느 우주의 행성으로 이사를 가겠느냐고 물으면 “천만의 말씀” 이라
며 황급히 거절할 것이다. 우주여행 신청을 해놓은 그 많은 억만장자들도 나와 생각이 같으리라
믿는다. 모든 편의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쾌적하고 넓은 실내에서 큰 유리창을 통해 그야말로
‘이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광활한 우주의 평원을 내다보며 즐길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싫
다. 새들도 날아와 창가에 앉지 않고 풀벌레마저 울지 않는 그곳이 아무리 기가 막힌 곳이라도
나는 가고 싶지 않다. 아무리 철저하게 문단속을 해도 어디로 들어오는지 비집고 들어와 내 달콤
한 잠을 앗아가는 모기들이 있는 이곳이 나는 더 좋다. 모기들의 앵앵거리는 소리 뒤에 소쩍새
와 귀뚜라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다. 저 광활한 우주에 수많은 행성들이 있지만 지구를 대체할 수 있는 행성
을 발견하여 개발하게 될 날은 그리 빨리 오지 않을 것이다. 범지구적 차원에서 환경 경영을 해
야 한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깨닫고 있다. 이제는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도 환경 경영을 해
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한 때이다. 기업의 환경 경영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개미와 진딧물의 관계
를 떠올린다. 개미는 진딧물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그 대가로 진딧물은 개미에게 식물의
즙 일부를 제공한다. 그러나 개미가 어떻게 눈 앞의 큰 이득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공생관계를
유지하는지 생각해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진딧물이 제공하는 그 작은 액체 방울 속에 함유
되어 있는 당분의 양은 그야말로 극미량에 불과하다. 그에 비하면 진딧물 한 마리의 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단백질의 양은 상당해 보인다.

그 감질나는 당분을 차곡차곡 챙기며 진딧물을 잡아먹지 않는 까닭은 바로 개미들이 진화의 역사
를 통해 이른바 ‘지속 가능한’ 경영의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 한꺼번에 환금 덩어리를 꺼내는 것보다 참을성 있게 황금알을 모으는 것이 길게 볼 때 훨
씬 유리하다는 이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기업에게 있어서 ‘환경’은 반드시 자연 환경만을 뜻
하는 것은 아닐 듯싶다. 자연 환경과 더불어 기업과 소비자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 ‘인간 환경’
도 포함되리라 믿는다. 이 같은 포괄적인 환경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는 걸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앞에서 우리 인간은 원래 환경을 보호하려는 성향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처럼 얘기했다. 어
쩌면 ‘환경보호 유전자’는 우리 DNA 안에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우리 인류가 아직 수
렵채집시대에 머물던 때의 일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등극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혁명이
있었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 인간이 농경을 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
부터 불과 1만년 전이다. 그 이전의 우리 인류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한 종의 평범한 영장류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농업혁명과 훗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겪으며 이제
는 스스로 ‘산아제한’을 해야 하는 유일한 생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화려한 성공의 뒷면에는
지구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내가 <현대문학> 2002년 1월호에 ‘개미와 인간—자연의 두 지배자들’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
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오늘 나는 참 특별한 장례식장 두 곳엘 다녀왔다. 개미와 인간의 장례식이었다. 죽기 전에 자신
의 장례식을 보고 싶어했던 영국의 여류소설가 마리아 에지워스(Maria Edgeworth, 1767-1849)와
함께 갔었다. 개미의 장례식은 아침부터 그야말로 울음바다였다. 그 동안 개미와 온갖 동맹관계
를 맺고 있던 그 수많은 생물들이 만드는 애도의 행렬이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모
두 한결같이 개미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
면 인간의 장례식장은 초라하리 만치 한산했다. 제일 먼저 빈소를 찾아온 것은 바퀴벌레였다. 인
간 덕택에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이젠 할 수 없이 숲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그들의 어깨는 마
냥 무거워 보였다. 바퀴벌레들이 떠난 얼마 후 쥐들이 다녀갔고, 간간이 이, 빈대, 벼룩들이 의
무적으로 나타나 봉투를 던지곤 사라졌다. 유사 이래 가장 엄청난 장난을 쳤던 인간의 서거를 진
심으로 애석해 하는 생물은 별로 없어 보였다. 이제 드디어 이 지구에 독재의 시대가 물러가고
또다시 평화가 스며드는 듯싶었다.
그러다가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릴 무렵 홀연 소떼들이 밀려들었다. 아, 그래, 인간이 아니었다
면 그들이 그 둔한 동작으로 또 그 둔한 머리로 어떻게 그만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인간
들이 오죽 많이 길러줬으면 지구온난화가 그들의 방귀에 섞여 나오는 메탄가스 때문에 생길지도
모른다는 학설이 점잖은 과학 학술지에 발표가 될까. 그들은 정말 바퀴벌레 못지않게 서러워했
다. 그러고 있는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벼와 밀, 보리들이 헐레벌떡 들이닥쳤다. 그들 역시 인
간 덕을 톡톡히 본 이들이다.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불과 1만 년 전까지
만 해도 그들은 저 들판 구석에서 말없이 피고 지던 한낱 잡초에 지나지 않던 존재들이었다. 그
러던 그들이 오늘날 이 지구 표면을 가장 넓게 뒤덮게 된 것은 오로지 인간을 만난 행운 덕이었
다.
우리는 흔히 자연을 생각하면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의 살벌한 사자성어들을 떠올린다. 다윈
의 진화론에서 나온 표현들이다. 하지만 정작 다윈은 잘 쓰지 않은 표현들이다. 그의 이론에 감
화되어 성전을 들고 세상으로 뛰어나간 ‘다윈의 전도사들’이 즐겨 쓰던 말들이다. 다윈이 바라
본 세상에 경쟁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무턱대고 충돌을 일삼는 경쟁만이 이 세상에서
살아 남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걸 다윈은 일찍부터 깨달았다. 앞에서 나는 중량을 비교하며 개
미와 인간의 성공을 칭송했지만 중량만 놓고 볼 때 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생물은 단연 식물이
다. 그 중에서도 꽃을 피우는 식물, 즉 현화식물이다. 현화식물이 이렇게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그들의 꽃가루를 옮겨준 곤충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오늘날 이 지구에서 가장 막강
한 숫자를 자랑하는 동물이 누구인가? 바로 곤충이다. 식물과 곤충이 함께 이처럼 엄청난 성공
을 거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로 어우름의 지혜를 터득하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자연계
를 둘러보면 남을 적대시하며 투쟁만 하며 살아온 생물들보다 서로 돕고 살아온 생물들이 의외
로 많다. 경쟁을 이기기 위해 협동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전혀 어우름의 지혜를 터득하지 못한 동물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아이러니다. 규모로 보아 우리 인간만큼 훌륭하게 어우름의 삶을 살아온 동물이 없건만 오늘 우
리는 왜 자연의 품을 떠나 자연을 짓밟으며 살고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
게 자연과 어우르며 살고 있으면서 다른 편으로는 전혀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듯 어리석은 짓을
하고 사는 것일까?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장례식이라도 어느 정도는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지만,
나는 우리 빈소에 개미 빈소 못지않게 많은 문상객들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살아 있을 때
남들에게 잘해야 한다. 또 그러다 보면 그들 중 누군가가 우리더러 장례식 비용도 만만치 않은
데 그냥 더 살지 그러냐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DNA 안에 ‘환경보호 유전자’는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훌륭한 ‘환경 경영’을 실천하
여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현재 우리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환경파괴 및 온갖 잔인한 행동들을
보면 우리는 스스로 갈 길을 재촉하는 동물처럼 보인다. 먼 훗날 이 지구상에 인간에 버금가거
나 능가하는 생명체가 탄생하여 지구의 역사를 재정리한다면 과연 우리 인간을 어떻게 평가할 것
인가? 우선 그들의 역사책에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을 확률도 매우 높다고 본다. 워낙 짧게 살다
가 절멸한 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워낙 저질러놓은 잘못이 엄청나 비록 그리 긴 세
월을 생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퍽 중요했던 종으로 기록될 가능성 역시 높다. 일찍이 “인간은
역사의 무대에 잠깐 등장하여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역할을 하다가 사라진다”고 한 셰익스피
어의 경고가 다시금 새롭다. 거듭나야만 살 수 있다. 나는 우리 인간이 이번 세기에 ‘호모 심비
우스 (Homo symbious, 共生人)’로 거듭나길 기원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내가 평
소 늘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좌우명 ‘알면 사랑한다’와 논어(論語)의 ‘화이부동 (和而不
同)’ 정신을 제안하고 싶다.

글 : 최재천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admin

(X) 기업의 사회적책임의 최신글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