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기업의 사회적책임

크리스챠니아(Christiania)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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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챠니아(Christiania) 탐방기

크리스챠니아 30주년 표시
간판

1. 코펜하겐 젊은이들의 해방구

2001년 9월 26일 하룻밤을 묵은 스반홀름을 오전에 둘러보고, 오후에 뭉케
쇠가르를 방문한 후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에야 우리 일행은 덴마크 한인센타에 여장을 풀 수 있었
다. 공식적인 일정은 다음날 오후로
잡혀 있었지만, 크리스챠니아에서 열린다는 락 페스티발, 우드스탁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잘 익은 김치와
얼큰한 라면과 쌀밥으로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한 일행은 단단히 준비
를 하고 어둠 속으로 나섰다. 버스를
타고 크리스챠니아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삐딱해 보이는 젊은 친구들 무
리를 따라 버스에서 내려 그 친구들이
가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버스로 15분 남짓, 코펜하겐 남동쪽(하지만 거의 중심
부라고 할 수 있다)에 있는 그레이
힐에 인접해 있는 크리스챠니아는 이 날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아 대대적인
축제, 우드스탁을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챠니아로 향하는 길거리에는 3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포스터
가 붙어 있는 담벼락을 따라 젊은이들의
무리로 가득 차 있었다. 코펜하겐의 젊은이들은 모두 다 크리스챠니아로 향
하고 있는 것처럼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이미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이
동네 입구부터 마리화나 연기로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손에는 술병을 들고 입에는 마리화나를 물고 있
는 젊은이들은, 우리에게는 한없이
자유롭게 보이는 이 땅에서 또 다른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인도풍의
장신구와 명상 관련 기구, 옷가지들,
그리고 마약(soft drug)을 파는 수십 개의 조그만 상점들로 빼곡한 푸셔 거
리를 지나 넓직한
드스탁 광장에는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면 길바닥이나 강당이나 카페
등 어느 곳에서나 락과 재즈와 제3세계의 민속음악이 울려 퍼졌고, 음악과
춤, 마리화나와 술 기운에 젖은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광장 한켠에선 금발 여인의 나체쇼가 벌어지기
도 했고, 밤새 먹고 마시고 소리지르고
춤추고 하면서도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광란의 밤’이라고
까지 할 수는 없으나,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규율과 질서를 깨고 싶어하는 코펜하겐 젊은이들이 벌인 ‘난
장’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자본주의의
마성(魔性)에 반기를 들었던 68의 이미지를 여기서 느꼈다면 너무 지나친
감상일까.
두 시간 남짓 ‘서구식 난장’을 둘러본 인상은 유럽에 오기 전에 공부했던
크리스챠니아의 그것보다 훨씬 강렬한
것이었다. 이미 히피들 공동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리화나며, 건물
곳곳에 새겨진 음양을 상징하는
태극 문양이나 탑이나 불상 등 동양적인 상징물, 제국주의에 짓밟히는 제3
세계와 팔레스티나 사람들과 연대를
표시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각종 포스터를 통해 뉴에이지나 히피들의 냄새
가 진하게 배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푸른 기운을 머금은 회색 빛의 마리화나 연기 같이 암울하기도 하고 무겁기
도 하고…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 날 오후 크리스챠니아에 다시 들른 우리에게는 이 무
거운 인상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자유의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폭파된 ‘자유의 여신상’과
낙원이 그려진 벽화

2. 자유마을의 탄생과 그 역사

68혁명의 여운이 아직 채 가시기도 전인 1971년 코펜하겐 중심가에 있는
칼로텐보르크에서 한 무리의
예술가들과 히피들은 <주고받기>라는 전시회를 열어 각종 물건을 팔
고, 연극, 그림 전시, 즉흥극
등을 공연하고, {헤드 메거진(Hovedbladet)}이라는 대안신문을 발간하여 군
대 막사를 거처가 없는
젊은이들을 위한 안식처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
그해 가을, 그러니까 1971년 9월 26일 이 제안에 자극을 받아 공동생활과
자유를 갈구하며 대안적 삶을
찾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코펜하겐 남동쪽 프린세세 거리와 레프샬레
바이의 오래된 군사 기지의 담장을
허물고 이곳을 무단 점거했다. 무단 거주자 운동과 대안 운동 단체였던
<새로운 사회(The New Society)>의 여름 캠프 장소도 아쉬웠고, 아이들이 뛰놀 넓은 마당과 도
심의 푸른 숲도 필요했다.
이것이 크리스챠니아의 출발이었다.
경찰은 그 지역으로부터 사람들을 내쫓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를 하였지
만, 지역이 너무 넓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다. 마침내 크리스챠니아는 의회에서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떠올랐다. 주민들은 전기세와
수도세를 내는 데 동의하는 대신, 이곳에서의 삶을 ‘사회적 실험’이란 형식
으로 정치적 인정을 받게 된다.
이 지역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갖가지 제안들이 조정되기까지 그
실험은 계속되었다.
1973년에 정부가 바뀌자 크리스챠니아에 대한 태도도 바뀌게 된다. 이 지역
을 말끔히 치우고 폐쇄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자유마을 수호 의지는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문화를 무기로 공권력에 대항한다.
나토 정상회담이 열린 이 해 살보에스 극단은 나토군이 덴마크를 점령하여
라디오 방송국과 전략 지역을 점거한다는
가상의 퍼포먼스를 연출하여, 덴마크 전역을 몇 시간 동안 혼란에 빠뜨렸
다. 로펜에서는 터키 민속음악에서
락과 재즈에 이르는 온갖 음악을 공연하면서 마을사람들과 대안을 찾는 사
람들에게 이 마을의 존재 이유를 부각시키고
또한 공권력과의 싸움을 이끌 구심력을 만들어간다. 한편 크리스챠니아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차츰 내부적인 조직체계도 마련해 나간다. 열 개의 자치구가 확립되
고 모든 주민들이 참여하는 총회가
최고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쓰레기 팀은 쓰레기 분류 체계를 세웠고, 대장
장이는 낡은 기름통으로 난방기기를
만들었다.
1974년 시의회 선거에는 12명이 입후보하여 여성 한 명이 의회에 진출하였
다. 그녀는 그녀의 아이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어 의회와 언론에 한 바탕 소
동을 일으켰다. 게다가 전위 연행패인
솔보그넨은 그 해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 부대를 조직하여 백화점에 진열
된 물건을 그냥 들고나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당연히 그들은 체포되었는데, 경찰이 산타클로스들을 때리는
장면이 전세계 신문에 보도되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신성한 전통이 남아 크리스챠니아에서는 해마다
가난하고 외로운 이천여 명의 사람들을
불러 크리스마스 만찬을 나누고 있다.
크리스챠니아는 공공 상점과 여러 공장뿐만 아니라 공공목욕탕, 보육원과
유치원, 쓰레기 수거와 재활용 시스템을
만들어 대안공동체의 체계를 세워나갔다. 하지만 정부는 1976년 4월까지
이 지역을 말끔히 정리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대해 크리스챠니아는 솔보그넨의 풍자극을 공연하고, 무지
개 부대를 창설하여 공권력에 대항한
싸움을 준비하였다. 주민들을 나누어 역할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활동단
위로 조직한 것이다. 붉은 색은 대외적인
행동, 녹색은 음식과 영양을 관리하고, 푸른색은 자각을 위한 색상으로 조
직되었다. 크리스챠니아는 덴마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고, 크리스챠니아 폐쇄를 막는 포퍼먼스에
는 만 여 명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당시 열정적인 덴마크의 몇몇 록그룹은 크리스챠니아를 지원하기 위한 음반
을 발매했고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1976년 4월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결국 의회는 크리스챠니아 폐쇄를 연기
하기로 결정했다. 이 4월은
대안적인 덴마크의 거대한 상징이 되었다. 덴마크 국립박물관에서조차 크리
스챠니아의 대안적 공동체에 대한 책을
출판하였고,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들은 자유 마을의 아이디어들을 열심히 얘
기하고 다녔다.
크리스챠니아는 정부를 고소하였다. 1973년에 계획했던 철거 방안이 실시되
지 않고 의회도 크리스챠니아 주민들의
거주를 결정했기 때문에 1976년의 철거계획에 대해 주민들은 배신감을 느꼈
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재판으로
크리스챠니아의 폐쇄가 지연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1977년에는 칼로텐보르
크에서 ‘사랑과 카오스’ 전시회가
개최되었고, 대규모의 축제도 열렸다. 사람들은 자유 마을 구석구석을 청소
하고 수리하였고, 크리스챠니아 주민
몇 사람은 <우리의 음악>이라는 음반을 만들었다.
1978년 이 사건이 대법원에서 패소하자 크리스챠니아는 다시 한 번 자기 방
어를 위한 동원체제로 들어갔다.
크리스챠니아를 지키기 위해 수십만을 동원할 계획이 세워지고, 한편으로
는 시의회 선거에 후보를 내기로 하였다.
‘공동선’을 위해 크리스챠니아 유지를 요구하는 안이 제시되었고, 어렵사
리 시의회에 대표를 보낼 수 있었다.
선출된 사람은 이후 날림공사와 불도저식 철거를 강력히 비난하는 연설로
유명하게 되었다. 이제 의회는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지역을 ‘정상화’시킬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어려움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경찰은 코펜하겐 시의 마약상습자와 마
리화나 밀매자들에 대한 ‘마녀사냥’을
시작하였다. 이즈음 덴마크에는 헤로인도 들어왔고, 크리스챠니아에는 마리
화나 매매와 마약상습자들의 수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었다. 공동체는 마약의 거래를 막기 위해 경찰에 협력하였으
나, 경찰서장은 협조를 배신하고 마약매매에
대규모 급습을 시도하였다. 크리스챠니아는 자체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고,
마약 일소 프로그램을 조직하여 마약상들에게
적용하였다. 이는 마약 봉쇄가 행해진 1979년에서 80년 초반까지 최고조에
달했다. 마약상습자들에게는
사용중단 조치가 제안되었고, 매매상들은 쫓겨났다.
매우 암울한 시절이었으나, 다른 차원에서 크리스챠니아는 꽃을 피웠다.
1978년에 크리스챠니아에 있는 자유호(The
Arc of Peace)나 강당인 락머신은 코펜하겐 내에서 점증하는 펑크 양식의
본거지로 떠올랐다. 마을에는
많은 카바레가 생기고 볼거리들이 공연되었고, 오페렌, 게이하우스 등은 지
역문화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1981년에는
지역의회의 초청을 받은 배우 그룹들이 그들의 예술을 선보이기 위해 이탈
리아 등지로 여행을 떠날 정도였다.

1982년에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한 장래 계획을 세울 민간도시개발회사를 고
용하였다. 이제 크리스챠니아는
강화되었고 재정비되고, 정원이 가꿔졌으며,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다. 개발
회사는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크리스챠니아를
자치라는 폭넓은 틀 안에서 실험적인 도시로 발전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같은 해에 정부는 사민주의에서 보수적 자유주의 계열로 바뀌었다. 스웨덴
에서는 폭력으로 얼룩진 선거전이 있었다.
크리스챠니아는 북유럽의 마약 중심지이자 모든 악의 근원으로 고발당했
다. 그에 대한 대응은 ‘Love Sweden’이었다.
크리스챠니아는 스웨덴으로 건너가 스톡홀름을 ‘정복’하였다. 카바레와 전
시회, 대규모 행진이 도시를 휩쓸었다.

이후 몇 년간 크리스챠니아는 잊혀졌다. 하지만 공동체에 평화가 정착하고
새로운 공동작업장이 속속 만들어지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일할 가능성이 생겼다. 미국 빅 마운틴의 인디
언들과 그린란드에서의 Aassiviq
회의를 지원하기 위한 음악회가 그레이 홀에서 개최되었다. 이것은 다른 인
종들과의 유대를 보여주는 방법이었으며,
이후에도 몇해에 걸쳐 많은 국제적 협력이 이루어졌다.
1985년에는 <크리스챠니아의 아이들>이란 비디오가 만들어졌고, 1987
년 들어 정부는 이 마을의
합법화에 관한 실행계획을 발표하고 크리스챠니아와 정부기관들 사이의 대
화를 이끌어 갈 관리단을 설치하였다.
‘Viola, from Christiania’ 보고서에서는 공동체가 특정 세금감면 조건으
로 건물들을 유지하고
자체 기구들을 지원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 대신에 다른 상점과 작업장
들은 그들의 이익을 크리스챠니아에게
제공하도록 하였다. 그러면 크리스챠니아는 다시 공공기구들에 자산을 분배
하였다.
1989년에는 크리스챠니아법이 제정되고, 1991년에는 주민들이 세금을 꼬박
꼬박 내는 조건으로 마을의 자치를
인정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1996년 여름에는 마을의 장기발전계획
이 이 지역의 공식 ‘소유주’인
국방부와 마을 주민의 합의로 수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글 : 윤형근 (바람과 물 연구소 연구원)

자세한 내용은 첨부화일을 참고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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