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보전 관련자료

생태마을에 대한 꿈과 관련된 단상

생태마을에 대한 꿈과 관련된
단상


하나- 생태마을에 대한 생각에 이르
기까지

96년 4월에 이곳 진도리로 삶의 자리를 옮길 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유기농
업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이 불러일으키는 감성에 젖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초기의 얼
마 동안은 자연 속의 낭만에 취하고
있었다. 주민들이 우리에게 주는 정과 사랑에 빠지면서 신선한 삶을 살고
있었다. 밥상에 놓인 푸성귀의 반찬과
앞산에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그리고 능선, 진초록의 병풍에 둘러 쌓인 자연
이 천국같은 자족감에 젖어 있었다.
농사를 하는 일도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감동이었다. 생물계의 신비
를 맛보고 점점 빨려 들어가고, 손
뻗는 곳에서 갖가지 열매를 따먹고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감자를 먹는
우리의 삶은 최대의 행복이었다.

둘- 이곳 생태마을에 참여할 사람들

일반 사람들이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의 생태마을’하면 ‘…광대정 마을
등 사례…’를 떠올리고 있다.
그러나 광대정(진도리의 5개 자연부락 중 하나)에서 농사하고 있는 귀농자
들은 자기들을 ‘생태마을’의 범주에
끌어들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로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받고싶지 않다는 것이다. 조용히
생명순환의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와 김경남 목사, 장진
희씨, 김광화씨 등이 주동하여 매입한
임야(광대정 아랫쪽에에 위치)를 중심으로 생태마을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
다.
우리는 생태마을 조성에 대한 기본 입장을 가지고 임야 6만 5천평을 매입하
였고 그 중에 약 2만여평은 준임지
보존지역(준농림지역에 해당됨)으로 된 것을 군의 산림과에서 확인했다. 처
음 참여한 4세대가 주축이 되어
이 산을 샀고 생태마을 만들기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본인에게 그 생태마을
조성 과정을 위임했다고 판단하였다.
그 동안의 경과에 대해 상세히 정보를 교환하였고 여타의 사람들은 이 신선
한 프로젝트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임야를 마을로 조성하기 위해서는 행정적 절차를 밟아야 하고 도로
도 내어야 하며 터도 닦아야 한다.
그리고 여러 세대가 참여하기 위해서는 여러 곳에 터를 닦아야 한다. 그러
나 살아있는 소나무를 비록 관목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러지는 모습을 보며 비명(저항)을 지르
는 집사람을 보면서 생태적 감성이
발달하지 못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산 중턱에 두 채
의 집을 짓고 보니 ‘이제 생태마을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다시 조경도 하고 농작물도 심으면 처음 개간할 때
의 아픈 마음들이 치유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위로 받고 있었다. 야생화를 해 보겠다는 사람, 도자기를 하겠
다는 사람, 음악가, 작가, 성직자,
노동자, 천부적 농민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 곳의 땅을 ‘찜’해 놓고 있었
다. 그러나 이 마을에 동참하려는
사람들 중에 자기의 경작지 옆에는 ‘집을 지을 수 없다’고 문제를 제기하면
서 일정 지역에 집을 짓지 말라는
저항이 생겼다. 그 이유를 확인해 본 결과 ‘개간을 많이 하는 것은 생태적
이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가졌든 죄의식이 막 지워지고 있는 찰나에 다시 이런 저항을 받고 더 깊은
충격을 받았다. 생태 의식의 차이로
같이 살아갈 사람과 갈등이 생긴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판단이 생
겼다. 그리고 이참에 나 자신에
대해 보다 철저하고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느낀
다. 아니 내가 일을 처리해 나가는
방식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믿고 따라주
는 경향이다. 모든 일을 나에게 위임하고
있다. 나중에 구체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그 때 협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생태마을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다. 녹색연합이 설계한 내용에 충실해 보려고 한다. 이 설계를 기본으로
해서 생태마을을 조성하면서 현장의
실정에 맞추어 조금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곧 나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 가족이 이곳에 와서 느꼈던 처음의 행복으로 되돌아가야 한
다는 다짐을 하게 되고, 안정된 삶의
자리에서 스스로 깨닫고 명상하며 탐구하고 감동하는 삶에 만족하자고 다짐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진행한 일들 중 책임을 져야할 부분을 제외하고 자급자족하
는 삶을 중심으로 사고해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태 공동체(마을)에 관한 새로운 입장을 찾게 됐
다.

셋- 생태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조건을 어떻게 만
들 것인가?

자연적 생태 공동체에 관하여

생태란 말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낯선 단어인가 보다. 어떤 방문객에게 생
태마을 어쩌구저쩌구 하니까 그는
“생태인지 명태인지 잘 모르지만 …”하고 응답하기에(물론 농담
이겠지만) 어처구니없구나
하고 속으로 삭히고 말았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생태란 말을 평범한 말
로 바꿀 수 없는지를 궁금해했다.

국어 사전에서는 “생물이 자연계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이라
고 말하고 있으며 생물에 대해서는
“스스로 영양을 섭취하며 성장 번식 운동을 기본으로 하는 생활 현상
을 가진 유기체. 동물과 식물을
크게 나누어 유생물, 무생물”이라 풀이하고 있다. 이 두 낱말을 종합
한다고 생태라는 말이 다 설명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생태를 생명체 일반을 총칭한 말로 쓰게 되었다. 생명을 지닌 모든
것 다시 말하면 동물 중에는 사람을
비롯해 야생동물이나 가축이 있는가 하면 지렁이 같은 미물도 있다. 그리
고 새와 같은 날짐승도 있고 곤충도
있다. 식물로 말하면 크게는 고목나무나 느티나무를 비롯해 산에는 소나
무, 잣나무, 가문비나무 등 산림을
이루는 식물이 있고 그 아래에서 자라는 다른 관목의 종류가 수천 가지나
될 것이고 또 그 아래에서 자라는
약초며 산채, 갖가지 풀과 꽃과 열매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농사
하면서 재배하는 수천 가지의 농작물이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생명이 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의 종류도 수억에 이른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모으면 생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생명체들을 끊임없
이 살아있게 하고 생명을 일으키고
있는 흙, 그리고 흙이 생명을 일으키도록 조건을 만들어 주는 물과 햇빛과
공기와 바람도 생태의 범위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랬지만 독일의 바이
오 다이나믹 농사법의 아버지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작물의 생장에는 우주 전체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했고 하
늘의 별자리가 땅에 열의 원소를
쏟아 붓기도 하고 빨아들이기도 한다고 했다. 빛, 흙, 물의 원소도 마찬가
지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별자리에
따른 바이오 다이나믹 농사달력을 만들었다. 또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빚
으시고 코에 입김(바람)을 불어넣었다고
하지 않는가? 요즘 말로 하면 “기”(氣)라고 한다. 이것까지 포함
해서 위에 열거한 모든
것이 어우러진 것을 생태라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생태의 체계를 생태계
라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유진 오덤이
쓴 책에 의하면 생태계를 “생명부양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
다.
이처럼 자연의 생태계는 이미 광범위한 생명체와 생명을 일으키는 요소들
이 공생과 공존, 유기적 관계, 즉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생태 공동체에 관해 말하려면 자연
의 생태적 공동체성을 연구하고 그
본질과 특성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이 자연의
생태 공동체에 합류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직면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이 자연의 생태적 공동체에 관해 연구한 사람은 아니다. 단
지 자연공동체에 합류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이 합류의 단초는 내가 처음 농사한 그 경험이다. 앞으로 지속적
이고 보다 철저하게 살아가면서
생태 공동체의 진수를 깨닫게 될 것으로 믿고 있다.
농촌에 오기 위해서 준비하는 동안 생명을 일으키는 힘이 무엇인지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라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성경의 말씀이었
고 이를 철학적으로 정리한 책을
접하면서 확신을 가졌다. 다시 말하면 밀알 노동이 생명을 일으키는 힘이
란 사실이다. 성경의 이 말씀은 예수가
자신을 비워 인간의 종이 되었고 인간의 생명(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
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예수가 인간에게 먹
힘을 당한 제물이며 예수는 부활하므로
인간을 먹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생태계의 생명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먹힘을 당하고 서로 먹음으로(以天食天)
말미암아 일으켜진 것이다.
이 사실을 자연의 생태계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뿌리에 붙어 있는 미생
물(근권미생물)의 활동에서 드러난다.
미생물은 스스로 분해하고 부식하면서 자신의 분비물을 내어 놓는다. 씨앗
도 흙 속에서 자신을 분해하고 썩어서
미생물의 분비물을 먹고 자신의 분비물을 미생물에게 먹힘으로 싹이 트고
뿌리가 생기며 생명을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미생물의 노동을 다시 서술해 보면 자기의 몸을 도구로 하여 분비
물이라는 물질을 내어놓고 그 물질을
뿌리에게 내어주고 그 대가로 뿌리가 주는 분비물을 먹고 자라는 노동인 것
이다.
그리고 벼가 자라기 위해서는 버드나무와 장미꽃이라는 친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벼라는 친구에게 달라붙는 병충해를
버드나무나 장미꽃이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고추는 당근, 파, 양파, 들깨
와 같이 이웃하며 자라기를 원한다.
이 생명체들의 친구관계를 조금 더 나열해 보겠다. 토마토, 갓, 파, 마늘,
부추가 서로 잘 어울리고,
가지와 콩이 어울린다. 옥수수는 오이, 호박, 감자, 고구마와, 양파는 딸기
와 당근과 잘 어울린다고 한다.
이는 섞어심기(혼작)로 자연 생명체의 공생적 관계를 도와주는 농사의 방법
으로 오랜 유기농업의 경험으로 발견한
부안의 정경식씨에게서 배운 것이다. 이는 자연 생명체들의 공동체성으로
풀이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이 공생의
관계, 즉 공동체성은 열매나 잎의 공생관계이면서 뿌리와 뿌리에 붙어있는
미생물들의 상호보완과 공생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인간의 역할이란 이 공동체성을 살리고 확대하여 땅의 생명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이 자연의 생명체들과
한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유기질 퇴비
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하는 등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는 것
도 아니다. 자연의 생태 공동체를
육성하기 위한 인간의 봉사와 희생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이런 생태적 공동체의 삶을 농업이라는 산업구조로 말한다면 다품종 소량생
산의 구조를 구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독점과 대량생산, 시설농업은 자연의 생태 공동체를 파괴할 수밖에 없
다.
이런 삶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자기의 생명을 위한 것이 남의 생명을 위한 것이 되고 남의 생명을 위한 존
재가 될 때 자신의 생명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주는 것이 밀알노동
이다.
이 사실을 토대로 자연의 생명체들 모두가 이 밀알노동의 과정을 통해 존재
하고 있다고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적어도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축적하거나 과식하거나 남을 압도하거나 우점
(優點)할 수 없는 것이 자연의 평등
평화의 체계이다.
만일 이러한 가설이 증명된다면 생태공동체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이다. 그
리고 앞서 말씀드린 생태적 자아도
밀알노동의 질과 양에 따라 좌우된다고 보아야 한다.

조건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인간이 어떤 경로로 이 자연의 생태공동체에 합류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농사의 첫 경험을 통해 자연의 생태공동체에
합류해 보았다. 앞으로도 이 첫 경험을 더 심화시키려 한다. 그렇다고 모
든 사람이 이와 같은 경로를 거쳐야
생태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태에 관한 지식이나 의식이 풍부하고 투철하다 해서, 혹은 생태문
제를 해결할 프로그램이 있고 기술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자연적 생태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
는 감히 생태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자연적 생태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요즘 생태적 감성
을 불러일으키는 시(詩)를 읽으면서
깨닫는 것이 많다.
자연적 생태공동체는 자연 중심적 감성에 먹힘을 당하는 사람이 합류할 수
있는 공동체이다. 기독교 및 서구사회가
인간중심의 역사였다면 앞으로 21세기는 자연중심의 역사로 바뀌어야 한다
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생태공동체란
프리즘으로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고 국가와 민족, 정치와 경제를 바라보아
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태공동체적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우리
는 사람을 대면할 때에도 이런 말을
쓰고 있다. 자연의 생태계를 대면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유기농의 도
사에게 배운 것이 있다. 벌교에
계시는 강대인 선생이 잡풀을 향해서 공손히 큰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
다. 우리의 기존 상식과 통념을 벗어난
자기 비움의 상징처럼 보였다. 큰절을 해야만 자기를 비우는 것이냐고 질문
하실 분이 있다면 잡풀 앞에서 인간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포기해도 되느냐는 질문과 같은 것이 될 것이고 이는 자
연의 생명체들에 대한 자기 비움이
결여된 마음이라고 보여진다.
여러분 중에 ‘자연의 생태공동체에 합류한다는 것이 기인(미친놈)과 같은
것이기에 사회성도 없고 운동성도
없지 않느냐’고 비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도시에 살면서 이런 비판을 한
다고 하면 반증하려 할 필요가
없다. 농촌에 살면서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경제적 문제를 도외
시 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쉽지 않다. 우리도 한 달에 3십만원 정도의 현
금이 필요하다. 공과금(전기세,
전화세, 보험료, 경조사비용 등)이 무거운 경제적 짐이 되고 있다. 전기도
전화도 쓰지 않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직 우리가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험료와 경조
사 비용은 기존의 사회적 삶에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책무이다. 최소한의 영농비용도 1년에 약 2백만원은
필요하겠고 그래서 1년에 5백만원의
돈은 만들어야 한다. 보통 귀농자들의 경우 적게는 1년에 6-7백만원에서 많
게는 1천만원 정도의 수입은
얻어야 자급자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연의 생태공동체에 합류하
는 데 이처럼 반 생태적(전기, 전화)
비용을 지불해야 할 이유가 없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이 문제
의 해결 방법은 생태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고 전화가 필요 없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조성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율적 지역
자치주의'(북친의 ‘사회생태론의 철학)가 실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른다. 자연의 생태공동체에 합류한
결과가 기존의 정치, 사회, 경제 구조로 어떻게 평가받느냐는 안중에 없
다. 아니 이러한 우리의 삶이 매도당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주변의 눈길과 상관없이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한 염려와 인간
존재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우리를 이토록 몰입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의 생태공동체에 합류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이들을 위한 안내나 도
움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훈련 혹은
수련)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이 일은 한참 후에나 해 볼 수 있을 것이
다. 이제 그 첫 걸음을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적 생태공동체의 삶은 반드시 농촌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지
도 모른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도 생태적 공동체의 마인드를 가지고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
리 인간이 21세기의 사회와 역사를
위해서, 어쩌면 ‘제 2의 건국’을 위해서 지녀야 할 새 패러다임일 수도 있
지 않을까?

마감하는 말

우리는 이곳(농촌)에서 뼈를 묻을 생각이다. 헬렌 니어링의 책 제목처
럼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이곳에서 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당신은 자식도 다 키워놓
고 나이도 그쯤 되었으니 그럴만
하다.’고 말할 사람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우리는 너무 늦
게 깨닫고 늦게 내려온 것을 후회하고
있다. 어떤 후배들은 ‘우리도 자식을 다 키워 놓고 내려가겠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깨달음이
있다면 당장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도, 정신 내
면적 삶의 행복을 위해서도, 여러분의
미래를 위해서도 농촌 즉 자연의 생태공동체는 은혜를 베풀 것이다.
우리는 농촌 사람들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 처음 농사 이야기에서 이 사람
들의 은혜를 말씀드렸지만 한가지
더 첨가한다면 각종 종자와 모종도 남아 있으면 나누어준다. 우리는 이들
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요즘 귀농자들
사이에서도 종자의 교환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우리가 농사하지 않아도 먹을거리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손만 뻗으면
다 먹을 것들이다. 열매와 푸성귀가
풍부하다. 냇가에는 여러 가지 민물고기가 있다. 이것도 자연의 은혜이
다.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 전체가 어린이의 지성과 감
성을 일깨우고 있다. 자연의 소리에는
음악이 있고 철마다 달라지는 자연의 색깔에는 예술이 담겨 있다. 이것도
자연의 은혜이다.
농촌에 살고 있는 우리만 이런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생태
공동체는 우리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주며 먹을거리와 주택과 의복을 은혜로 제공하고 있다. 자연의 생태공동체
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고 있는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 자연의 생태공동체에 대해 보답해야 마땅하다. 우리가 보
답하지 않거나 보답하지 못한다면
자연은 우리 인간에 대한 엄청난 보복을 할 것이다. 하나뿐인 지구는 지속
가능하지 못하여 우리의 존재 기반이
소멸될지도 모른다.

미치광이 같은 사람의 이야기였을까? 남이 하지 않는 일과 삶, 소수의 사
람들이 하고 있는 힘든 일에 제
자신을 내어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푸념처럼 들리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
은 나의 자아실현 과정이기도 하다.
보편성도 합리성도 있어 보이지 않기에 설득력도 없고, 어떻게 보면 사회
의 이단자 같이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유아독존이며 돈끼호테 같은 사회적 말썽꾸러기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고 그들은 당대에 인정받
지 못했지만 후대에 빛을 발하기도
했다. 지금의 나도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소수의 선각자들에게
서 영향을 받은 것이고 소수의 진실에
제 자신을 위탁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나의 모습은 계속 반성되
고, 반성된 결과가 사회에 반사(영)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다람쥐 체바퀴와 같은 삶도 있고 영웅담적 삶(명예, 인기,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삶)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삶의 진실을 찾아 나서는 영원한 순례
자의 삶으로 자아실현을 완성하자고
주장 해 본다.

글 : 허 병 섭 (무주 진도리 생태마을 대표)
(이 글은 녹색연합이 2000년에 출판한 「생태마을길잡이」에 실린 글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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