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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새를 관찰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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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정보시대라고 한다. 정보가 곧 지식이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안에 개개인이 받아들이게 되는 정보는 무한히 쏟아지는 정보 중 극히 일부분일
것이고 어떤 정보를 습득하느냐는 개인의 교육정도와 관심사,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무한한 정보 중 하필
왜 “새?”라는 질문에 부딪히면 “좋으니까”라는 답이 가장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환경’과 ‘동물’에 대한 보다 앞선 시각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가장 올바른 답변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하호’ 프로젝트로 시작된 탐조는 일반인들에게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안에서 관찰할 수 있는 ‘새’를 소개하는 취지에서 시작되었으나 놀랍게도 나 자신이 탐조를 통해 더 넓은 시각을 가지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행동과 실천을 통해 관념적 성향에서 벗어나 자신이 주체임을 자각할 수 있다는 것. 진보와 발전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도 아직도 ‘계몽’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신호일까?

탐조를 시작한 이후 도서관과 서점을 오가며 혹은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새 전문가’에 의한 지극히 전문적인 서적들이 많고-물론 학문의 선진국에 비하면 극히 빈약한 수준이지만-연구 집단이 꽤 많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환경과 동물에 대한 관점은 매우 단편적이고 일시적이며 미비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미 야생동물 보호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물에 대해 접하는
정보는 자본의 논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의 삶에 어느 날 갑자기 뛰어들어온 멧돼지는 여전히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이며, 야생조류 탐조를 휴일을 이용한 잠시잠깐의 나들이에 불과한 일시적인 사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고,
또 개발이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었을 경우 쉽게 야생동물 보호라는 원칙을 저버리는 경우가 현재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직박구리의 소리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관찰이다 ⓒ’하호’ 이병우

야생조류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이 사실이나, 그것 자체만으로는 왠지 부족한 느낌을
저버릴 수가 없다. 자신의 눈앞에서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주변의 수많은 오염물들에 휩싸여 있으며 시시각각
멸종의 길 위에서 위태위태한 날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서울이라는 반환경적 거대도시가 형성되면서 얼마나
많은 새들이 사라져가고 그 희생의 발판 위에 우리가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서울의 공원에서 사람들은 주말을
즐겁게 보내며 일주일의 노동을 풀어내고 있었고, 그 휴식의 주변에 새들이 있었으나 나는 내내 빚진 무거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동물들의 눈을 바라보면 그 자체로 선하고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에게 선과
악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이란 악하다는 개념의 반대급부이고 악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때문에 선이란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이다. 악을 지양하고 선을 지향하며 옳은 것을 선택하고 나쁜 것을 없애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문명을 만들었고, 그 문명의 바탕에 땅과 경작, 농경이 존재했다. 동물들은 경작하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고리에
있는 먹이들을 오직 생존을 위해 취득할 뿐이다. 그런데, 문명과 농경은 인류의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계급을 형성했고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를 나누었다. 그 효과적인 분리를 위해 국가와 이념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리고 그 제도와 법이 가진 자를 위한
것이라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착취하며 발전하는 존재라는 슬프고도 무서운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다른 생명을
착취함으로써 자연을 개발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는 자각, 그 주체가 ‘윤리성’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 슬픈 자각의 한 가운데, 인간이 자연에 진 빚을 갚지 않으면 온전하고 윤리적인 존재로 설 수
없다는 의지로, 그 작은 실천으로 탐조의 한걸음이 시작되었다. 공원을 걸으며 새들을 관찰하고 사진을 찍고 도감을 찾아보는 행동이
너무나 작고 미비하고 자신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버스는 여전히 배기가스를
뿜을 것이며, 언젠가 고갈될 천연가스를 이용해 보일러를 틀 것이다. 컴퓨터를 켜는 순간 발전소의 전기를 이용하게 될 것이고,
그 전기를 만들기 위해 석유가 사용될 것이다. 프린터로 뽑아낸 종이를 만들기 위해 소리없이 숲들이 사라지고 있으며, 커피 한
잔을 만들기 위해 콜롬비아의 열대우림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숲이 사라지면 새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이고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청계천 한 복판에서 온 몸을 불사른 청년의 외침이 한낮 꿈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지만,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이 버젓이 살아 있는 지금, 그 청년의 외침은 진리가 되었다. 그것 역시 현실이다.

▲동물들의 눈을 바라보면 그 자체로 선하고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환경연합
마용운
▲길동생태공원 탐조에 참여한 하호 회원들. 맨 오른쪽이 필자인 전가은 회원
ⓒ’하호’ 이병우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며 가장 힘들게 나 자신을 붙잡는 현실은 청계천에서 온 몸을 불사른 청년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청년은 인간사이의 평등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인간과 다른 생명 사이의 평등을 이야기 한다는 점만 빼면.
그리고 그 30여년 동안 보이지 않게 노력해 왔던 인간의 의지와 실천을 생각했다. 혁명은 칵테일 파티가 아니라고 했던가. 변화는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 작은 발걸음과 실천, 일상의 힘이 언젠가 거대한 태풍이 될 것이라는 믿음. 새들의 작은 날개 짓이 서울의
거대도시에 불고 올 태풍. 그것은 한 낱 꿈일까? 미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가 없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의 자각과 반성이 없이는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없다.

서서히 파괴되고 있는 환경의 그늘 안에 ‘새’들이 있다면 결코 탐조는 가볍고 즐거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물 속으로 머리를 조아려 먹이를 찾고 있는 청둥오리의 작은 부리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직박구리의 소리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관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그 새들은 언젠가 서울의 하늘 아래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또, 그 날이 멀지 않았을지 모르기 때문에 공원을 거닐며 당신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조각된 새들을 잊지 말고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라고. 그 새들의 소리를 인간에 대한 경계라고 생각한다면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 당신의 삶과 세상이 변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당신이 온전하고 윤리적이며 진정한 주체가 되고 싶다면, 내일 도감과 사진기를 들고 공원을 찾아보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새들은 늘 그 자리에, 자연 속에 존재한다. 언제나 악한 것은 인간이었다. 생명을 통해 얻는 진정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이란 다른 생명과 자신의 평등을 자각하는 생태적 깨달음에서만 가능하다. 이제 탐조의 발걸음이 당신의 삶에서 떨어질
수 없는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 ‘하호’ http://haho.kfem.or.kr 전가은 회원
담당/ 국제연대팀 마용운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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