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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타령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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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일 폭설 속의 동해시 도보여행의 후유증이 상당하다. 2009년 계단에서 굴러 쓰러지면서 인대가 파열됐던 오른쪽 무릎과 2010년 걸어서 마흔 여행 중에 심해진 왼쪽 무릎, 그리고 과체중으로 좋지 않던 허리까지 주요 관절부위의 통증이 계속이다.  

 

요즘처럼 날이 추우면 양 무릎이 시리다. 조금 걷거나, 지하철 등에서 서있을 때도 허리에 통증이 온다. 심정은 여전히 젊다고 느껴지지만, 작은 글씨를 멀리해야 보이는 내 눈 상태처럼 내 관절도 노년기에 접어 들기 시작한 것 같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지난 12월 한 달 동안, 정말 백수처럼 지냈다. 11월까지 물 환경 대상 등으로 나름 바쁘게 지냈지만, – 오해가 있을 듯싶어서 말하지만, 벼룩이 뛰어 봤자 이듯, 백수도 바빠 봤자다 – 12월은 동면 하는 곰처럼 방콕하다 시피 했다.  

 

역시 고마운 것은 어머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아들을 위해 여전히 고마운 밥상을 채려 주신다. 그래도 백수 입장에서 어머니 눈치를 안볼 수 없다. 우선 어머니가 싫어하는 것은 하지 말자라는 것(담배 빼고 ㅠ)이 어머니께 빌붙어 살고 있는 백수 원칙 첫 번째다. 하루에 설거지, 청소, 그리고 안마 등 어머니께 잘 보이려는 예쁜 짓(?) 하는 것이 방콕 백수의 두 번째 생존 원칙이다. 두 원칙을 지키면 100 마디의 잔소리가 적어도 10마디로 줄어든다. 이럴 때마다 나는 ‘내가 참 머리가 좋구나’라고 느낀다. 

 

나의 백수 생활에서 2주에 한 번씩 고정적인 일정이 있다. 환경사회연구회 세미나 모임이 그것인데, 환경과 생태 전공하는 분들과 외국 논문의 주요 내용을 발표하면서 이야기를 한다. 나도 두 번 발표했다. 첫 번째 영어 논문을 번역해 발제할 때 나는 ‘영어 공부도 할 겸 해보자’라고 생각했다. ‘구글 번역기’도 적지 않게 믿었다.  

 

하지만 A4 20 장 분량의 영어 논문에서 2~3쪽을 이해하는데만 1주일이 걸렸다. 대학 2학년 때 영어 제수강 이후 20 년 만에 번역을 하려하니 될 리가 없었다. “구글 번역기가 그래도 괜찮다”라고 했던, 환경연합의 내 동기인 최모 국장이 괜시리 원망스럽기 까지 했다. (준호야 농담인거 알지? ㅋㅋ) 

 

두 번째 발제 때는 해외 인맥을 동원했다. 때마침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이가 방학으로 한국에 왔다. 이때다 싶어 맛있는 것을 미끼(?)로 통번역을 부탁했다. 2002년에 환경연합에서 만난 초등학생이 어느새 대학 졸업반이 됐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ㅎㅎ:; 

 

세 달여의 영어 자료를 벗고, 이번 달부터는 한글 자료다. 주제는 에코페미니즘. 백수인 내게 거금인 2만5천원을 들여 ‘정치생태학’책을 샀다. 내가 발제를 맡은 부분은 이 책의 제 7장 ‘젠더와 환경 논쟁’으로 인도의 비나 아가월이 1992년에 작성한 글이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젬병인 내게 ‘젠더와 환경 논쟁’은 역시나 어렵다. 내가 난독증인 듯싶을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난독증을 해소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찾았다. 녹색대학 한면희 교수가 작성한 ‘생태여성주의 평가와 전망’은 여성운동의 흐름을 짚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됐다.  

 

어제 배달래 작가의 내성천 라이브 바디 페인팅 퍼포먼스 후 11시 넘어 집에 들어와 이리 저리 책을 보고 있는데, 새벽 3시경 어머니는 잠이 오지 않는다며 내방으로 오신다. 칠순이 넘은 어머니에게 봄부터 가을까지 최대 소일거리는 옥상 텃밭이다. 텃밭이라고 해도 제법 작물이 많아 여름 내 방울토마토가 냉장고에 떨어지지 않았고, 이번 김장할 때도 텃밭에서 만들어진 고춧가루를 썼을 정도다.  

 

한 겨울이 되니, 어머니의 소일거리가 없어졌다. 평상시에도 그냥 누워계실 때가 많으시다. 그런 어머니는 내게 말을 거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다. “결혼은 언제 할거니? 여자는 있니?”라는 매우 고정된 레파토리에 이어 집 걱정, 가족 걱정을 늘어놓으신다. 그 때, 문득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 오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 내 어머니의 생을 취재 대상을 삼은 것이라 할까. 아무튼 어머니와의 차분히 이야기하면서 몰랐던 것도 알게 됐다. 어머니는 20대 중반인 1960년 대 말에 경기도 양평에서 서울 제기동 삼천리 연탄 공장 부근으로 가족들과 함께 집을 얻었다. 아버지가 양평에서 땅도 없이 농사 짓는 것 보다 서울에서 일자리가 찾는 것이 좋기 때문이라 했다. 때마침 아는 분 소개로 제기동 근처 공장 건설 현장을 소개 받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고향을 등지게 된 것은 다른 이유도 있는 듯 했다. 19살에 출산한 첫 째 바로 밑으로 딸이 하나 있었다. 첫째 아들과 달리 ‘이연분’이라는 이름의 딸은 무뚝뚝한 아버지를 그렇게 따랐다고 한다. 시골집에서 멀리 아버지가 보이면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두 살배기 딸은 “아찌아찌”하면서 좋아 했다. 그런 딸을 무뚝뚝한 아버지도 무척 예뻐했다. 

 

그런 딸에게 어머니는 “젓도 많이 못줬어”하며 미안해한다. 아버지가 돈 벌러 남의 집 일 하러 가면 농사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애 둘을 다 데리고 다닐 수 없어 어린 딸에게는 아침에 젖을 물리고 큰애만 업고 밭일 나갔다. 그렇게 점심 때 들어오면, 혼자 놀던 아이의 발은 오줌 때문에 짓물러 있었다고 한다. 

 

딸이 세 살 되던 해, 많이 아팠다. 아이가 아파도 없는 살림에 읍내에 있는 병원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자꾸만 열이 나는 아이를 위해 어머니는 젖은 수건으로 밤새 온몸을 닦아 줬다. 그러다 잠시 물을 갈러 나갔는데, 방안에서 아버지의 통곡 소리를 들렸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연분이가 자기 죽는 모습 내게 보이지 않으려고 내가 나가 있을 때 간거야”라고 한다. 

 

어머니는 “그 때가 네 큰형이 네다섯살 때였는데, 밤에 ‘엄마 연분이 데려와’라며 울었다”고 말하신다. 50 여 년 전에 말이 기억될 정도면 당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느껴진다. 아버지도 마찬가지 였을 듯하다. 제작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가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내가 군대 있을 때 말고 없었다. 그렇게 무뚝뚝했던 아버지와 딸에게 미안해하던 어머니는 죽은 딸을 동네 어귀에 묻었다. 

 

어머니에게 양평의 기억은 가난이었다. 어머니는 연분이 누나가 죽고 난 뒤에 유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이가 예정일을 지나도 나오지 않아 걱정했는데, 고추장 가져오다 부엌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옛날 시골집 부엌은 화덕이 있어 마당 보다 깊었다. 넘어지면서 무엇인가 만삭의 어머니 배를 때렸다고 한다. 

 

그 날 밤 어머니는 꿈을 꿨다. 어머니가 맑은 샘에서 물을 마시려 바가지를 드는 순간, 유리에 금이 가듯이 바가지에 금이 갔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유난히 아픈 배를 부여잡고 일어나보니 하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첫 번째 유산을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이의 머리가 깨졌다고 한다. 죽은 아이보다 산모가 걱정되는 상황이었지만, 가난은 여전히 병원을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에 어머니는 또한번 유산을 했다. 아침에 하혈을 했는데, 만두 만하게 튀어 나왔다고 한다. 그 때도 병원은 먼 이야기였다. 그렇게 시골에서의 아픈 기억은 서울행 결정을 서두른 이유였을 것이다. 서울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서울에서의 집은 정릉천 부근으로 경춘선 기차가 다니던 때였다, 당시 세 살이었던 작은형은 기차 소리가 나면 벽에 바짝 붙어서 바들바들 떨었다고 한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라는 동요가 있는데 그거 거짓말이다. 기차 소음이 장난이 아니다. 어린 시절 작은형은 기차 소음에 경기를 일으킨 것이다.  

 

어머니는 서울에 올라 왔을 때 또 꿈 이야기를 하신다. 어느 날 하얀 옷을 입을 산신할매가 꿈에 나타나 너에게 오남매를 줄테니 더 욕심 부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내가 태어났다고 한다. 없는 살림에 입하는 느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어머니는 나를 지우려 했다고 한다. 내 밑으로도 아이가 생겼는데,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지웠다고 한다.  

 

입때껏 내게 어머니의 젠더는 없었다. 그저 어머니였다. 내게 어제 새벽의 이야기는 어머니에 앞서 여성이었고, 가부장제와 빈곤이 그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아침에 어머니에게 연분이 누나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안나” 하신다. 50 여 년이 지나 죽은 딸의 모습은 잊어도, 그 때의 아픔은 절대 잊지 못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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