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에너지 기후변화 보도자료

[그린피스워크숍] 한국의 반핵역사

한국 반핵운동의 역사와 전망

환경운동연합 조직국장 김혜정

1. 들어가며
핵발전소 고리 1호기가 경남 양산에서 가동된 지 17년이 지난 1995년 현
재, 한국에는 10기의 핵발전소(경남 양산 4기, 전남 영광 3기, 경북 월성 1
기, 경북 울진 2기)가 가동되고 있다.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94. 12 굴업
도), 시험가동중인 1기(전남 영광), 건설중인 5기(울진 2기, 월성 3기),
2030년까지 50기 건설계획 등 한국정부는 세계적 흐름과는 무관하게 핵발
전 위주의 에너지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1962년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필두
로 70년대부터 본격화된 핵발전소 건설은 60년, 70년대 개발독재 아래서
간단없이 추진되었다. 그렇기에 한국 반핵운동도 사회정치적 변화가 있던
87년 민주화투쟁이후부터 그 시작을 하게되었다. 핵발전 역사 10년이 지난
후에야 시작된 한국 반핵운동은 그동안 핵폐기장, 핵발전소 반대운동 분야
에서 일정한 성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정부의 핵드라이브
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거나 반핵운동을 대중화시키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에 아래의 글에서는 한국 반핵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그
한계와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반핵운동의 역사
한국 반핵운동은 1987년 전남 영광 주민들의 어업피해보상투쟁에서 그 시
초를 찾을 수 있다. 당시 핵발전소는 민족중흥의 불로 일컬어지며 지역경제
의 발전은 물론 산업화, 문명화의 첨병으로 인식되어질 때였으므로 비록 어
업피해보상운동 차원이었지만 이 일은 핵발전소 문제에 집단적으로 대응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핵발전소 가동 및 건설에 따른 피해보상운동에 이어진
것은 방사능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이다. 88년 10월 발생한 박신우씨(당
시 48세, 고리핵발전소 10년 근무. 한전기술안전 총괄부장)의 임파선암 사
망사건은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줌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경
각심을 일으키게 된다. 연이어 알려진 월성 핵발전소의 중수 누출사건, 고
리핵폐기물 불법매립 사건 등은 방치된 핵발전소 안전관리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 하겠다. 특히 양산에서 드럼통, 장갑 등 핵폐기물이 마을 한
복판에 불법매립되어 주민에 의해 발각된 사건은 핵발전소 가동으로 경제적
피해를 보고있던 지역주민들의 분노에 불을 당겼다. 분노한 주민들은 한전
본사를 점거농성하고 양산, 영광 등 핵발전소 지역에서 동시다발 시위를 벌
였다. 또한 박신우씨 사망· 핵폐기물 불법매립 사건 등에 적극적 활동을
벌여온 공해추방운동연합을 비롯한 환경·보건의료 단체는, 88년 12월 지역
주민과 연대하여 서울에서 ‘반핵평화시민대회’를 개최하므로서 핵발전소 문
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핵발전소 문제가 본격적으로 사회화되고 지역주민들이 조직적인 활동을 벌
이는 시기는 89년으로, 경북 영덕지역의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한국 반핵운
동의 제 1호 승리를 가져온 곳이다. 89년 3월, 정부가 전국의 핵폐기장 후
보지 조사를 통해 동해안의 3개 지역을 핵폐기장 후보지(1순위 경북 영덕군
남정면, 2순위 영일군 송나면, 3순위 울진군 기성면)로 내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1순위로 지정된 영덕군에서는 대대적 저항운동을 벌였다. 면
단위 집회에만도 어린이에서 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3천여명
의 주민들이 참여했고 국도점거 투쟁 등 격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당
시로서는 예상치못했던 조직적이고 강력한 반대투쟁에 부딪힌 정부는 결국
3개의 동해안 핵폐기장 후보지를 백지화했다. 이로서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효시가 된 영덕주민의 승리는 추후 전개될 안면도를 비롯한 핵폐기장 핵발
전소 반대운동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같은 해 4월 15일에는 환경·보건의료·사회단체, 학생조직과 지역주민대
책위가 연대하여 ‘전국핵발전소추방운동본부(전핵추본)’를 결성했다. 전핵
추본은 핵발전소 핵폐기장의 위험성을 사회적으로 알리기위한 선전홍보활동
과 한전기술노조와의 찬반토론회 개최 등 핵발전소 문제를 사회문제화시키
는데 주력했다. 뒤이어서 9월엔 핵발전소 11, 12호기 건설저지운동과 핵폐
기장 건설백지화 부분을 핵심사업으로 하는 ‘핵발전소 11, 12호기 건설반대
100만인 서명운동본부(위원장 한승헌변호사, 서명운동본부)가 발족되었다.
두 조직은 사회각계각층이 참여한 ‘핵발전소 11,12호기 건설을 반대하는
100인 선언’을 이끌어내고 서명자만도 12만명을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핵발전소를 조직적으로 반대하는 활동은 지역단위에서도 전개되었다. 89년
2월 영광핵발전소추방운동연합(의장 서 단) 창립과 더불어 11월엔 ‘전남지
역 핵발전소 30기 건설계획철폐공동투쟁위원회(30기 후보지역: 전남 보성·
해남·신안·여천·고흥·장흥지역)’가 결성되었다. 30기 예정지역 주민들
은 공동전선을 형성, 강력한 반대입장 천명 및 환경단체와의 긴밀한 연대를
통해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영광핵발전소추방운동본부의 경우에
도 주민들의 조직적인 활동은 미진했지만 지역조직으로선 처음으로 피해
보상운동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않고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
했다.
이 시기에는 반핵운동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많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①
고리핵발전소 노동자 방윤동씨(당시 29세, 한전보수주식회사 기능보조원 근
무중 피폭) 위암사망(89. 6. 10) ② 영광 핵발전소 일용노동자 김익성씨
무뇌아 사산(89. 7. 28) ③ 영광핵발전소 일용노동자 김동필씨 기형아 출산
(89. 8. 4) ④ 고리핵발전소 인근에서 잠수부 일을 하던 김방규(당시 41세)
씨의 부인이 2명의 기형아를 낳은지 1년안에 모두 사망한 사건, ⑤ 고리 핵
발전소 지역인 효암리에서 1년동안 사망한 주민 8명의 사인이 모두 암으로
밝혀진 건(89. 8. 10 부산일보 보도) 등 이외에도 핵발전소 인근에서 기형
어가 잡히는 것은 다반사가 되었고 기형가축 발생 횟수도 잦아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핵발전소 지역주민들이 겪는 일상적 피해에다 정신적 불안
감마져 가중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방사능피해에 관한 사회적 논란이나 진
상규명 운동은 그 피해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진상이 규명되거나 운동적
차원으로 승화되지도 못해 89년 이후엔 방사능 피폭과 관련한 논란은 현저
히 줄어들게되었다.

89년의 조직화된 운동은 90년 안면도 핵폐기장 반핵투쟁을 맞아 절정을 이
룬다. 90년 11월 3일 한 조간 신문을 통해 보도된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소
식은 말 그대로 편안히 쉬고있던 안면도 주민들을 반핵의 열풍속으로 몰아
넣었다. 이장단 사퇴, 초·중 고등학생 등교거부, 중·고등학생 자체집회,
경찰서 방화, 2만여 주민 동시 집회 등 전국을 뒤흔들만큼 격렬했던 안면도
반핵투쟁은 우리나라 반핵운동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 안면도 주민들의
투쟁은 밀실행정의 상징, 과기처 장관을 몰아냈고 정부의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원칙도 민주적, 공개적으로 지역주민과 협의하여 하겠다는 입장을 끌
어냈다. 안면도의 승리는 지금도 반핵운동의 교과서가 되고있다. 물론 안면
도뿐만 아니라 한 지역의 반핵운동 투쟁사례는 거의 비슷하게 다른 지역으
로 이어져 계승 발전되고있다.

안면도 반핵투쟁 이후 정부(과기처)는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이 단순히 자
연과학적인 조건만을 고려해서 선정하거나 주민의 동의없이(또는 주민을 설
득하지않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보지 선정작업을 위해 대
학의 연구소에 용역을 발주했다. 전국의 임해지역(당시 동력자원부가 임해
지역 47곳을 후보지로 선정했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활동을 벌여 후보지
지역의 인문사회적 조건을 파악, 효과적인 주민 설득방안을 연구케 한 것이
다. 또한 과기처는 국민의견을 수렴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은 직접 나서지
않고 대학의 연구소(서울대 인구 및 발전문제연구소 등 )를 내세워 주민의
견을 수렴하는(사실상 설명회) 토론회를 개최했다. 소위 ‘핵폐기물 처분에
관한 공개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토론회는 출발부터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서울을 비롯해서 소도시를 순회하는동
안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로 2번(강릉, 서울)이나 토론회 자체가 무산되었
다. 정부는 설명회뿐만 아니라 핵폐기장을 유치하는 공모를 하기도 했으
며, 금품살포를 통한 지역주민 회유 와 해외시찰 등 갖은 방법을 동원, 후
보지 선정을 위해 사력을 기울였다. 92년에 있을 총선과 대통령 선거전에
후보지를 선정하기위해서였다.
정부의 ‘연내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 방침에 대응하기위해 환경단체 및 지
역주민대책위는 핵발전소 핵폐기장 건설을 막기위한 23개 환경단체 및 지역
주민대책위가 참여하는 ‘전국 핵발전소 핵폐기장 반대대책위원회'(91. 11.
5 공동위원장 최열, 임원식, 서한태)를 결성했다. 대책위는 ‘전국 어디에도
핵폐기장은 안된다’는 목표를 내걸고 ‘핵발전소 핵폐기장건설저지결의대
회'(91. 12 서울 탑골공원)를 개최하며 전국적 활동으로 대응했다. 이때에
는 핵폐기장 6개 후보지가 선정되기전이었지만 토론회를 포함한 집회에 지
역주민들이 조직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91년 7월 강원도 고성군 현
내면 명파리가 핵발전소로 내정되어 고성주민들이 반대운동을 펼치는 중이
었고 또 6월엔 동력자원부가 장기전원개발계획을 발표하면서 9개 지역(전
남 6개지역과 강원 삼척, 경북 울진,충남 서산 등)의 신규 핵발전소 후보지
를 발표한 이후였기 때문에 각지역에서 반대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때였
다. 기존에 핵폐기장 후보지로 내정되었던 경험(89년)이 있고, 가동되는 2
기뿐만 아니라 추가로 15기를 건설하겠다는 정부의 ‘울진군 핵단지화’ 발표
를 접한 주민들은 전군민적인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전남 지역 및 강원 고성
에서도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등 정부의 핵발전소 건설계획 발표는 오히려
전국 각지의 반핵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러한 동시다발적 반대운동은 정부의
신규 지역 핵발전소 건설계획을 무산시켜버렸다. 당분간 정부와 한전은 핵
발전소 추가 건설을 반핵운동의 취약지역인 기존부지에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핵폐기장 분야에서 정부는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91년
12월 25일 핵폐기장후보지 6곳(강원도 고성·양양, 경북 울진·영일, 충남
안면도, 전남 장흥)을 발표했다. 국민적 여론을 잠재우고 주민들의 투쟁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연말의 어수선한 틈을 타 후보지 발표를 했으나 6개지역
주민들은 연말연시에 아랑곳하지않고 폭발적이고도 강력하게 정부발표에 저
항하는 투쟁을 벌였다. 울진에선 발표일부터 약 한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군
민궐기대회를 열어 전군민이 반대했으며 양양, 영일 등의 동해안 주민들도
궐기대회는 물론 국도점거투쟁 등 강력한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안면도 이
후 다시 전국을 반핵의 열풍으로 몰아넣은 6개 지역의 핵폐기장 반대운동
은 결국 정부의 ‘핵폐기장 최종후보지 연내 확정’ 목표를 저지해내고야 말
았다.

이듬해 3월에 있은 13대 총선에서 정부의 핵정책은 주민들로 부터 냉혹한
심판을 받았다. 핵폐기장 후보지로 선정된 지역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핵
폐기장 반대를 주요공약으로 내걸었다. 울진에서는 여당의 현역 중진의원이
지역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지지하는 후보에 의해 낙선이 되는 이변이 일어났
으며, 안면도에서도 후보지 선정 당시 임기중에 있었던 민자당 의원이 낙선
되었고 그외 지역에서도 반핵을 주요공약으로 내건 후보만이 당선될 수 있
었다. 핵폐기장 후보지 주민들의 이러한 심판은 정부에게 정치적 부담을 안
겨주어 후보지 선정을 대통령 선거이후(92.12)로 미룰 수 밖에 없도록 했
다.

핵폐기장 지역주민들의 반대운동은 돈과 공권력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통해
서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자 정부는 안면도이후 밝힌 공개적, 민주적으로
핵폐기장후보지를 선정하겠다는 방침을 철회하고 강제적인 법집행을 통해
후보지 선정이 가능한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촉진 및 지역지원에 관한 법
률’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93년 12월). 이 법안을 근거로 물밑에서 핵폐
기장 후보지 선정작업을 준비해오던 정부는 94년들어 TV 방송과 신문을 통
해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벌이면서 이번에도 연말인 12월 22일 후보지에도
포함되지 않았던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를 핵폐기장 후보지로 선정
발표했다. 정부는 굴업도 선정이전에도 경남 고성과 양산, 울진, 영일, 안
면도 등에서 금품이나 공권력을 이용하여 끊임없는 설득작업과 회유작업을
벌였으나 주민들의 단결된 힘에 번번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므로 굴
업도 핵폐기장 선정은 곧 6개 핵폐기장 후보지 주민들의 승리를 말하는 것
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정부가 핵폐기장 후보지로서의 가장 기본적 원
칙인 자연과학적인 조건조차도 확보하지 못한 채 지역주민이 가장 적다(굴
업도 인구 9명)는 이유만으로 후보지로 선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러나 정부의 이러한 판단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덕적면 주민들의(굴업
도는 덕적면의 한 행정단위) 지칠줄 모르는 반대투쟁에 직면해있다.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학생운동의 조직적 참여와 인천시민 및 시의회차원으
로까지 확대되어 간단없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6.27
지자제 선거에서 굴업도 핵폐기장반대투쟁위 사무국장이 군의원으로 당선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앞에선 주로 지역주민운동을 중심으로 한국의 반핵운동을 설명했다. 그러
나 지역주민 운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또한 반핵환경단체의 역할이다. 지
역주민들은 핵문제를 지역적 차원을 넘어 본래적 의미의 ‘반핵'(내 지역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도 핵은 안된다)으로 나아가기까지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환경단체들은 주민들이 지역적 문제에 머물러
있을 때 사회단체 및 전문가들을 조직해 핵문제를 공론화, 전국화시켜왔
다. 또한 핵발전소 핵폐기장 문제만 아니라 일본의 고속증식로 건설·플루
토늄 수송문제, 러시아와 일본의 동해 핵투기 문제, 핵강대국의 핵실험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핵문제를 다루면서 반핵운동을 이끌고 있다. 국제연대
영역도 날로 확대되어 94년 4월 핵발전소, 핵폐기장후보지역 등 전국을 순
회하며 벌인 반핵캠페인(그린피스, 환경운동연합 공동주최)을 시작으로 반
핵아시아포럼, 반핵운동가 해외연수 등 반핵운동의 질적 강화를 위해 지역
주민들과 더불어 국제연대활동도 점차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3. 반핵운동의 과제
위에서 살펴본대로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은 반핵운동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사회에서 엄청난 탄압(특히 지역주민)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불과 몇년
사이에 괄목할만한 반핵운동의 성장을 이루어왔다. 한국 반핵운동의 상징이
된 안면도를 포함한 전국의 핵폐기장 후보지 지역주민의 승리는 반핵운동사
에 길이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정부와 한전이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
혀 핵발전소 신규후보지를 백지화할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하고 기존 부지내
에서 핵발전소를 추가 건설하고 있는 것은 반핵운동의 힘으로 정부의 핵드
라이브 정책에 브레이크를 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반
핵운동의 현실은 ‘굴업도 핵폐기장’ 선정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으며, 기존
부지내에 건설하고 있는 핵발전소 부분은 조직적인 반대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반핵운동진영이 그동안 폭발적인 힘으로 정부의 핵정책에
저항해왔으나 그것이 결국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핵이 위험한 줄은 누구나 알고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핵은 불가피하다’는 논리에 빠져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앞으로 한국의 반
핵운동진영은 이 벽을 깨야만 한다. 핵은 불가피하지 않다는 것을 과학적으
로 입증하기 위한 다양한 대중적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 한다. 방사능 피폭
에 대한 진상규명, 온배수 피해에 대한 과학적 입증, 수도 없이 일어나는
핵발전소 사고에 대한 예상되는 피해 파악 등 추상적, 포괄적인 수준을 넘
어 국민들이 피부로 실감할 수 있도록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연구, 조사
활동을 보완, 강화해야만 한다. 이것은 현재 반핵운동진영만으로는 절대
되지 않는일이다. 선진 외국처럼 우리나라에도 반핵진영을 다양한 부분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전문가가 조직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향후 한국반핵운동
은 전문성을 기반으로 지역적 한계와 환경단체를 뛰어넘어 일반 시민들이
주력으로 되는 ‘반핵운동의 대중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향후
한국반핵운동의 주요한 핵심과제가 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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