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보전 활동소식

가야산 해인 골프장 건설 투쟁 드디어 승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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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운동 ‘또 하나의 승리’ 가야산 해인골프장 건설 백지화

환경보존과 개발을 둘러싸고 10여년간 법정공방과 시위가 끊이지 않았던 가야산 해인골프장 건설사업이 대법원 판결로 백지화되면서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 불교계는 일제히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1월24일 (주)가야개발이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상대로 낸 공원사업시행기간연장허가재신청불허처분취소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확정하고 (주)가야개발의 대법원 상고를 기각했다. 이로써 만12년 간에 걸쳐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였던 가야산 해인골프장 건설 문제는 주민들과 환경 단체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주)가야개발이 성주군 백운리 산65일원에 18홀 규모의 골프장을 건설한다는 기본설계승인을 내고 건설부가 이를 승인해 준 것은 1990년.
가야산국립공원내 골프장이 만들어지면 생태계 파괴가 불을 보듯 뻔한 현실에서 주민들을 중심으로 92년 골프장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대구환경운동연합과 대한산악연맹 대구경북지부를 주축으로 대구지역 40여개 시민단체와 해인사 승가대학 스님들이 참여하면서 골프장 반대 운동은 불이 붙었다.

수십 차례의 집회와 결의대회, 법적소송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싸움은 단일사안으로는 최초로 100만인 반대서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공동대책위원회의 해인골프장 사업계획 취소 소송이 서울 고법을 거쳐 97년 대법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돼 골프장 건설이 실현될듯 했으나, 98년 <주>가야개발이 신청한 공사기간 연장허가 재신청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불허처분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사업주는 이에 불복해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고, 서울고법에 이어 이번에 대법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된 것이다.

12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애환도 많아 초창기부터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도영환씨는 99년 간암으로 숨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고, 문창식 당시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이 사업주에게 폭행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공정옥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차장은 “지역주민과 종교계, 시민단체의 단합된 힘이 이끌어낸 해인골프장 건설반대투쟁은 환경운동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라고 평하고 “지금 이 시간에도 지역 곳곳에서 지역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각종 부조리한 개발사업들은 더 이상 지역주민과 국민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주민투쟁위원회는 지역주민들과 시민단체, 불교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마을잔치 형식의 해단식을 갖기로 했다. 가야산 해인골프장 건설반대 투쟁위원회 장기화 총무(65세)는“1991년 8월 투쟁위원회를 결성한 후 우여곡절 끝에 사업이 백지화돼 이제야 두 다리 뻗고 자겠다”며 “이번 판결은 불합리한 개발사업에 대한 경종”이라며 활짝 웃었다.

■ 가야산 해인골프장건설 반대운동 전개과정

– 반대운동 초기단계는
지역주민대책위원회의 조직적 틀을 갖추고 대책위원회 내 결속력을 다지는 시기였다.
1992년에는 지역주민조직이 몇 차례 개편을 거쳐 조직정비를 한 후 골프장반대 고령군민결의대회 등 수차례 집회를 개최하고 해인골프장 문제를 전국으로 확산하고자 노력하였다.

– 반대운동의 성숙단계는
1994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94년 12월 경상북도지사가 (주)가야개발이 신청한 해인골프장 건설 사업계획을 승인하자, 가야산국립공원의 생태계 파괴를 우려하는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환경단체와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적 상징인 해인사 성지를 지키려는 불교계가 강력히 반발한 것이다. 이들 단체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해인골프장 건설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시민환경단체와 불교계를 망라하여 100여개에 달하는 단체들로 총 6개의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들은 해인골프장건설반대 연석회의를 구성하여 긴밀한 협조 하에 다양한 사회행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들 공동대책위원회에 의해 수차례 골프장 건설반대 집회, 시위, 서명운동, 진정서 제출, 항의방문, 전문가의 실태조사 등이 실시되었고, 95년에 문화체육부 행정심판위원회에 해인골프장사업계획승인취소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본격적인 법적행동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에서 (주)가야개발이 신청한 체육시설사업계획승인취소처분 취소건이 이유있다고 받아들여지자 공동대책위는 즉시 긴급대책회의를 가지고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국립공원 보존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무시한 반환경적 판결임을 규정하고 국민의 환경권 보존 차원에서 보다 강력히 사회행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가야산국립공원내 해인골프장 건설 전면 백지화를 위한 각계 110인 선언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반대운동에 재돌입하여, 1996년 7월 가야산국립공원 해인골프장 전면 백지화를 위한 백만인서명운동을 시작한지 120일만에 단일사안으로는 최초로 100만인 반대서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수 차례 기자회견, 해인골프장건설저지 범국민규탄대회, 해인총림대책위원회 무기한 가행정진기도 돌입, 해인골프장 실태조사단 현장조사, 해인골프장건설반대 정기거리캠페인, 해인사 산중결의대회, 범국민대책위원회 결성 등 참으로 숨가쁜 반대운동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 1997년 12월 공동대책위원회가 청구한 상고심에서 원심확정판결을 내림으로써 해인골프장 건설사업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 반대운동 정리단계
반대운동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주)가야개발이 신청한 공사기간연장허가 재신청을 1998년 12월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이 불허처분한 것이다.
사업주는 이에 불복하여 1999년 2월 서울행정법원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상대로 공원사업시행기간연장허가재신청불허처분취소 소송을 제기하였다.
해인골프장 반대운동 진영은 해인골프장 사업을 백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시 본격적인 반대운동을 진행하였다.
이제 반대운동은 법적소송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1999년 11월 재판부의 현장검증을 이끌어내었고 현장을 직접 본 재판부는 중단되었던 변론을 재개하여 2000년 1월 서울행정법원에서 사업주의 패소 판결을 내리게 된다. 사업주가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2001년 2심 판결에서도 서울고등법원은 원고의 항소를 기각하였고 2003년 1월 마지막 대법원 판결에서도 원고패소판결을 확정한 것이다.
이로써 12년간 지속된 해인골프장 반대운동은 환경운동사상 수많은 기록을 남기며 승리하게 된 것이다.

■ 가야산 해인골프장 건설 막은 중심인물

대구지역은 물론, 우리나라 전체를 따져보더라도 환경운동의 역사는 짧다.
개발논리에 밀려 환경은 중요치 않은 사항이었다.
대구에서 환경운동의 시발점은 1991년 페놀사태부터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문창식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이 환경운동에 뛰어든 것도 정확하게 이 시기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한 특이한 경력을 가진 문처장이 환경운동에 뛰어든 것도 페놀사태가 계기가 되었다.
당시 페놀사태시민대책위원회에서 실무를 보면서 환경에 대한 공무원과 기업체의 낮은 인식, 전문지식의 부족 등으로 좌절한 끝에 결국 환경운동에 투신을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93년 환경관련단체들이 공해추방대구시민운동협의회라는 이름으로 합쳐지면서 문처장은 실무진의 책임자격인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대구환경운동연합은 대구지역 환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대구환경운동연합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은 가야산 해인골프장 저지운동이었다.
12년이라는 긴 투쟁기간을 거쳐 이제 대법원의 원고패소 판결로 골프장 건설이 백지화된 것이다.
골프장 건설을 주민들과 환경단체가 막은 첫 사례로 기록된 가야산골프장저지운동은 우리나라 환경운동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싸움의 중심에는 ‘문창식’이라는 운동가가 있다.
문창식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현재 10년간의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1년의 안식년을 가지면서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필리핀 아시아센터에서 연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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