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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철거, 짝퉁환경복원이다.

최근 황진태 선생이 쓴 ‘조명래선생님, 세운상가 보존은 아닙니다’를 나는 감사하게 읽었다. 글 속에 담긴 생각의 진정성과 예의를 갖춘 비판성에 대해 특히 그러하다. 그 글의 문제의식과 지적에 대해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내가 그간 주장해 왔던 바가, 그 글에서 지적되었듯이, 그러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답글을 쓰는 까닭은 황진태 선생의 생각과 같으면서 나의 생각이 근자에 한걸음 더 나가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먼저 지적할 것은 세운상가 문제를 깊숙이 논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세운상가의 보전적 재활용’을 강조했던 것은 세운상가 재개발이 이명박 시장이 추진한 청계천 복원의 재판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오랜 전부터 서울의 남북 녹지축 조성을 위해 세운상가 철거를 주장했지만, 신개발주의가 풍미하는 지금의 서울시정에서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녹지축을 만들어 시민한테 돌려준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세운상가(1967), 세운상가 나동 개관, 김현옥 시장은 새로 지은 대규모 상가에 '세계로 뻗어나가라'는 의미에서 '세운상가世運商街'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로부터 이 거대한 건물군은 세운상가라는 이름으로 통칭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운상가 나동, 현대상가, 풍천상가, 진양상가, 신성상가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조경포럼

세운상가(1967), 세운상가 나동 개관, 김현옥 시장은 새로 지은 대규모 상가에 ‘세계로 뻗어나가라’는 의미에서 ‘세운상가世運商街’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로부터 이 거대한 건물군은 세운상가라는 이름으로 통칭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운상가 나동, 현대상가, 풍천상가, 진양상가, 신성상가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세운상가를 철거한 뒤, 남북으로 이어진 터를 따라 녹지를 조성하되, 그 지하엔 다양한 인공시설물을 넣고, 주변에 30층 높이의 고급 주상복합건물들이 블록으로 들어서도록 되어 있는 것이 서울시가 수립한 세운상가 주변 재개발계획이다. 이 계획을 수년전에 접하는 순간, ‘이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마치 본능처럼 뇌리를 스쳤다. 고층고밀의 세운상가 재개발 계획은 그 후 양윤재 전부시장의 수뢰사건으로 이어진 도심 고층화(최고 높이를 90m에서 150m로 상향조정하는 도시계획적 조치)의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청계천 복원이 제공하는 기회를 이용해 도심의 어수선한 건물들을 재건축, 재개발해 쾌적성도 높이고 업종의 고급화와 부동산 가격 상승도 꽤해 도심 토지이용의 경쟁력을 도모하자는 서울시의 입장은 청계천 주변의 고층고밀화가 정당화되는 근거가 되었다. 세운상가는 바로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곤 했다.

토지소유주 중심으로 조합을 결성해 막대한 개발이익을 남기는 방식으로 추진되는 상업적 재개발 혹은 재건축은 도시의 외관을 멋지게 수술하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세입자들이 쫓겨나고 자본력이 약한 영세상인들이 자리를 잃으며 도시의 오랜 삶의 조직이 단절되고 고밀화를 초래해 장기적으로 사회환경적 비용은 물론, 환경부정의(environmental injustice)마저 초래한다. 개발독재 하에서 건설된 세운상가의 부정의와 견준다면, 오늘날 상업적 재개발이 수반하는 부정의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대하다. 과거의 것은 국가권력이 직접 저지른 것이지만, 오늘날의 것은 지방자치단체, 토지주, 가옥주, 개발업자, 주민단체 등이 합의해 추진함으로 부정의의 문제를 제기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철거 후 조성될 남북 녹지축이 도심에서 사라진 생태종들이 돌아와 사람과 함께 공존하는 ‘생태공간’으로 진정하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점도, 재개발·재건축 방식의 특성을 감안하면서 나는 의심의 눈을 보내고 있다. 청계천도 환경·역사복원을 내세웠지만 결과는 무늬만이다. 하루에 수십만명이 찾는 것으로 청계천 복원의 성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다양한 생태종이 돌아와 스스로의 서식환경을 만드는 것을 가로막는 것을 의미하며, 이 점에서 복원 청계천은 인간종으로 획일화된, 그래서 황폐화된 생태계만 복원한 꼴이 됐다.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녹지대를 꾸민다면, 모양을 근사할지 모르지만, 지금의 공원녹지의 조성방식을 감안할 때(여의도 생태공원을 보라), 각종 인공시설물로 꽉 채우고, 그 사이 사이에 다 자란 나무들을 외부에서 이식해 놓은 조경공간이 되기 십상이다. 생태성이 결여한 이러한 나무를 어느 생태학자는 ‘녹색 전봇대’라 부른다.

녹지가 귀한 도심에 이러한 녹지라도 조성해 놓으면 감지덕지가 아닌가, 생태적인 것은 점차 갖추어 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엔 녹지공간은 더욱 왜곡된 방식으로 특정 계층에 의해 전유될 것으로 보인다. 즉, 도심의 귀한 땅에 꾸며지는 녹지는 생태종들의 서식공간으로 만들어지면서 남북 생태축으로 기능하기보다, 최고급, 초고층 건물들로 둘러싸인 채 ‘부자들의 정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더 많다. 용산공원이 생태녹지공원으로 조성되고, 주변의 수십층짜리 고급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면, 생태적인 것(예, 고층건물이 드리우는 음영에 의한 생태적 결과)은 부차적으로 고려되고, 오히려 ‘부자들의 앞마당’과 같은 것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와 같은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세운상가를 철거한 뒤, 생태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을 차지하고, 그 공간을 민중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요구가 현실에서 얼마만큼 관철될 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환경이 자본화되고 상품화되는 오늘날, 도심의 비싼 땅에 녹지가 조성되면 이를 상품화하려는 세력에 의해 주변의 집과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그 결과 공공재로서 녹지의 가치가 특정 계층에게 독점·전유되는 경향이 갈수록 현저해지고 있다. 환경부정의를 해소하기 위한 세운상가 철거가 이렇듯 환경부정의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역설이 생길 수 있음을 나는 우려하는 것이다.

더욱 오늘날, 생태도시론에서는 지하생태계의 보전과 관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땅의 인공 표면을 거두어 낸 뒤, 비가 오면 물이 스며들게 하고 공기가 흐르게 해 지하 생태계의 생명이 돌아오게 되면, 지상의 생태계와 호순환 하는 가운데 도시생태계가 점차 되살아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환경친화적 도시계획은 여전히 무늬로만 환경친화적 도시를 만들고 있다. 지상의 건물을 없엔 뒤, 지하 속으로 건물을 넣고 그 위를 시멘트 콘크리트로 덮은 뒤 흙을 채우고 나무를 심어 놓은 것으로 환경복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짝퉁 환경복원’은 서구 선진국의 생태도시계획에서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다. 이른바 ‘생태기반지수’같은 개념을 끌어들여 자연형 땅(이른바 자연지반)의 조성을 생태도시만들기 첫걸음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선진 도시계획의 기법과 견주어 볼 때, 세운상가를 뜯어낸 뒤 녹지대를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그 자리에 녹색전봇대로 조경수를 심고 지하에 각종 인공구조물(예, 주차장, 공공시설, 상업시설 등)을 넣은 뒤 위를 녹색의 오픈스페이스를 꾸미는 것은, 생태도시계획의 원칙과 어긋나는 물론, 전형적인 ‘생태 부정의(eco-injustice)’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 세운상가 철거와 함께 내세우는 녹지축의 조성이란 담론 속에는 이러한 생태부정의의 맹아가 너무 많이 발아하고 있다.

나는 한 때 ‘세운상가 철거, 녹지축 조성’을 주장했고, 지금도 사실 하고 있지만, 지금은 그러한 담론 속에 담겨있는 ‘또 다른 개발주의 사고’의 일단을 불안하게 응시하고 있다. ‘녹지 혹은 도시 숲(예, 서울숲)을 보전한다는 핑계를 내세우면서 실은 시설공원을 ‘개발’하는 정책행위에서 우리는 ‘환경과 보전을 내세운 개발주의’의 전형을 읽게 된다. 말하자면, ‘세운상가 철거, 녹지축 조성’은 얼핏 들으면 개발주의 시대의 유산을 없애고 시민한테 해당공간을 돌려주는 듯 하며 또한 도심에 사라진 환경이 되살아나는 것으로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시민과 환경을 빌미로 한 개발주의의 일단이 숨 쉬고 있음을 어렵잖게 간파할 수 있는 데, 이는 이명박 서울시장 하에서 우리가 뼈저리게 경험했던 바다.

도시를 연구하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 나는 ‘세운상가의 철거와 녹지대 조성’을 누구보다 일찍이 주장했고 또한 그 내용을 비교적 소상이 알고 있다. 이젠 그 개념이 일반시민들도 알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전문가의 전문지식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서울시에서도 시정으로 반영하고 있고, 또한 서울시의 새로운 시장은 이를 핵심공약으로 까지 들고 나왔다. 나는 1994년에 용산기지를 생태공원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했지만,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용산기지 공원화는 겉으론 녹지공원으로 꾸미겠다고 하면서, 그 뒤에서는 주변의 많은 땅을 용도변경해 개발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운상가 철거와 녹지대 조성’이란 아이디어는 초기에 가졌던 순수성과 진정성은 정치적 입장의 개입으로 크게 왜곡되거나 될 처지에 있게 된 것이다.










이정민기자


그래서 나는, 지난 531 지방선거 때, 시민단체가 주관한 후보자 초청 패널 토론회에서 오세훈 후보자가 ‘세운상가 철거와 녹지대 조성’을 핵심공약으로 들고 나왔을 때, 우선 아이디어의 진부함에 식상했을 뿐 아니라, 사업의 진정성을 의심하면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질문을 역으로 제기했다. 즉,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녹지대를 조성하는 것은 이미 오래된 아이디어지만, 근자에 전문가 사이에서는 생각을 달리해 보전적 재활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도심 활성화에 필요한 것은 무조건 뜯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오랜 정체성을 살려내는 것이 진정한 방식이기 때문에, 세운상가도 뜯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최소한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 볼 때, 그는 이 사안을 깊게 고민하지 않는 듯했고, 그저 지금까지 제기된 아이디어를 공약으로 들고 나왔을 뿐인 듯 했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서울시정 구조 속에서 추진되면 ‘세운상가 철거, 녹지대 조성’은 신개발주의 세력에 의해 포획된 채 경제를 우선하면서 무늬로만 환경을 고려하는 개발사업으로 전락할 것이 자명함을 느꼈다. 그 때부터 나는 세운상가의 보전적 재활용을 대안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대목은 ‘뜯고 없앤 뒤 녹지환경을 조성하자는 주장’이 가지는 기계적 사고와 사고의 일면성이다. 개발주의 시대의 시설을 없애고 자연친화적인 토지이용 상태로 바꾸어 내자는 주장(이를 나는 신개발주의라 부르는 데, 이에 대해선 졸저 ‘개발정치와 녹색진보(환경과 생명사)’를 참조할 것)에는 개발주의 시대의 것을 무조건 ‘없애고 철거하는 것’이 능사라는 기계적 사고가 은연중 배어 있다고 본다. 이는 근대의 기계적 도시계획 사고의 한 전형이다.

‘없애고 철거하는 것이 좋다’는 기계적 발상은 ‘환경부정의’를 부치기는 사고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 시대 우리의 도시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도시에 대한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없애고 지움으로써 뭔가 새로운 것이 구현될 것으로 보지만, 제도적 경로와 관성은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끝임 없이 지우고 없애는 개발의 연속 속에서 우리는 삶의 흔적을 없애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인하게 된다. 600년 이상이 된 서울에서 60년 이상 된 건물이 별로 없는 것은, 그간 우리는 끝임 없이 없애고 지우는 도시적 삶을 살아 왔음을 의미한다. 지금도 우리는 멀쩡한 아파트를 허물면서 ‘축 경사’라는 프랑카드를 단지 입구에 내걸고 있다.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녹지대를 조성하자는 주장이 이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판단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이는 아니다’라는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했고, 그래서 역발상이 필요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로마시대 때부터 있었던 어느 작은 도시에 산 적이 있다. 그 도시의 중앙로 한 부분은 몇 백년 전에 지은 교회건물이 길 중간까지 나와 있는 데, 그래서 그 곳을 통과할 때는 신호에 따라 한 방향으로 만 차량을 운행하게 된다. 통과할 때는 자동차 바로 위로 교회의 종이 내려와 있음을 보게 된다. 건물이 보잘 것 없고, 또한 심각한 교통체증을 낳고 있지만, 그 곳 주민들은 이를 도시의 삶이자 역사이며 정체성이라 여긴다. 서구의 오랜 도시들은 대개 이러하다. 이에 반해 우리는 그것이 일제 시대의 잔재물이고, 개발주의의 유산이며, 또한 부동산가치가 하락했다는 이유로, 기존의 것을 끝임 없이 지우고 없애고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다 보니, 600년 이상이 된 도시에 60년 이상 된 건물이 없다.

도시의 공간조직은 도시인들이 오랜 세월 살아온 삶의 관계를 치밀히 짜놓은 옷감과 같은 것이다. 날줄과 씨줄 하나하나가 모여 옷감의 전체 패턴과 질감을 만들고, 우리는 이를 가지고 그 옷감의 가치(옷감의 정체성)를 판정한다. 왜, 우리는 옷감을 다 짜기도 전에 날줄, 씨줄을 이렇게 끝임 없이 빼내고 바꾸고 있을까, 언제까지 그래야만 하나? 나는 우리의 이러한 공간적 삶의 모습, 즉 삶의 공간적 흔적이 얕은 모습은, 우리 정체성을 사실 끝임 없이 부정해 온 삶의 모습 그 자체라 여기고 있다. 이 부정은 결국 우리 자신의 부정이다.

도시의 공간조직은 건축물 하나하나가 모여 짜여 진 것이다. 도시 공간이 표방하는 저러한 삶의 흔적을 생각한다면, 그 건물이 비록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쉽게 허물고 없애버릴 성질의 것이 아닐 것이다. 서구의 오랜 도시에서 맛볼 수 있는 공간감은 개별 건물 하나하나를 지켜오고 가꾸어 온 것의 결과다. 때문에 그것이 청계천이던, 세운상가이던, 삶의 오랜 흔적을 담고 있는 건축물이라면 정책결정가의 독단에 의해 해체되고, 또한 특정 주민의 경제적 이익에 따라 재개발, 재건축될 것이 아니다.

도시의 조직과의 연계를 이루면서 지속성을 갖는 전제 하에서 해당건물의 해체와 보전의 방식이 결정되도록 하되, 그 판단은 오랜 시간을 두고 도시성원들이 논의하고 검토하는 가운데 나와야 한다. 이러한 논의 혹은 결정 구조가 없는 상태에서 청계천복원이 추진되었고 세운상가 철거가 추진된다면 그 결과는 특정 세력의 입장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 뻔하다. 청계천 복원이 어떻게 추진된 것인지를 알면, 우리는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아는 몇몇의 외국학자들은 복원 청계천을 둘러본 뒤 별로 감명을 받지 않는 듯 했다. 까닭을 물어보니, 복원 이면에 깔려 있는 복원에 대한 인식의 얕음과 합의의 부재, 특정입장에 의해 졸속으로 추진됨으로써 복원의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이유로 들었다.

세운상가 건물이 가지는 의미를 떠나, 세운상가를 철거한다는 것은 일단 지난 개발주의 시대부터 살아온 삶의 공간적 흔적을 우리의 시각으로부터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바로 이 대목을 걱정하고 있다. 세운상가 철거가 우리가 꿈꾸는 ‘녹지축이 살아나는 생태문화도시’를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세운상가를 터전으로 하여 힘들고 고단하게 살아온 그러면서 역사를 새롭게 창조해온 서민들의 공간적 삶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심각한 ‘공간의 부정의’를 저지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비록 일제 식민지 통치의 상징이었던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도 보존하자고 주장했던 적이 있다. 그 주장이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세운상가를 보전적으로 재활용하자는 주장은 세운상가에 배여 있는 개발독재의 의미를 지지하자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공간적 흔적’이 가지는 역사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 어느 것 보다 앞서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젠 우리 도시에서는 삶의 시간적 흐름을 잇고 다듬어가는 공간적 모듬살이가 무성하도록 할 때다. 그것은 환경정의를 지키고 실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운상가는 개발주의 시대의 근대적 삶을 실험하고자 했던 건축적 이상을 담고 있으며, 또한 한국전자산업의 요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낙후 되어 있지만, 기술이 낮고 자본이 부족한 서민들이 생업을 영위하는 터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곳을 재개발한다는 것은 근대의 기간 동안 치열하게 온 삶의 흔적을 지우는 것을 넘어 현실적으로는 도심에서 생업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서민들의 삶터를 앗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이른바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환경부정의의 다른 측면이 된다.

내가 ‘세운상가 철거, 녹지대 조성’이란 원칙적 입장을 보전적 재활용 쪽으로 바꾸는 것은 전자의 입장을 버린 게 아니라 전자가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되기 힘든다는 판단에서 후자를 대안으로 생각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나는 생각을 바꾼 게 아니라 생각을 한 걸음 더 내딛었다고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 보전적 활용을 통해서도 ‘세운상가철거, 녹지대 조성’의 꿈을 일정하게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추상적 원칙에서 현실적 원칙으로 돌아 온 셈이다.

사실 보전적 재활용이란 측면에서 볼 때, 세운상가는 여러 가지 긍정성을 가지고 있다. 세운상가는 일제시대 만들어진 남북 소개지에 건축됨으로써, 서울 도심내의 건축물이 모두 동서로 배열되는 것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모습과 위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운상가 건물을 보고 추하고 어긋난 건물이라 부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건물의 형태와 배치가 성장기의 우리의 삶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운상가는 김현옥 시장 시절, 즉 성장기 동안에 추진된 하향적 도시개발의 가장 강한 흔적이다. 이 흔적은, 일제가 우리민족을 수탈했지만 그 건축적 흔적을 중앙청에 남긴 것과 같은 것이다. 중앙청 건물을 보전해야 한다면,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우리 역사의 기록이고 기억이기 때문이다.

건축물의 의미를 떠나 건축물의 형태적 미학 자체로만 본다면, 중앙청 건물은, 비록 식민지 시대에 건축된 것이긴 하지만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하나라고 부를 정도로 거기에는 나름대로 건축적 혼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비록 그 혼이 우리민족을 압살하는 것을 돕는 것이긴 하지 말이다. 마찬가지로 세운상가도 개발독재 하에서 건축된 것이지만, 당시로선 가난한 시절 미래지향적 꿈을 담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즉, 세운상가는 르코르비제의 근대 도시계획적 이상을 담아내려고 했던 건물이다. 그러나 건축가 가졌던 이러한 건축적 이상은 건물이 실제 지어지는 과정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세운상가가 볼품없는 건물로 평을 받는 데는 당초의 설계대로 건축이 되지 못한데도 적잖은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운상가 건물을 허물내고 상업적으로 재건축함으로써 그 일대의 공간적 조직을 단절시켜 폐절시키기보다, 세운상가를 만들 때 본래 부여하고자 했던 건축적 이상을 우리세대가 새롭게 해석 한 후 리모델링을 통해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 도시계획이든, 환경정의이든, 어떤 측면에서도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즉, 주변과 어긋나 있는 건축적 형태와 기능을 가다듬게 되면(즉, 리모델링하면), 세운상가는 성장기부터 지속된 삶의 공간적 기록을 이으면서 21세기를 지향하는 건축물로 거듭나게 되어 서울도심의 대표적인 건축적 랜드마크로 인식될 수 있다.

허무는 대신 후손들이 그 건축물이 당초 꿈꾸고자 했던 것을 제대로 해석하고 구현해 현재적 삶 속으로 다시 받아드린다면, 그 미덕은 해체해 새로 짓는 것 보다 훨씬 값진 것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없애고 지우는 것’이 과거에 대한 증오를 일정하게 반영하면서 개발주의의 다른 단면이라면, ‘재해석을 통한 세운상가의 중창’은 삶의 시간적 흔적을 이으면서 과거와 미래가 화해하는 것이 된다. 우리의 도시에도 이젠 이러한 공간적 모습이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세운상가의 보전적 재활용은 상업적 재건축으로 인해 그곳을 쫓겨나야할 사람과 활동을 그곳에 계속 머물 수 있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또한 세운상가를 보전적으로 재활용하자는 것은 21세기 서울도심이 필요로 하는 기능과 역할을 일정하게 새롭게 부여하자는 의미도 담고 있다. 가령, 남북생태녹지축은 새운상가를 리모델링할 때 옥상녹화, 건물녹화, 이층 데크를 설정하고 이를 녹도로 조성, 주변지역에 다양한 녹지공간의 확충 등을 통해 최대치는 아닐지라도 일정한 효과를 거양할 수 있다. 말하자면, 뜯어내고 인공녹지시설을 만들 바에야, 기존 건축물을 전체로 녹화하고, 생태적 기능을 보강하며, 주변의 녹지와 녹도를 조성하는 것을 통해서도 남북 녹지축 기능을 일정하게 갖추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운상가의 건축물 수명이 다하고, 또한 도심 생태복원의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시정운영 시스템이 갖추어지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가서는, 세운상가를 전면 철거 한 뒤 맘껏 꿈을 펼칠 수 있다.

세운상가와 건축가 김수근과의 관계가 세운상가를 반드시 해체하고 없애는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은 중앙청의 보전을 이야기했을 때 이미 언급한 것이다. 잘못된 과거는 지우고 없애야 한다면, 우리의 역사에, 그리고 공간적 모듬살이 속에 과거가 얼마나 남아있게 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역사를 미화해가면서 공간 속에 인위적으로 남길 필요는 더욱 없다. 나는 건축가가 아니기 때문에 건축가로서 김수근선생에 대한 평가는 자제하고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개발독재 시절 권력과 유착되었다 하더라도, 또한 그의 건축물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누어 있다 하더라도, 그는 한국 근대화 과정을 특징짓는 중요한 건축물을 설계했고 지금도 그 흔적을 강하게 남기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그가 권력과 유착되었다는 이유가 잘못된 역사를 단죄하고 청산하는 방식으로 그의 공간적 유작을 지우는 것의 논거가 될 수 있는 지는 그의 건축세계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나에게 분명치 않다.

또한 김현옥 시장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연속으로 김수근선생에 대한 평가가 가해져야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세운상가를 없애고, 또한 그가 남긴 주요 건축물을 없애는 논거로 자동 성립되는 지도 좀 공부를 해보아야 할 사안인 것 같다. 그가 세운상가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건축적 이상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고 기억할 만 것이다.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개발독재이란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그의 건축적 이상이 왜곡되었다면, 그 왜곡을 풀면서 근대시절의 공간적 흔적으로 세운상가를 남겨두는 것은 역사를 아름답게 잇는 한 방식이 되기에 충분하다. 요컨대, 해체하자는 사고의 폭력성을 걱정하면서, 또한 신개발주의 시정 하에의 왜곡을 우려하면서, 생태문화도시의 이상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으로 ‘세운상가의 보전적 재활용’을 고려하게 되었던 것이 나의 ‘세운상가 보전의 변’이다.







조명래
mrcho55@kornet.net, http://www.mrcho.er.ro/

단국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ㆍ환경정의집행위원장
2001, 2003 대통령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전문위원, 한국공간환경학회장 역임.
저서 [현대사회의 도시론], [녹색사회의 탐색].





조명래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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